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키드'의 추억, 현실은 인터넷 '최고가'

김영우 pengo@itdonga.com

본 기자는 '용산키드' 였다. 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 초반, 주말마다 '슈퍼컴보이'용 게임팩을 들고 용산전자상가에 있던 게임매장을 방문, 일정한 추가금을 내고 새로운 게임팩으로 교환해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신품 게임팩은 호되게 비싼 터라 구매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나마 몇 달 동안 용돈을 모아 겨우 산 중고 게임팩 1개를 교환해가며 즐겨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대학생이 된 1990년대 중반, 부모님이 큰 맘 먹고 '펜티엄' PC를 사주셨다. 이 역시 용산에서 산 조립품이었다. 그 PC에는 불법 복제된 '윈도95'가 설치되어있었으며 28kbps 속도의 전화 모뎀도 달려있었다. 이를 이용해 PC통신 '하이텔'에 접속, 당시 유명했던 '개오동', 'OSC' 등의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고수'들이 풀어놓는 게임정보, PC정보를 습득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PC업그레이드도 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메모리, 하드디스크 등을 사러 역시 용산을 방문하곤 했다.

이렇게 제법 오랫동안 용산을 드나들었지만 어떤 매장이던지 방문해 흥정을 할 때마다 점원은 "손님,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라고 오히려 되묻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원하는 가격에 주겠다는 의미 같기도 하지만 실은 높은 가격을 말하면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것인데, 이를 알면서도 이른바 '용팔이'라고 불리는 상인들의 '말빨'에 휘말려 종종 바가지를 쓰곤 했다. 그래도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이 더 컸으며 다음 주말에도 어김없이 용산행 국철(1호선) 열차를 타곤 했다.

이는 비단 본 기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2012년 현재, 30살을 넘긴, 그 중에서도 IT에 관심이 있는 남성이라면 특히 그러하다. 물론 누구는 슈퍼컴보이가 아닌 '슈퍼알라딘보이'를 즐겼을 것이며, 또 누구는 하이텔이 아닌 '천리안'이나 '나우누리'를 이용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용산전자상가에 관한 애증 섞인 추억 몇 가지를 공유한다는 점만큼은 같다. 이들이 바로 이른바 '용산키드'다.

손님,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용산전자상가는 전자랜드, 선인상가, 터미널상가, 나진상가, 원효상가, 그리고 넓게는 아이파크몰을 포함한 대단위 전자제품 판매점 밀집지역을 가리킨다. 1980년대 말부터 청계천 인근지역의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그곳에 위치하던 세운상가 및 대림상가에 있던 상인들을 단체로 이주시킨 것이 바로 용산전자상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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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자상가는 1987년에 정식으로 개장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최대의 전자상가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컴퓨터, 생활가전, 조명, AV, 게임기 등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한국 전자기기 유통의 메카로 불리게 된다. 한때 용산전자상가에 있는 물건들을 다 모으면 항공모함이나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로 대표되는 일부 상인들의 불친절과 바가지는 용산전자상가의 규모만큼이나 유명했으며, 중고품이나 전시품을 신품으로 속이거나 불법복제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PC를 파는 등의 부적절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T매니아들에게 있어 용산은 성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원하는 물건이 대부분 있으며,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하면 전반적인 시세가 싼 편이라는 점은 큰 매력이었다.

추억 안고 돌아온 용산키드, 현실은 '인터넷 최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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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키드의 추억, 현실은 인터넷 '최고가' (2)

그렇다면 2012년 현재, 용산전자상가의 분위기는 어떨까? 14일 낮, 용산전자상가를 방문해 본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날씨가 좀 궂긴 했지만 주말을 앞두고 손님이 많을 법 하건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점원이 손님보다 많을 정도로 썰렁했으며 여기 저기 셔터를 내린 매장도 눈에 띄었다. 특히 전자랜드 일부층과 나진상가 17동, 원효상가 등은 문을 연 매장보다 닫은 매장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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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키드의 추억, 현실은 인터넷 '최고가' (4)

