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한국 반도체 스타트업, '서울대 SIPC'의 숨은 노력 있었다
[IT동아 남시현 기자]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무게 중심은 메모리 반도체로 쏠려있다. 비메모리 부문인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는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게 중론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공급과 수요에 따라 가격 변동성이 크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는 1990년대부터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와 기술개발을 진행해 왔으며, 그덕에 지금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종주국 지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호황기에는 수익률이 높지만 불황에는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며, 이 특성이 우리 경제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왔다. 반도체 산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시장 변동성이 작고, 생태계 및 영향력 부문에서의 영향력은 큰 시스템반도체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133조 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을 갖추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고, 우리 정부 역시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 점유율 20%와 혁신기업 20곳을 만드는 ‘인공지능 반도체 산업 발전전략’을 수립하는 등 시스템반도체 시장 성장을 위해 꾸준히 노력 중이다.
성과는 몇 년 전부터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딥엑스 등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에서 주목하는 유니콘 기업들이 등장했고, 세미파이브, 가온칩스 같은 유수의 반도체 설계 플랫폼 기업도 나왔다. 보스반도체, 텔레칩스 등 차량용 반도체 기업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이 기업들이 성장세를 뒷받침해 온 기관 중에 이혁재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가 센터장으로 있는 서울대학교 시스템반도체 산업진흥센터(이하 서울대 SIPC)가 있다. 권호엽 서울대학교 교수를 만나 우리나라 시스템반도체 산업에 대한 기여부터 지원 방안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를 들어봤다.
“시장 중심은 시스템 반도체··· 고부가가치에 도전해야”
권호엽 서울대학교 교수는 SK하이닉스에서 D램 등 메모리 소자 설계에 20년, 시스템 반도체 설계를 10년 간 진행한 반도체 업계 전문가로, 현재는 SIPC 사업단에서 산학협력중점교수를 맡고 있다. SIPC 사업단에 대한 설명부터 부탁했다. 권호엽 교수는 “서울대 SIPC는 2021년 서울대학교 내 산재한 시스템반도체 관련 유관 조직과 학술연구 조직 등의 허브 역할을 목표로 설립됐다. 현재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총괄하는 시스템반도체 분야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현재 우리 센터가 주력하고 있는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는 글로벌 핵심기술을 보유한 창업기업을 발굴해 3년 간 사업비 뿐만 아니라, 전문가 컨설팅, 기술 교육 등 기술개발 및 고도화, 수요 연계, 투자 유치 등을 지원해 유니콘 급 기업으로 육성하는 프로젝트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딥엑스, 모빌린트 등 최근 주목받는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은 해당 프로그램의 지원 받았고 일부 기업의 경우 상위 10% 이내 기업을 후속 지원하는 비욘드 DIPS까지 거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권호엽 교수는 시스템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우리나라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상향 평준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권호엽 교수는 “시스템반도체 주요기업들은 90년 말 벤처 시기에 창업한 기업들로 디스플레이 드라이버(DDI) 칩이나 CMOS 이미지 센서(CIS) 같은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제품들이 주력제품이다. 최근 들어 AI 반도체, 차량용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많이 창업·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대량 양산을 통해 극적인 수익성을 기록하는 기업이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SIPC는 국내 시스템반도체산업 생태계의 체질 개선을 위해 관련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및 기업들을 직접 발굴하고 지원한다. 권호엽 교수는 “시스템반도체산업 생태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력, 자금, 수요가 해결돼야 한다. 서울대 SIPC는 지원 기업을 개발, 성장, 스케일업 세 단계로 나눠서 지원한다. 개발 단계는 자체 기술을 갖고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들, 성장 단계는 제품을 갖고 고객들을 찾아가는 시기다. 스케일업은 수요 확대를 통해 기업 체급을 키우는 단계에 대한 지원이다”라면서, “올해만 96개 기업을 지원하며, 기업을 직접 찾아 기업의 장단점을 듣고 맞춤형으로 지원한다”라고 설명했다.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책도 있다. 권호엽 교수는 “Arm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Arm IP 라이선스를 낮은 단가로 구입하여 선정기업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라고 설명했다. Arm은 반도체 자산 전문 기업으로 저전력반도체 제조의 기반이 되는 연산회로의 설계도를 제공한다. 서울대 SIPC는 Arm와의 협력을 통해 초기 반도체 스타트업에게 큰 부담인 Arm 설계 자산을 무료로 제공한다.
