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플레이어가 280만 원인 세상, AK240 리뷰
아이리버의 주력사업은 음향기기였다. 한때 매출의 40% 정도가 MP3 플레이어에서 나올 정도로. 하지만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MP3 플레이어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한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 때문에 블랙박스, 스마트폰 케이스, 전동칫솔 등을 생산하며 외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작년부터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품질 음원 재생기 '아스텔앤컨(Astell&Kern)' 시리즈다.
지난 2012년 10월, 아이리버는 아스텔앤컨 시리즈의 첫 제품인 AK100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는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비싼 가격(69만 8,000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용자의 입에 오르내리며 인기를 끌었다. 아이리버는 여기에 힘입어 사양을 약간 변경한 'AK120', 스마트폰용 외장 사운드카드 'AK10' 등을 잇달아 출시했다. 그리고 얼마전 AK100의 정식 후속작 'AK240'을 공개했다.
일단 가격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AK240의 가격은 출고가 기준 278만 원이다. 매우 높은 가격 때문에 일반인이 단순한 흥미로 접근할 만한 물건은 아니란 뜻. 도대체 어떤 기능을 품고 있길래 이런 가격이 붙은걸까?
AK100이 무손실 음원(24bit, 192kHz)을 그대로 재생할 수 있는 기기였다면, AK240은 여기에 DSD 포맷의 파일을 손실 없이 재생할 수 있는 성능을 더했다. 우선 DSD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음원 파일은 보통 PCM과 DSD, 두 가지 방식으로 인코딩된다. 우리가 흔히 듣는 FLAC, MP3는 PCM 방식으로 인코딩된 음원 파일이다.
PCM(Pulse Code Modulation, 파동 부호 변조)이란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방식 중 하나다. 스튜디오에서 음악가가 연주한 곡의 소리(아날로그)를 파동의 연속이라고 보면, 음악 파일(디지털)은 이 파동의 높낮이를 0과 1로 바꿔 표현한다. 완만한 경사로를 계단처럼 바꾼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반면 DSD(Direct Stream Digital)는 아날로그 신호를 파동의 폭으로 표현한다. PCM의 높낮이를 표현하는 그것과 다른 방식이다. 특히 PCM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DSD 파일은 DSF(DFF)라는 확장자를 사용한다. 이를 일반 PC에서 재생하기 어렵고, 혹시 재생하더라도 대부분 PCM으로 변환(DSD to PCM)한 후 재생한다. AK240은 이런 DSD 파일을 변환하지 않아도 재생할 수 있는 기기다(Native DSD).
기기의 용도는 이제 알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격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니 제품에 관해 조금만 더 알아보자. AK240은 DAC를 2개 내장했다. 음악 파일을 재생할 수 있는 모든 기기는 DAC(Digital Analog Converter)라는 칩을 갖췄다. DAC는 파일 속에 이진수로 담겨 있는 디지털 정보를, 소리라는 아날로그 형태로 바꿔주는 칩이다.
AK240은 DSD를 지원하는 DAC, 시러스 로직의 'CS4398'을 2개 내장했다. 2개의 DAC는 각각 파일에 담긴 왼쪽과 오른쪽 소리를 완전히 나눠서 출력한다. 이를 통해 소리의 입체감을 살리고, 각 채널의 소리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게 아이리버측의 주장이다.
이제 소리를 들어보자.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무손실 음원, 이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 성능 좋은 헤드폰 등의 세 가지를 모두 갖춰야 한다. 필자는 DSD 포맷의 음원 몇 곡 AK240 그리고 젠하이저 모멘텀 온이어를 준비했다.
우선 야신타(Jacintha)가 부른 Danny Boy(DSD 64, 24bit/2.8MHz)를 들었다. 이 노래는 약 7분 20초의 재생시간 중 앞부분 2분 40초 동안 시끄러운 악기소리 없이 가수의 목소리만 나온다. 때문에 소리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음악을 재생하니, 우선 가장 와 닿는 부분은 공간감이다. 실제 콘서트 홀에서 부른 노래를 듣는 것처럼 소리의 깊이감이 있고, 울림이 좋다. 세부적인 소리도 잘 들린다. 들이쉬는 숨 소리는 물론, 침 삼키는 소리까지 아주 세밀하게 묘사했다. 같은 음원을 PC(DSD 파일 재생을 위한 플러그인 설치함)에서 재생해보니 이런 세부 묘사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다음으로 얀 군나르 호프(Jan Gunnar Hoff)의 Living(DSD 128, 24bit/5.6MHz)을 들었다. 이 노래는 재즈풍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중고음 영역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음악을 재생해보니 고음 영역이 깔끔하고 선명해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고음 사이사이에 들리는 중저음도 굵고 묵직하게 들린다. 각 음역대의 소리가 모두 개성이 있어, 잘 구분된다.
