[보드게임의 세계] 창의성이 빛나는 순간의 즐거움, '콘셉트'
콘셉트의 아름다운 박스. <출처: divedice.com>
'콘셉트(2012)'는 2013년 독일 에센 보드게임 박람회에서 독특한 게임 방식으로 주목받은 게임이다. 콘셉트는 프랑스의 게임 디자이너 가에탕 보자노(Gaetan Beaujannot)와 3D 작업 기술자이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알랭 리볼리(Alain Rivollet) 두 사람이 만든 작품이다. 제작사는 '7 원더스(7 wonders, 2010)'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인 레포스 프로덕션(Repos Production)이다. 이 게임은 이듬해인 2014년 독일 올해의 게임상(SDJ) 후보까지 올랐다. 이후, 한국어판을 포함해 2015년 출시된 브라질판까지 약 2년 만에 총 11개 국가에 수출됐다.
콘셉트는 간단한 규칙을 바탕으로 한 추리 연상 게임이자, 10명까지 플레이가 가능한 파티 게임이다. 심플한 디자인의 하얀색 박스는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게임 방법
콘셉트는 2명이 팀을 이루어 문제카드를 뽑아 퀴즈를 내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정답을 맞추는 게임이다.
문제카드 <출처: divedice.com>
콘셉트의 문제카드에는 아홉 개의 단어 또는 구문이 적혀 있다. 3개씩 묶어서 1, 2, 3번 문제가 가장 쉽고 4, 5, 6번 문제가 중간 난이도이며 7, 8, 9번 문제가 가장 어렵다. 이제, 두 사람이 출제자가 되어 카드에 나온 아홉 가지 문구 중 하나를 골라 설명해야 한다.
콘셉트의 게임판 <출처: divedice.com>
그렇다면 설명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 때 말을 해서는 안 되고, 게임판에 나와 있는 기호에 게임말과 큐브를 올리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 콘셉트의 게임판에는 117가지의 다양한 기호들이 그려져 있다. 물, 불, 사람, 제목, 도구, 도시, 높다, 낮다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을 조합하면 거의 모든 단어나 문구를 설명할 수 있다. 기호의 여러 의미를 설명하는 참조표를 보면서 할 수도 있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기호들을 보고 하나하나 상상하며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
출제자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들은 설명을 보고 답을 찾아야 한다. 정답을 맞히는 사람은 해당 라운드의 승자가 된다. 이긴 사람은 승점에 해당하는 전구 타일 중 전구 2개가 그려진 큰 타일을 갖는다. 그리고 문제를 낸 사람들도 잘 설명했으니 전구 1개가 그려진 작은 타일을 갖는다.
이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 <출처: divedice.com>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위 그림에서 기호 1(위)은 물, 액체, 비, 흐르는 것 등 수많은 의미를 지닌다. 기호 2(좌측 아래)는 음식 그림으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누군가는 식사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회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호 3(우측 아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흰색'이라고 이해할 만한 기호다. 기호 1과 2가 합쳐지면 '먹을 수 있는 액체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물, 술, 콜라, 사이다 등등. 하지만 여기에 기호 3의 '흰색'이 결합되면 의미가 훨씬 더 한정돼, 마침내 정답인 '우유'가 나온다. 만약 설명해야 하는 관념이 '우유'가 아니라 '바나나우유'라면, 다른 기호들을 동원해 '바나나'도 설명해야 한다.
설명을 돕는 게임말. <출처: divedice.com>
콘셉트에서는 각각의 기호에 게임말을 놓는데, 핵심적인 개념 위에는 초록색 물음표 말을 놓는다. 그리고 부가적인 설명을 위해 초록색 큐브를 다른 기호 위에 놓는다. 위 그림에서는 기호 1(물)에 물음표를 올렸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기호 2에 올려서 '먹거리'라는 개념을 두고 설명을 할 수도 있다. 기호 1에 올린다면 '이것은 액체인데 먹을 수 있고 희다'가 되고, 기호 2에 올린다면 '이것은 먹거리인데 흰 액체다'가 된다. 여기에 '바나나'라는 개념을 추가로 설명하려면, 다른 색의 느낌표 말을 올리고 그 느낌표 말과 같은 색상의 큐브로 설명을 보충한다.
만약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설명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아마 물음표 말로는 '흑백영화의 제목' 정도로 설명하고, 느낌표 말로 '인간이 도시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내용'이라는 설명과 '콧수염 나고 키 작은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설명이 들어가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기호의 결합을 만들어 가면, 문제를 푸는 이들은 출제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답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맞추는 이들은 출제자들이 퀴즈를 내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정답을 유추해야 한다. 틀린 답을 말하더라도 감점은 없다. 틀린 답이라도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
콘셉트와 언어
콘셉트는 언어의 특징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다. 본디 언어란, 어휘와 의미의 결합이다. '새'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 날짐승을 떠올리는 것에서 '새'는 어휘이고 [날짐승]은 의미다.
'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선박]이나 [복부]나 [과일]이라는 의미들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의 어휘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경우의 예이다. 또한 세상에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선박]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어휘는 한국에서는 '배'이지만 중국에서는 ‘船’이고, 미국에서는 'ship'이다.
언어는 어휘와 의미의 결합이 임의로 되어 있다. <출처: divedice.com>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어휘와 의미의 결합이 임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박]이라는 의미가 '배'도 '船'도 'ship'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실상 사람들이 [선박]을 '새'로 부르기로 처음부터 정하기만 했다면 '새'로 불렀을 거라는 말이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사실은 이런 결합이 사회적인 약속이라는 것이다. [선박]을 '배'가 아닌 '새'로 부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선박]을 '배'로 부르기로 약속했다. 그렇기에 한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이제부터 나는 [선박]을 '새'라고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듣도록 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제주도에 갈 때는 새를 타고 가"라고 말한다면 '선박을 타고 간다'라고 본인은 말했을지라도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것이 분명하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일컫는다.
