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法] 과학의 한계를 메우는 법의 지혜
복잡한 첨단 기능을 결합한 자동차에 결함과 오작동이 발생하면,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급발진 사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동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고 유형도 천차만별입니다. 전기차 전환을 맞아 새로 도입되는 자동차 관련 법안도 다양합니다. 이에 IT동아는 법무법인 엘앤엘 정경일 대표변호사(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와 함께 자동차 관련 법과 판례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는 [자동차와 法] 기고를 연재합니다.
정보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며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CCTV와 블랙박스는 도로 위 진실을 비추고, 정보통신 기술은 미세한 증거로도 사건의 퍼즐을 맞춥니다. 하지만 첨단 기술로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없는 영역이 교통사고에서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고속도로에서 다중 추돌사고로 인해 피해를 본 경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수개월 후에 또 다른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가 그러합니다. 교통사고 후 의료사고나 산재사고가 경합된 경우와 같이 복수의 사고로 여러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오늘은 언뜻 보기에는 불합리해 보이지만 실은 깊은 고민이 담긴 법의 판단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형사 재판의 딜레마
한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야간 국도에서 보행자가 무단횡단을 하다 1차량에 충격당한 후 도로에 쓰러졌습니다. 1차량은 그대로 현장을 떠났습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쓰러진 보행자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2차량이 지나갔고, 10분 뒤 3차량마저 지나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보행자는 사망했습니다.
이 경우 1, 2, 3차량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 가해자가 하나의 결과에 원인을 제공했을 때 법에서는 이를 ‘공동불법행위’로 규정, 연대 책임을 묻습니다.
하지만 형사 재판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일반적인 생각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사 책임은 ‘개인의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인과관계’를 기반으로 처벌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보행자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가’입니다.
1차량은 최초 충격으로 사망 원인을 제공했기에 과실치사 책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2, 3차량 운전자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지나갈 당시 보행자가 살아있었다는 점이 명백히 증명되지 않는 한 형사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만약 1차량의 충격으로 보행자가 즉사했다면, 2차량과 3차량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사체를 역과한 셈이 됩니다. 우리 형법에서 과실로 사체를 훼손한 행위(과실사체손괴)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없습니다. 즉 2차량과 3차량 운전자는 보행자 사망에 대한 과실치사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최초 원인을 제공한 1차량이 뺑소니로 현장을 떠나 끝내 잡히지 않는 경우입니다. 결국 명백한 사망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그 누구도 사망에 대한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법적 공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민사 재판의 반전
그렇다면 이 억울한 죽음은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사건이 민사 재판으로 넘어가면 국면은 180도 달라집니다.
민법은 제 760조 "여러 사람의 행위 중 어느 자의 행위가 손해를 입힌 것인지 알 수 없는 때에도 연대하여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규정합니다.
민법에서는 형법과 달리 여러 사람의 과실이 경합해 손해가 발생했고 그 원인이 된 행위를 판명할 수 없는 경우 관련된 모두를 ‘공동불법행위자’로 규정합니다. 따라서 연대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부과합니다.
즉, 민사소송에서는 1, 2, 3차량 운전자 모두가 사망한 피해자 유족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됩니다. 과실 비율에 따라 내부적인 분담이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 측에서는 모든 가해 차량 운전자(또는 그 보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피해를 전부 회복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는 형사 재판이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민사 재판은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한계를 메우는 법의 지혜
모든 진실을 밝혀낼 수 없는 과학 기술의 한계 속에서 형사법은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명확한 증거 없이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동시에 민사법에서는 ‘발생한 손해는 어떻게든 구제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관점에서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동일한 사고를 두고 형사 책임은 엄격하게 따져 묻지 못하지만, 민사 책임은 폭넓게 인정하는 것. 이는 모순이 아니라, 법이 현실의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방식입니다.
법은 교통사고라는 비극 속에서도 이처럼 차가운 논리와 따뜻한 구제의 얼굴을 함께 가지며, 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미래에는 차량에 탑재된 센서와 생체 데이터 분석 기술 등이 발전해 충격 시점의 정확한 사망 시각을 판별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법리의 적용 또한 지금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영역에서 이처럼 각기 다른 원칙으로 균형을 맞추는 법의 지혜는 최첨단 기술이 따라올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정경일 변호사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제49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수료(제40기)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교통사고·손해배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IT동아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