매장 바깥 분위기도 영 아니다. 예전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대형 광고판이 줄줄이 붙어있던 상가건물 외벽에는 텅 빈 광고판의 흔적만 다수 남아있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광고판은 설치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이미 단종된 제품을 광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전자랜드 뒤쪽의 광고판은 그야말로 '전멸'을 했으며, 나진상가 전면에는 3년 전에 출시된 라데온 HD5000 시리즈 그래픽카드의 광고판이 아직도 붙어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전자제품 매장이 있어야 할 법한 자리에 수입차 판매점이 들어서는 등, 상가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구성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제는 전자상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복합쇼핑몰 같은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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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키드의 추억, 현실은 인터넷 '최고가' (6)

그렇다면 과연 물건은 살만 할까? 본 기자가 마침 필요했던 DSLR 렌즈용 필터를 사고자 한 매장에 문의해봤다. 참고로 인터넷가격비교사이트에서 사전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해당 제품의 시세는 최저 6,600원, 최고 1만 4,000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매장의 점원은 무려 1만 7천원을 요구했다. 이는 인터넷 최저가는커녕 '최고가'보다 비싼 가격이다.

가격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 익숙한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 가격을 이야기하자 “그건 손님이 다른 모델로 착각했거나 정품이 아닐 것”이라고 단언하며 “우리들이 총판에서 가져오는 가격이 이미 1만 5,000원에 달해 이거 하나 팔아도 겨우 2,000원을 남긴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차마 더 이상 흥정을 할 자신이 나지 않아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그 매장을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점원의 인사말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양복 입고 용산을 가지 마라

이 매장의 점원이 말하는 것이 물론 사실일 수도 있다. 혹은 본 기자가 인터넷에서 확인한 제품이 그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과 모델명만 같을 뿐이지 실은 다른 물건이었을 가능성도 0%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여부와 관계 없이 이런 상태로 장사를 계속한다면 그 매장의 경쟁력이 가히 높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매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의 다른 매장을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점원의 태도나 제품의 가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본 기자가 그날 마침 양복을 입고 간 것도 영향이 없진 않을 것 같다. 여성, 혹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용산전자상가를 가면 100% 바가지를 쓴다는 괴담(?)도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본 기자가 용산전자상가를 찾은 것도 거의 몇 달만이었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딱히 이 곳에 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제품의 시세는 인터넷에 이미 공개되어 있으며 제품의 종류도 인터넷이 더 많다. 더욱이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서핑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태라면 발품을 팔고 흥정을 하는 행위 자체가 시간낭비일 뿐이다. 예전에는 정겹게 들리던 용산 특유의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도 이제는 단순히 피곤만을 유발하는 대사라는 의미다. 그 동안 세상은 바뀌었는데 용산은 추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름 용산에 애증을 가진 '용산키드'인 본 기자가 이런 느낌을 받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눈에 띄게 설렁해진 상가 전체의 분위기가 이를 반증한다.

'신세대 용산키드'의 탄생은 불가능할까

물론 용산전자상가의 상인들도 변명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에서 매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임대료나 인테리어비, 직원의 급료 등, 온라인보다 많은 유지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용산전자상가의 임대료는 싼 편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불친절과 일부 부적절한 판매 행태를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용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일부 매장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판매를 병행하며 꾸준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가격표시제 역시 일부 업체이긴 하지만 조금씩 도입되고 있다. 최근의 세태가 용산전자상가에 결코 호의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자체적인 노력이 더해진다면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추억은 언제나 미화되는 법이다. 하지만 추억은 과거 속에만 존재해야 아름답다. 과거의 모습이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이는 더 이상 매력이 없다. 현실에 걸 맞는 매력을 더하기 위한 용산의 변화노력, 이것만이 '신세대 용산키드'를 양산시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일 것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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