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광복 80주년과 한국의 얼굴 - '케데헌'이 만든 관광지도
[IT동아]
소니가 만든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이하 케데헌), 광복 80주년의 해에 떠오르다.
광복 80주년인 올해에 우리는 뜻밖의 방식으로 '기억'을 마주했다. 대형 스튜디오가 만든 애니메이션 한 편이 전 세계 관객의 관심을 끌며, 서울의 풍경과 박물관의 전시, 기념의 방식까지 미세하게 흔들어 놓았다.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선보인 '케데헌'은 K-팝의 에너지와 한국적 모티프를 결합한 작품으로,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문화상품이 도시 공간에 미치는 영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글은 그 흐름을 좇아, 애니메이션 하나가 어떻게 관광객의 발자국을 바꾸고 박물관의 역할을 재정의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통과 미래를 공존시킬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애니메이션이 가져온 파급력: 문화상품과 도시의 접점
화면 속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선택하고, 그 도시의 일부를 강조한다.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낯선 도시의 한 장면을 처음 접하고 곧바로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케데헌은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겨냥했다. K-팝의 음악적 리듬과 캐릭터 서사, 그리고 전통적 모티프들이 어우러지며 젊은층을 중심으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팬덤은 자발적 홍보자가 되어 애니메이션 속 장소를 찾아 나섰다. 결과적으로 문화상품 하나가 도시 이미지의 일부를 재구성하고, 실제 방문객의 동선을 바꾸는 단초가 된 것이다.
남산타워의 부상, 랜드마크의 희비
남산의 N서울타워가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자 일순간 남산 열풍이 불었다. SNS에는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쏟아졌고, 외국인 관광객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늘었다.
반면 롯데월드타워는 작품 속에서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면은 서울을 연상시키는 높은 건물 실루엣을 보여주지만, 특정 브랜드나 건물을 명시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창작자는 도시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되 상업적 표기에는 선을 그은 셈이다.
그 선택의 현실적 파급은 예리했다. 많은 관광객은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인 이미지를 쫒아 남산으로 발길을 옮겼고, 자연스럽게 일부 기존 관광 흐름이 재편되었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특정 장소에 '주목'을 집중시키면, 그 장소는 곧 증폭된 주목을 기반으로 새로운 관광 루트를 얻게 된다.
반대로 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건물이나 지역은 상대적 소외를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도시 브랜딩에서 '보여주기'와 '숨기기'의 미묘한 선택이 실제 공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도시 비교: 서울, 도쿄, 뉴욕의 방법론
세계 주요 도시들이 대중문화와 랜드마크를 결합해온 방식과 비교해볼 때 더 선명해진다. 도쿄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문화가 도시 마케팅의 핵심 자원으로 오랫동안 활용돼 왔다. 애니메이션은 이미 도시의 특정 구역(아키하바라 등)과 결합해 관광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뉴욕은 브로드웨이와 다양한 공연 예술, 영화 촬영지로서의 위상을 통해 랜드마크를 미디어와 결부시키는 전통이 강하다. 두 도시 모두 대중문화가 도시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서울은 아직 그 전형을 완전히 확립하지 않았다. K-팝과 디지털 콘텐츠의 글로벌 파급력은 막강하지만, 랜드마크의 연결 방식은 더 세밀한 기획을 필요로 한다. 어떤 건물을 화면에 내보낼지, 어떤 상징을 강조할지의 선택은 단지 미학적 결정이 아니라 관광 흐름, 지역 경제, 도시 브랜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서울은 지금 그 교차점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국중박'의 이동 굿즈, 전시, 그리고 관람객의 결합
애니메이션의 영향은 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극에 등장한 호랑이, 까치 등의 전통적 모티프는 굿즈로 재탄생했고, 국중박(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상품관에서는 관련 상품들이 빠르게 품절되는 일이 발생했다.
관람객들은 단순히 '유물 보기'에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이 불러낸 상징을 실제로 확인하고 소유하려는 행동으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은 전시와 상업, 교육과 오락이 뒤섞이는 복합적 소셜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의 층위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관객들은 굿즈와 체험형 콘텐츠를 동기로, 중장년층은 기념 전시의 역사적 서사를 확인하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다. 아이들은 호랑이 배지를 목에 걸고, 성인은 미륵반가사유상을 조용히 마주하는 풍경이 공존한다.
이 융합적 현상은 '기념'의 생산 방식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념은 이제 소비(굿즈)와 성찰(전시)을 동시에 포함하는 경험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과 '느리게 보기'의 회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이 가진 고유한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고요한 유물은 관람 속도의 역행을 요구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굿즈를 구매하는 즉흥적 행위들 사이에서, 반가사유상 앞의 침잠은 다른 리듬을 선사한다. 이 '리게 보기' 경험은 관람을 단순 소비의 시간에서 성찰의 시간으로 전환시키며, 방문자에게 더 깊은 의미를 남긴다.
결국 애니메이션이 제공한 ‘입구’ 호기심, 흥분, 소비 욕구는 관람객을 박물관으로 이끌고, 박물관은 그들을 느리게 보는 방식으로 안내한다. 이처럼 대중문화와 전통 유산이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할 때, 기념은 더 넓은 대중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를 향해
광복 80주년의 해에 우리는 기억을 새기는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불러온 변화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시와 문화가 상호작용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중요한 것은 이 기회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대중문화의 속도와 박물관의 '느림'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보완할 때, 기념은 더 많은 이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그때 도시의 얼굴은 더욱 입체적이고, 전통은 미래와 손잡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화면 속 장면을 따라 남산으로 달려가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그 유입을 교육적 성찰로 이어지게 할 것인가. 답은 단순하지 않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도시의 낮과 밤, 상업과 기억, 소비와 성찰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설계만이 지속 가능한 문화경관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설계는 결국 시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글 / 정훈구 담장너머 대표 (wjdgnsrn95@naver.com)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공간기획사인 담장너머의 공동대표. 연세대학교 대학혁신지원사업 전문가이며, 마포문화재단 전시 코디네이터, 하나금융 소셜벤처 창업 퍼실리테이터로도 활동했다.
정리 / IT동아 이문규 기자 (munc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