또한 서울대 SIPC의 지원을 통해 만든 설계 제품을 삼성전자, DB하이텍, SK키파운드리 등 국내 파운드리 기업에서 MPW로 시범제작하는 과정도 지원한다. 또한 국내 반도체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즈, 시높시스의 반도체 설계 도구인 EDA툴을 지원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서울대 SIPC는 시스템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주요 현황에 대응하고, 주요 반도체 제품들에 대한 시장 및 기술 추세 분석과 함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자료도 제공한다. 수요 기업과의 연계 및 타 산업 분야 기업과의 협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오는 8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되는 ‘2025년 제2회 상생포럼’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기술교류회는 시스템반도체, 로봇, 바이오헬스, 인공지능, 양자, 사이버보안, 투자유치 등 7개 분야를 대표하는 주관기관들이 공동 주최하는 대규모 딥테크 네트워킹 행사다. 이번 기술교류회는 반도체 수요기업, 투자자, 전문가들이 참가해 최신 산업 동향 및 기술 관련 의견을 나누며, 6개 분야 47개 기업이 기술 세션을 진행하며, 30개 기업이 제품 및 서비스를 전시하는 등 실질적인 산업 협력의 장이 될 전망이다.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자금과 인력, 세세한 지원 나서야
서울대 SIPC가 다방면에서 초기 반도체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하지만, 권호엽 교수는 보다 정밀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호엽 교수는 “국내 반도체 설계 업계의 인력난은 심각하다. 2022년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방안을 통해 10년 간 반도체 분야 인력 수요를 단순히 12만 7000명으로 잡았는데, 현장 수요와 맞추려면 더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의 인력은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가 1000여 명 정도가 필요하고, 나머지 인력은 반도체 후공정(OSAT) 및 소부장 분야에 필요한 인력 수요”라고 설명했다.
또한 대기업 위주로 반도체 인력이 공급되는 상황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호엽 교수는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고급 인력들은 외국계 기업 등으로 빠져나가거나 메모리 반도체 관련 대기업을 우선 선호한다. 또한 스타트업에서 실력을 쌓은 반도체 설계자가 중견기업이나 큰 기업으로 이직하니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유능한 반도체 인력을 양성,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라면서, “스톡옵션과 함께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금융, 주택 지원 등이 필요하고 또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 우수한 인력 유입뿐만 아니라 투자 유치 등을 성공사례 발굴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SIPC는 반도체 시장의 인력 순환을 위한 채용 박람회 등도 진행한다. 권호엽 교수는 “기업 홍보 및 채용 박람회, 재직자 직무 교육 등도 수행 다. 또한 국내 수요처와의 연계 사업뿐만 아니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등과의 협력을 통해 해외 수요연계 및 해외 진출 지원사업도 진행중이다. 최근에는 인도 쪽에서 OSAT 투자가 많아서 관련 투자나 네트워킹 확보에 힘쓰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정부가 수요를 주도해야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권호엽 교수는 “90년대만 해도 벤처기업이 만든 반도체를 대기업이 사용하는 성공 공식이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어 실력도 좋고 장비도 좋은 의사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실전 경험이 없다면 누구도 1호로 수술대에 오르고 싶진 않을 거다. 기업 입장에서는 약간의 비용 절감을 위해 더 큰 부담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AI 반도체 등 국내 반도체를 적극 활용하고 홍보해야 국내외로 도입 사례가 생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5년 후가 주목되는 국내 반도체 스타트업들, 지원 아끼지 않을 것
권호엽 교수는 우리나라 시스템 반도체산업 생태계가 글로벌 시장 흐름과 발맞추기를 희망한다. “오픈엣지테크놀로지나 파두 같은 지원 기업들이 잘 해내고 있고, 퓨리오사AI나 리벨리온, 딥엑스, 모빌린트 모두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어떤 기업이든 괄목할만한 매출이 나왔으면 좋겠다. 5년 뒤에는 엑시나, 망고부스트, 하이퍼엑셀, 파네시아 등의 기업들도 큰 성과를 낼 것 같고, 차량 쪽에서는 넥스트칩, 디스플레이쪽으로는 사피엔반도체와 라온텍도 주목받을 것”라고 말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권호엽 교수는 “우리나라의 AI반도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 약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국내 시스템반도체의 활용사례를 만드는 것에 주력하고, 장기적으로 피지컬 AI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기업과 국가가 손을 잡고 시장을 지원해야 한다. 서울대 SIPC 역시 시장 전반이 성장할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하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IT동아 남시현 기자 (s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