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시마과장'이 길거리에 나앉은 사연… "일본 기업의 위기"

강일용 zero@itdonga.com

천하의 '시마과장'이 길거리에 나앉은 사연… '일본 기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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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시마과장'이 길거리에 나앉은 사연… '일본 기업의 위기' (1)

"2012년도 6,800억 엔(약 8조 9,000억 원)의 적자, 모두 사장인 제 책임입니다. 여기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사장을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시마 고사쿠(課長島耕作, 64세), 우리에게 만화 '시마과장'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가 사장직에서 내려온다. 사장에 오른 지 4년 만이고 시마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연재를 시작한지 29년 만이다. 2012년 12월 최신 연재분에서 밝혀진 내용은 이처럼 충격적이다. 왜 그는 사의를 전해야만 했을까?

'시마 시리즈'는 히로카네 겐시(弘兼憲史, 64세)가 연재하는 일본의 인기 기업만화다. 직장인의 애환, 인간 관계, 사내 정치 등을 나름 사실적으로 그려내 큰 인기를 끌었다. 시마과장(1983~1992), 시마부장(1992~2002), 시마이사(2002~2005), 시마상무(2005~2006), 시마전무(2006~2008), 시마사장(2008~현재)순으로 연재 중이다.

일본에서 시마 시리즈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지난 2008년 4월 1일, 아사히신문 등 일본 주요 신문은 주인공 시마 고사쿠가 '하쓰시바전산'과 '고요전기'의 합병을 주도한 공로로 사장으로 승진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시마사장의 고향이자 히로카네 겐시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 현 이와쿠니(巖國) 시에는 시마사장 취임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총 69권의 단행본이 출판됐으며, 4,000만 권 가까이 판매됐다.

시마 시리즈는 팩션(Faction,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덧붙인 장르)이다. 작가는 '파나소닉(구 마쓰시타전기)'을 만화 속에 그대로 옮겨, 무대가 되는 가상의 기업 '테코트(구 하쓰시바전산)'를 창조해냈다. 고요전기(산요), 솔라전기(소니), 히시바(히타치), 도리츠(도시바) 등 현존하는 다른 일본기업도 작품 내에 등장한다. 심지어 삼성전자와 LG전자마저 섬상과 PG로 이름만 살짝 바꿔 함께 언급된다.

왜 하필 파나소닉일까? 시마 고사쿠라는 주인공이 바로 작가 히로카네 겐시의 분신(Avatar)이기 때문이다. 히로카네 겐시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마쓰시타전기 마케팅부에 입사해 근무했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동일한 프로필을 갖춘 가상 인물 시마 고사쿠를 창조한 것이다.

극중 시마 고사쿠는 신화적인 비즈니스맨이다. 일개 사원으로 입사해 임원을 거쳐 사장이 된다는 모든 직장인의 꿈을 몸소 실현했다. 혹자는 시마 고사쿠를 단지 운이 좋은 '여성편력가'라고 폄훼했지만, 작품 내 그 누구도 그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마 고사쿠에게도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문제는 만화 속 테코트가 아니라 현실의 파나소닉에게 발생했다. 파나소닉은 올해 7650억 엔(약 10조 원)이라는 큰 적자를 기록했다. 창립이래 최대의 손실이다. 게다가 지난 2010년 잠깐 흑자로 돌아선 것을 제외하면 2008년부터 줄곧 적자행진이다.

파나소닉의 위기는 주력인 TV, 가전 부문이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찾아왔다. LCD TV는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밀려 철수했고, 그나마 주력으로 밀던 PDP TV는 팔리지 않았다. 프로젝션 TV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얼마 전 사업부를 완전 정리했다. 작품 내의 시마 고사쿠는 상무시절부터 섬상, PG 등 한국 기업이 하쓰시바전산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외쳤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위기가 찾아오자 파나소닉은 돌파구를 모색했다. 차세대전지기술(태양전지/리튬이온전지)과 웰빙가전을 골랐다. 이를 반영한 듯 시마 고사쿠도 차세대전지기술에 하쓰시바전산의 미래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실의 파나소닉이 산요를 인수합병 했듯이, 시마 고사쿠의 하쓰시바전산도 고요전기를 인수합병하고 상호를 테코트로 변경했다(마쓰시타전기도 이때 상호를 파나소닉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파나소닉과 산요의 합병은 완전히 실패했다.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 여겼던 전지분야는 경쟁이 심해지면서 파나소닉에게 손실만 안겨줬다. 엔고 현상이 심화되면서 적자는 한층 가중됐다. 웰빙가전에서 나오는 이익은 이러한 적자를 메우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파나소닉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섰다. 약 8,000명 이상을 감원하기로 결정한 것. 시마 시리즈에서 그리도 부르짖었던 종신 고용의 허상이 깨진 셈이다.

이러한 자구책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평가는 냉정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파나소닉의 신용 등급을 '정크(투자 부적격)'로 강등하고, 향후 전망도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현금이 다급해진 파나소닉은 도쿄지사 건물도 매각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실은 만화 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마 시리즈가 팩션을 표방하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시마 고사쿠는 테코트의 적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실의 파나소닉 사장 쓰가 가스히로(津賀一宏)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시마 시리즈의 전개는 불분명하다. 히로카네 겐시는 얼마 전 인터뷰를 통해 시마 고사쿠가 은퇴하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고견을 밝힌바 있다.

"출판사가 연재 중단을 결정하면 (시마 고사쿠가) 하루아침에 암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고…(웃음) 아마 시마사장은 조만간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회장에 앉게 될 겁니다. 시마사장은 일본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어쩌면 전단협(일본의 전경련)의 회장이 될지도 모르지요"

슬프게도 이러한 바람은 이뤄지지 못할 꿈이 됐다. 일본의 네티즌들은 "이제 '백수시마(원문은 NEET시마)'를 연재하면 되겠군"이라고 냉소했다.

한편, 파나소닉뿐만 아니라 샤프와 소니도 이러한 위기를 함께 겪고 있다. 샤프는 2012년 4,500억 엔(약 5조 9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홍하이 그룹(폭스콘)의 투자를 유치했지만 무산됐다. 현재는 퀄컴, 인텔에게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공급하고, 지분을 내주는 조건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소니도 파나소닉처럼 신용등급이 '정크'로 강등됐다. 일본 내 평가도 암담하다. TV와 IT 사업은 이미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금융(소니보험)과 엔터테인먼트(플레이스테이션 등) 사업이 없었다면 그룹이 언제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2012년 200억 엔(2,600억 원) 흑자 전망이 무색하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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