콘셉트는 이러한 언어의 특징을 게임으로 만들었다. 다만, 쉽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 기호 대신 그림 기호를 사용했다. 위 사례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림 기호는 상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문자 언어가 어떤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라면, 이와 비교해 그림 기호는 의미 전달이 간접적이다. 이처럼 콘셉트는 그림 기호를 통해 추리와 연상 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한 게임이다.
수수께끼를 소재로 한 보드게임들
영화 <호빗>의 한 장면. 골룸과 빌보가 수수께끼 대결을 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무고개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가? 스무고개는 플레이어 한 명을 출제자로 설정하고 주제를 하나 고른다. 다른 참가자들은 질문자가 되어 차례마다 "예" 혹은 "아니오"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출제자는 이에 대해 거짓없이 답변한다. 질문자가 정답을 맞히면 다음 라운드 출제자가 되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콘셉트를 해보면 '스무고개'나 '수수께끼'와 같은 퀴즈를 떠올릴 법하다. 설명을 위해 게임말을 하나하나 놓는 방식이 플레이어들 간 문답을 주고받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수수께끼는 옛 영시나 문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고, 스무고개는 그보다 늦은 19세기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미국의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이 크게 성공하면서 스무고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퍼졌다. 보드게임에서는 스무고개보다 빠른, 1550년에 나온 '제스처 게임'이 콘셉트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캐레이드의 다양한 버전들 중 하나. 1986년 호주에서 나온 판. <출처: boardgamegeek.com>
'캐레이드(Charade, 1550)'는 단어나 개념을 몸짓으로 설명하는 제스처 게임으로, 16세기 프랑스에서 기원했다. 이 게임은 대상의 개념을 설명하는 몸동작의 우스꽝스러움으로 인해 파티 게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도 옛 모습을 유지한 채 몇몇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다.
픽셔너리 역시 숱한 버전이 존재한다. <출처: divedice.com>
정답 맞히기 게임 중에는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는 방식이 꽤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게임은 '픽셔너리(Pictionary)'다. 픽셔너리는 팀을 맺고, 단어 카드를 뽑아 한 명이 단어를 스케치북에 그린다. 다른 한 명이 정답을 맞히면, 주사위를 굴려 전진한다. 제한 시간이 있어 상대팀에게 차례가 넘어가기 때문에, 자기 차례에 가급적 많은 단어를 맞춰야 한다. 어휘의 난이도에 따라 주니어와 파티박스가 있다. 사람 모양의 인형에 캐릭터의 특징을 잡아 그림을 그리는 '픽셔너리 맨(Pictionary Man)'도 있다.
TV쇼를 연상케 하는 텔레스트레이션 <출처: boardgamegeek.com>
텔레스트레이션(Telestration, 2009)은 어휘 설명 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먼저, 한 사람이 설명해야 하는 어휘를 그림으로 그려서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다음 사람은 그 그림을 보고 자신이 생각한 어휘를 쓴 다음,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다음 사람은 새로운 어휘를 바탕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 다음 사람에게 넘겨준다.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을 거치다 보면 마지막 사람으로 가는 동안 하나의 어휘가 어떻게 다양하게 바뀌었는지 볼 수 있다. 그림을 잘 그려 다음 사람의 추측을 돕거나, 정확히 추측을 한 경우 점수를 받는다.
이 보드게임들은 하나의 개념을 언어 기호가 아닌 방식으로 설명하는 과정의 난해함을 게임으로 풀어냈다. 콘셉트 역시 이들과 궤를 같이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직관성이 낮은 방식을 쓴다. 때문에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는 것은 쉽더라도 실제 게임 난이도는 높은 편에 속한다.
창의성이 빛나는 순간, 그 재미
콘셉트의 에센 박람회 시연 장면 <출처: divedice.com>
콘셉트 한국어판은 현지화가 잘 이루어져서 '경복궁', '방망이 깎는 노인'과 같은 문구들도 종종 볼 수 있다. "I’m your father", "Captain Halock", "Hungry like the wolf" 등의 영문 카드를 그대로 옮겼다면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려운 단어도 많아서 난이도가 낮은 단어에 눈이 가기도 하지만, 사실 문제 카드는 이 게임의 옵션에 불과하다. 직접 문제를 출제해 어떤 개념어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게임판의 기호들로 거의 다 설명할 수 있다.
연상을 통해 정답을 맞히는 게임들은 '상대와의 소통'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캐레이드'나 '픽셔너리', '텔레스트레이션'이 상대와의 소통이라는 개념을 단순하게 가져간 형태라면, '콘셉트'나 '딕싯'은 좀 더 복잡한 형태를 취했다. 콘셉트는 딕싯과 유사하게, 서로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주목하고 관심을 갖는 유형의 게임이다.
당신의 창의성이 재미있고 빛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
콘셉트 게임의 한글 규칙에는 작가의 별도 의견이 있는데, 그는 '점수를 얻는 것을 생략하고 진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여기에는 '순수하게 힌트를 만들고 정답을 맞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게임을 해 보면 점수에 몰두하기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이 어휘를 설명하고 남이 설명한 개념을 맞추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콘셉트는 그 어떤 보드게임보다도 상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게임이다. 보드게임의 장점이 사람과 사람의 대면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콘셉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빛나는 게임이 아닐까.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현 수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