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제로] 2. "필요한 사람한테 도움을 줘야지!"
[IT동아]
공공기관이나 단체에 불만이나 건의, 개선 사항 등을 제기하는 행위를 ‘민원’이라 합니다. 오늘도 전국에서 수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또 처리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분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타트업 창업, 운영, 지원 등의 관련 민원이 전국의 거의 모든 지원기관에 다양하게 접수되고 있는데요. 이런 민원은 창업자 또는 민원 제기자 또는 고객의 성향과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지 [민원제로] 기획연재를 통해 알아봅니다.
연재순서
- 집요한 불만 제기 : “제가 그 유명한 진상 민원인입니다만...”
- 무차별적 난동 :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지!”
- 충성 고객과 극성 민원인은 같다
- 민원인 유형과 대응 실제
- 불만에 대한 첫 응대가 중요하다
- 핵심성과지표를 분명히 하라
- 고객의 자발적 참여를 도모하라
- 나도 누군가에겐 민원인이다
필자가 제일 처음으로 ‘강력한’ 민원인을 만난 건, 스타트업 관련 컨퍼런스에서다.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의 전문위원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그날은 우리 건물의 컨퍼런스 홀에 200명 관객이 꽉 찼다. 이날 컨퍼런스에서는 서너 명 연사의 발표가 있었다. 그 시각 필자는 2층 사무실 내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긴급 SOS 전화가 왔다. “큰일났어요. 컨퍼런스 중에 어떤 분이 계속 소리 지르고 난리예요. 도와주세요!” 전화를 끊고 컨퍼런스 홀로 후다닥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니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컨퍼런스 홀 밖까지 들렸다. 컨퍼런스 홀에 들어서니 홀 중앙에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여기저기 삿대질을 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이런 짓들을 하며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지!’, ‘이 나쁜 놈들아!!’라며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모든 시선은 그 남자에게로 쏠렸다. 모두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상황에 그저 놀라서 멍하니 지켜 보고만 있었다.
필자는 그 사람에게 바로 다가갔다. 우선은 조심스럽게 그를 몸으로 밀어 컨퍼런스 홀 바깥으로 내몰았다. 홀 바깥에서 그를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이 허연 할아버지였다. 그는 화가 더 치밀었는지, 내 와이셔츠를 움켜쥐며 멱살까지 잡고, 필자를 깃발 흔들 듯 마구 흔들어 댔다. 원인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노인을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일단 멱살을 내준 상태로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그사이 다른 직원들이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뛰어갔다. 잠시 후 직원들과 경찰이 다가와 말하길, 공공기관의 행사를 고의로 방해한 상황이라, 필자가 동의하면 그를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고 재판에 넘길 수 있다고 했다.
필자는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이 사람이 이리 심하게 행동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내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이에 경찰은 그에게 단호하게 경고했고, 그는 의기양양한 모습과 달리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였다. 경찰은 돌아가자 그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대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필자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린 이유를 그에게 물었다. 이 현장에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일단 부딪혀 봤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훌륭한 사업 아이템을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다. 난리 친다고 정부가 돈을 준다면 모든 사람이 그럴 텐데 말이 되냐고 되물었지만, 그는 자신만 도와주지 않는 거 같아 억울하다고 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그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 무언지 물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고민하고 진행한 사업이 하나 있었는데 잘 풀리지 않았고, 이제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 자신을 좀 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대뜸 자신의 사무실로 같이 가주길 요청하길래, 아직은 흥분한 상태인 듯해서 일단 그의 사무실에 가보기로 했다. 심한 난동을 부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택시로 이동해 도착한 그의 사무실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철거촌을 방불케 하는 동네였고, 사무실이 있는 5층짜리 건물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그를 따라 건물 1층 중앙 쪽으로 이동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블록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형상은 음침하고 음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그는 이 건물 전체 화장실 청소와 건물 관리 일을 하며 월급 30만 원을 받고 있으며, 블록 장난감 사업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20~30 년은 족히 넘어 누렇고 쭈글쭈글해진 블록 조립 설명서와 박스가 보였다. 그에게 실제로 정부지원금이 전달된다 해도 사업이 잘될 순 없을 듯했다. 갑자기 허탈했다. 억울해하는 이를 도울 방법을 찾아보려 여기까지 왔건만, 현실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업 아이템 앞에 힘이 빠졌다. 공공 행사장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그 난동을 부리고 필자의 멱살까지 잡고, 사무실까지 가자고 해서 보여준 것이 고작 이 사업이라니… 그가 측은하게 보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로 사업을 추진하면 성공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게 비즈니스이건만, 얼핏 봐도 제대로 될 수 없어 보이는 그의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에게 멱살을 잡혔지만, 불과 몇 시간 전의 황당하고 불쾌했던 마음은 이내 사라졌다. 그와 헤어지고 그날 내내 오만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겪은 지 10여 년이 흘렀다. 그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컨퍼런스 참관자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하고,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멈춰있던 그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소동 이후 10년은 나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을 돕는 국내 기관들을 찾아봤다. 다른 나라는 어떤 지도 확인했다. 어느 기관이 실제로 어떤 도움을 주고 있고, 또 그 도움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필자가 속한 기관이 스타트업 지원 기관이기에, 스타트업을 돕는 방법론과 해외 사례도 최대한 많이 찾고 비교했다. 그러면서 하나씩 정답을 찾았다.
민원을 해결하려면 민원인의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물론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민원인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최근 보도되고 있는 이른바 고위공직자의 갑질도 예외다. 민원인의 관점과 처리자가 일을 대하는 자세와 의지에 대해 상기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공감하고 가치 있는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최고고 내가 모든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삶이 나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걸 꼭 기억해야 한다.
글 / 김영준 ( 3dbiz@naver.com )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혁신사업실 실장. 스타트업의 글로벌 스케일업, 대기업 연계 오픈이노베이션, R&D 지원 등 다양한 스타트업 지원 사업을 맡고 있다. 국내 주요 대학이나 대기업, 여러 기관 등 대상으로 기술 트렌드, 글로벌 진출, 기업가정신 등의 주제로 100회 이상의 강연을 진행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 등 수상. 주요 저서로, [3D프린팅 스타트업], [하드웨어 스타트업], [가상현실을 말하다], [민원제로] 등이 있다.
정리 / IT동아 이문규 (munc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