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 화제였던 AI 기기, 출시 후 혹평에 '과대포장' 논란도
[IT동아 권택경 기자] 올해 CES에서 공개되어 주목받았던 AI(인공지능) 기기 ‘래빗 R1’이 출시 후 논란에 휩싸였다. 기기 성능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혹평이 쏟아지는 와중에, 실상 단순 안드로이드 앱을 과대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다.
래빗 R1은 바이두 출신 중국인 사업가 뤼청이 설립한 스타트업 래빗의 첫 번째 AI 기기다. 스마트폰 절반 정도 크기에 화면, 카메라 등을 탑재했다. 스마트폰 없이도 간단한 음성 명령으로 음식 주문, 택시 호출, 메시지 보내기 등 복잡한 앱 조작이 필요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래빗 측은 사용자의 행동과 의도를 학습해 모방하는 거대행동모델(Large Action Model, LAM)을 통해 이를 구현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깜짝 공개된 래빗 R1은 CES 최대 화제 제품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주목받았다. 공개 후 열흘간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한 예약 판매에서도 5만 대가 판매됐다.
하지만 정작 4월 말부터 출하되기 시작한 실제 제품을 받아본 매체와 이용자들 반응은 악평 일색일 정도로 좋지 않다. 래빗 측의 시연과 달리 아직 구현되지 않은 기능이 많고, 작동하더라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미완성인 데다, 도움이 되지 않는 AI 기기(더버지)”, “거의 모든 일에 실패하는 199달러짜리 AI 장난감(엔가젯)”, “거창한 약속에 부응하지 못한 미완성 기기(기즈모도)” 등이 현지 매체들의 평가다.
래빗 R1이 스마트폰에 설치해 사용하는 앱이 아니라, 199달러(약 27만 원)짜리 별도 기기로 나와야 할 당위가 부족하다는 점도 주된 비판점이다. 래빗 R1은 기기에서 AI 연산을 처리하는 온디바이스 AI 기기가 아니라, 클라우드를 통해 AI 연산을 처리하는 단말기다. 이론적으로는 스마트폰에 설치하는 앱 형태로도 래빗 R1의 기능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래빗 R1이 안드로이드 앱에 지나지 않는다는 폭로도 나왔다. 안드로이드 전문 매체 ‘안드로이드 어쏘리티’는 래빗 R1의 앱 설치 파일(APK)을 입수해 구글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인 ‘픽셀 6a’에 설치하자 문제없이 실행됐다고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매체는 “래빗 R1은 내부적으로 안드로이드를 실행하는 것으로 보이며, 사용자가 상호 작용하는 전체 인터페이스는 단일 안드로이드 앱으로 구동된다”고 설명했다.
래빗 측은 이같은 주장에 반박하고 나섰다. 뤼청 래빗 CEO는 X(트위터)에 남긴 글에서 “래빗 OS와 LAM은 맞춤형 안드로이드 오픈소스 프로젝트(AOSP)와 로우 레벨 펌웨어 수정을 통해 클라우드에서 실행된다”면서 “적절한 OS 및 클라우드 단말기가 없는 불법 APK 설치로는 우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래빗 R1이 아무 스마트폰에서 실행 가능한 단순한 앱이 아니라 맞춤형 하드웨어가 필요한 앱이라는 것이다.
뤼청 CEO의 해명이 나온 후 이번에는 안드로이드 어쏘리티가 재반박에 나섰다. 매체는 여러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루팅 하지 않은 순정 ‘샤오미 13T 프로’ 스마트폰에서 래빗 R1을 실행하는 데 성공했고 대부분의 핵심 기능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4일 밝혔다. 작동 영상도 함께 공개했다. 펌웨어도 입수해 분석한 결과, 래빗 측 주장과 달리 칩세트 제조사인 미디어텍의 기본 펌웨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래빗 측이 AI 열풍에 편승해 단순 스마트폰 앱을 첨단 AI 기기처럼 과대포장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 지난달 출시된 비슷한 콘셉트의 웨어러블 AI 기기인 ‘휴메인 Ai 핀’ 또한 비슷하게 악평을 받은 상황이라 휴대용 AI 기기에 대한 의구심 자체가 커지고 있다. 현지 소셜미디어와 매체에서는 이러한 AI 기기들이 ‘주세로(Juicero)’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미국 매체 더버지도 이번 래빗 관련 논란을 전하며 “AI 주세로의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2013년 등장한 주세로는 캡슐 커피처럼 1인분씩 포장된 주스를 짜주는 주스착즙기다. 1억 2000만 달러(약 1631억 원) 규모 투자를 이끌어낼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손으로 파우치를 눌러 짜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게 드러나면서 지난 2017년 폐업했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