USB 케이블을 이용해 PC와 연결하면, AK240을 PC용 사운드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 PC에서는 DSD 포맷을 원음 그대로 재생할 수 없다. 이때 AK240을 연결하면 PC에 저장한 DSD 포맷의 음원을 손실 없이 재생할 수 있다. 이를 사용하려면 USB DAC 드라이버, DSD 파일 재생을 위한 소프트웨어 등을 설치해야 한다.
제품의 외형은 조금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상당히 미래 지향적인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고급스러운 맛이있다. 본체는 알루미늄 합금(두랄루민)을 통으로 깎아 뼈대를 만들었다. 결합부가 없기 때문에 더 견고하고 단정해 보인다. 후면은 탄소 섬유 소재와 유리코팅으로 마감했다. 아이리버 관계자는 제품의 디자인을 '빛과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직육면체와 그 그림자를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이 '그림자'의 숨은 용도도 있다. 음량 조절 다이얼을 보호한다. AK100은 이 음량조절 다이얼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있어 주머니에 넣었을 때 잘못 조작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AK120은 이를 막기 위해 다이얼 양옆에 보호대를 추가했지만, AK100의 디자인을 해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AK240은 외형 자체를 기존 제품과 다르게 설계해 다이얼을 보호한다.
아날로그 느낌이 나는 음량 조절 다이얼은 소리의 크기를 0.5dB씩 150단계로 조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용자가 원하는 소리의 크기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일반 MP3 플레이어가 음량을 15~20단계로 조절할 수 있던 것과 비교하면 그 폭이 훨씬 넓다.
액정 화면도 커졌다. 이전 제품들은 화면 크기가 제품의 절반 정도였지만, AK240은 화면이 두 배 가까이 커졌다(3.31인치). 또한, 터치스크린 영역이 넓어져 이전 제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터치 키패드도 사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적응할 수 있겠다.
전작과 달리 와이파이 기능도 내장했다. 이를 통해 그루버스(아이리버의 고음질 음원 공급 서비스)에 접속해 고음질 음원을 직접 구매할 수 있다. 와이파이 기능 덕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OTA(Over the Air)를 통한 원격 업데이트다. 스마트폰처럼 펌웨어나 운영체제 업데이트를 PC 연결 없이 무선으로 진행할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이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 펌웨어 업데이트가 한번 있었다. 처음에는 제품에서 DXD(Digital eXtreme Definition, 24bit/352.8kHz PCM) 포맷의 파일을 지원하지 않았지만, 업데이트 이후 이를 지원하게 됐다.
DSD 포맷은 물론, PCM 포맷의 무손실 압축 음원은 용량이 상당히 크다. PCM 포맷의 파일을 보면 4분 내외의 MP3 파일은 보통 크기가 6~7MB 정도며, CD음질(16bit/44.1kHz) 파일은 40~50MB 정도다. 24bit/192kHz에 이르는 무손실 음원은 100MB 이상이다. DSD포맷은 이보다 1.5~2배 정도 더 크다. AK240의 내장 메모리는 256GB다. 휴대용 음원 재생기 중 가장 큰 용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에 마이크로SD카드 슬롯을 통해 128GB를 추가할 수 있다. 이렇게 사용하면 총 용량은 384GB에 이르게 된다. 이 정도면 무손실 압축 음원을 약 3,000곡, DSD 음원을 약 2,000곡 정도 저장할 수 있다.
전작보다 성능이 향상된 탓일까.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문제도 생겨났다. 바로 '발열'이다. 화면을 켜지 않고, 음원만 장시간 재생해도 제품이 뜨거워진다. 처음에는 제품의 윗부분만 뜨거워지지만, 뼈대가 일체형 금속이라 곧 제품 전체로 열이 퍼진다. 심한 발열은 아니지만, 신경쓰일 정도는 된다. 고음질 음원을 처리하면서 내부 프로세서에 부담이 간 모양이다.
AK240은 AK100보다 전반적인 완성도가 향상된 모범적인 후속작이다. 기존에는 지원하지 않던 DSD 포맷까지 재생할 수 있으며, DAC를 2개 탑재해 음질까지 향상시켰다. 와이파이를 통해 음원을 보다 편리하게 내려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역시 가격이다. 제품 자체는 만족스럽지만, AK100보다 4배나 비싸졌다. 제품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용자에겐 합리적인 가격일테고, 제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용자에겐 사치품에 불과할테다. 아스텔앤컨 시리즈는 언제나 그런 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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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IT동아 이상우(lswo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