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구의 인터'스페이스'] 종묘 앞 '세운4구역'... 서울이 선택할 도시 미래
[IT동아]
세운상가 실험이 남긴 과제
세운상가는 1960년대 서울이 근대적 도시 구조를 처음 모색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김현옥 서울시장(1966년~1970년 재임)의 도시개조 정책과 건축가 김수근의 실험적 구상이 결합해 주거·상업·제조 기능을 수직으로 집약한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물이 탄생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도시 원리를 실험한 대담한 시도였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 산업 구조와 도심 환경은 크게 달라졌고, 세운상가는 물리적 노후화와 기능 쇠퇴 속에서 과거의 역할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제 필요한 논의는 '세운상가를 보존할 것인가'가 아니라, 서울이 이 실험적 도시 모델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다.

종묘의 수평성, 도시 경관의 기준점
종묘는 조선 왕실의 제례 공간이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안정적인 수평 경관을 지켜온 공간이다. 월대의 길이, 낮은 처마, 숲의 깊이가 만들어내는 공간 구조는 도시 속에서 시간을 천천히 경험하게 하는 고유한 공간 언어다.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 역시 종묘가 단일 건축물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수평적 리듬과 여백의 구성 자체가 보존 가치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적 질서는 서울 도심에서 역사적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20년 지연이 남긴 현실
'세운4구역'은 약 20년 가까이 사업이 지연되며 구조적 부담이 누적된 지역이다. 주민 측 자료에 따르면, 2006년 개발 추진 이후 착공이 이뤄지지 못하며 누적 채무는 약 7,250억 원, 연간 금융비용만 약 200억 원에 이른다. 도심에 장기간 방치된 구역이 남긴 비용과 불확실성은 결코 작지 않다.
서울시는 최근 종로변 허용 높이를 약 100m, 청계천변은 약 140m 안팎(최고 약 145m)까지 조정하며, 사업 정상화와 도심 기능 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재개발의 쟁점은 단순한 높이나 거리 문제가 아니라 도시 경관과 기능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있다.

방식에 관한 논의
세운4구역을 둘러싼 논의는 개발의 찬반이 아니라 개발의 '방식'에 대한 문제다. 문화유산·경관·도시계획 분야에서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은 몇 가지 공통된 이야기를 전한다.
종묘의 수평 시야축이 끊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종묘가 아니다. 월대·숲·처마가 만드는 시각적 연속성은 종묘 경관 가치의 본질이다.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는 방식의 문제다.
종묘 앞 공간은 단순한 비어있음이 아니라, 도시를 조율하는 완충 지대다. 보행과 녹지가 만드는 동선은 도심의 밀도와 속도를 조절한다. 개발이 들어서더라도 이 공간의 역할은 지켜져야 한다.
세계유산 옆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배치다. 어디에, 어떤 형태로, 어떻게 보이도록 설계되는가가 핵심이다. 정교한 시야축 검토와 조형적 건축 설계가 금지보다 효과적인 해법이 된다.
도쿄 황궁과 김포 장릉이 남긴 교훈
역사적 공간과 현대적 개발이 충돌하거나 공존한 사례는 세운4구역 논의에 중요한 비교 기준을 제공한다. 그중 도쿄 황궁과 김포 장릉은 상반된 결과지만, 역사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전면을 비우고 후면을 채우는 설계
도쿄 황궁 일대는 일본에서도 가장 높은 개발 압력을 받는 곳이지만, 황궁 앞 공간은 숲·해자·광장을 중심으로 넓게 비워져 있다. 반면 150~200m급 고층 빌딩은 뒤편 마루노우치와 오테마치로 집중 배치된다.
이는 단순한 보존 조치가 아니라 역사 공간의 경관을 확보하면서도 도심 밀도와 경제력을 유지하는 구조적 해법이다. 일본은 이 구역 개발에 VIA(시각 영향 평가)를 엄격히 적용해 높이가 아닌 '보이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관리한다.

절차 부족이 초래한 결과
김포 장릉은 세계유산 주변 개발이 실패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문제는 고층 건물이 아니라, 시야축 분석·문화재 협의·설계 조정 절차가 충분히 수행되지 않은 점이었다. 결국 유네스코가 경관 훼손 우려를 공식적으로 제기했고, 추가 보완 조치와 행정적 부담이 뒤따랐다.
이 사례는 세계유산 인접지 개발에서 사전 절차와 투명한 조정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두 사례는 역사 공간 보존의 핵심이 금지가 아니라 정확한 조정·배치·절차에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서울은 이 원칙을 기반으로 종묘의 경관을 보호하면서도 도심 기능을 수용하는 설계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서울형 공존 모델의 조건
세운4구역 재개발의 해법은 외부에서 찾기보다, 서울이 이미 경험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청계천 복원은 도심 축을 비우는 방식으로 회복을 이끌었고, 서울숲은 공원이 도시 구조를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두 사례는 도시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비움'과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세운4구역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종묘의 수평성과 새로운 개발의 수직성이 공존하려면 무엇이 먼저 확보돼야 하는가.
필자는 두 가지 선택지를 본다. 하나는 충분한 공공 공간의 확보다. 도쿄 황궁이 숲으로 도시를 조율했듯, 종묘 앞은 보행과 녹지 축으로 도시를 조율해야 한다. 이는 양보가 아니라 도시 경쟁력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박스형 건축을 벗어난 조형적 설계다. 도심은 이미 유사한 형태로 가득하다. 종묘 앞만이라도 재료, 입면, 형태에서 서울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이어야 한다. 그것이 도시가 품격을 지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결국 세운4구역 재개발은 한 구역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이 앞으로 어떤 도시가 되고 싶은가를 보여주는 선택이 될 것이다. 종묘의 수평성과 세운의 수직성이 충돌이 아닌 조화로 만날 때, 그것이 바로 서울형 공존 모델의 시작이다.
정훈구 담장너머 대표 (plus82jh9@gmail.com)
담장너머의 공동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즈'와 '굿디자인 어워즈'에 선정된 바 있으며, 다양한 공간기획 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인 공간과 경험을 제안, 구축하고 있다.
정리 / IT동아 이문규 기자 (munch@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