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ITC의 애플 수입금지 결정 거부... 보호무역의 재림인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애플 제품 수입금지 조치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ITC의 결정을 대통령이 번복하는 것은 지난 1987년 삼성전자 PC메모리 분쟁 이후 26년 만이다.
지난 3일(현지시각)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을 통해 '애플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 때문에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는 것은 과하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 ITC의 결정을 거부했다.
결정의 근거는 프랜드 조항(FRAND, 표준특허)이다. 표준특허의 취지는 두 가지다. '누구라도 정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해당 특허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표준특허를 악용해 타사의 시장 참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오바마 행정부의 판단은 이 가운데 후자에 비중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마이클 프로먼 USTR 위원장은 준사법적 독립기구인 ITC의 권고를 거부한 데 대한 부담을 고려한 듯 "이번 정책 결정은 ITC의 결정이나 분석에 대한 동의나 비판은 아니다. 또 특허 보유권자가 구제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법원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허 침해 판정과 수입금지 결정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
하지만 이번 ITC 결정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오바마 행정부의 결정에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다. 표준특허의 취지 중 미국 기업에 이익이 되는 부분은 취하고, 그 반대되는 부분은 철저하게 외면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바마 행정부는 누구라도 정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해당 특허를 사용할 수 있다는 표준특허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이해하고 있지만, '자국이익 먼저' 원칙 하에 보호무역주의를 펼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ITC "애플, 협상에 불성실해… 정녕 특허료를 지급할 용의가 있는 건지 의아하다"
ITC는 왜 표준특허로 제품 수입금지라는 강력한 처분을 내린 걸까. 이를 파악하려면 삼성전자가 애플을 제소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제기한 4건의 특허침해 주장 가운데 ITC가 애플의 침해를 인정한 것은 '무선통신에서 데이터 전송 오류를 제거하는 기술'이다. 원래 이 기술은 삼성전자가 표준특허 원칙에 따라 통신칩셋 제조사 인피니언에게 제공하던 특허였다. 인피니언은 특허료를 제대로 지급했다.
문제는 인텔이 인피니언을 인수하면서 발생했다. 삼성전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수 이후 인텔로부터 특허료 지급이 중단됐다. 그리고 인텔이 인피니언의 칩셋을 애플에게 판매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업계 관례에 따르면 칩셋 제조사가 특허료를 지불하지 않았을 경우 해당 칩셋을 최종 사용한 판매자가 특허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를 근거로 삼성전자는 애플이 특허료를 지급하지 않았다며 ITC에 제품 수입금지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원래 ITC는 지난해 9월 "애플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한 것 같지는 않다"고 예비 판정을 내렸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지난 6월 4일 ITC는 6인의 위원이 모인 최종 판정에서 "애플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아이폰4, 아이패드1 등 애플 제품의 수입금지를 결정했다.
ITC가 수입금지를 내린 근거는 애플의 불성실한 협상태도다. 표준특허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ITC 최종결정문서를 인용해 "삼성전자와 애플은 지난 3월까지 특허료를 놓고 물밑협상을 벌였고, ITC는 이를 근거로 삼성전자가 협상에 불성실하게 임했다는 애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타사와 비슷한 수준의 일반적인 특허료를 요구했지만, 애플이 이를 거부하고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에 공급받길 원했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다.
하지만 수입금지가 무산됨에 따라 삼성전자는 애플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길고 지루한 법정소송뿐이다.
미 IT업계-입법부, 한 목소리로 애플 제품 수입금지 반대… "이유 있네"
ITC의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진 후 인텔, MS, 버라이즌, AT&T 등 미 IT 기업들은 한 목소리로 애플 제품 수입금지 조치를 반대했다. 이들이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버라이즌, AT&T 등 미국 이동통신사의 경우 출시 된지 3년이 넘은 아이폰4를 아직 판매하고 있다. 단지 판매하는 것을 넘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력모델 중 하나다. 이는 애플의 독특한 판매방식 때문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기업의 경우 최신 모델을 출시하면 기존 모델을 단종시키지만, 애플의 경우 최신 모델을 발매해도 기존 모델을 단종시키지 않고 가격을 낮춰 보급형 제품으로 판매한다. 실제로 미국 전체 아이폰 판매량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아이폰4, 아이폰4S 등 구형 모델인 것이 현실이다.
인텔의 경우 아이폰4에 통신칩셋을 공급한 당사자이기에 수입금지 조치를 반대했다. MS의 경우가 흥미로운데, MS가 표준특허 시스템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ITC의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2주전 미국 상원의원 4명은 "수입금지는 공익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지면 미국 시장에 끼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는 뜻이다.
고개 드는 보호무역… 피해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기업에게
이번 오바마 행정부의 거부 결정으로 중국, 유럽연합(EU)에 이어 미국마저 보호무역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는 예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대놓고 자국 기업을 감싸고 도는 중국, 공정 경쟁이라는 명목으로 외국 기업을 규제하지만 자국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엔 침묵하는 EU에 이어 미국도 제 식구 감싸기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탄탄한 내수시장이 받쳐주는 해외 기업과 달리 국내 기업들은 내수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이번 결정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결정이 반드시 삼성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애플 제품 수입금지를 거부한 미국 행정부가 역으로 삼성전자 제품만 수입을 금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다. 삼성전자 제품만 불이익을 준다면 노골적으로 자국 업체를 보호하려 한다는 국제적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플이 "삼성전자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ITC에 제기한 소송에 대한 결정은 원래 8월 1일 나올 예정이었으나, 오는 9일로 연기됐다. ITC가 오바마 행정부의 최종 결정을 반영하기 위해 미룬 것으로 풀이된다.
좋든 싫든 오는 9일 ITC의 결정으로 또 한차례 후폭풍이 몰아칠 전망이다. ITC가 삼성전자 제품 수입금지를 결정한다면 중국처럼 대놓고 자국기업을 감싼다고 비판 받을 것이고, 설사 수입금지 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오바마 행정부의 결정 때문에 중국, EU의 외국 기업 차별을 비판할 명분을 잃게 됐다.
길게 썼지만, 사실 결론은 간단하다. 이번 결정은 오바마 행정부가 애플에게 '면죄부'를 발행해준 것과 같다. 미국 기업은 타국 기업의 특허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내용의 면죄부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