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착형 배터리 시대 다시 올까?…스마트폰 업계에 고민 안긴 'EU 배터리법'
[IT동아 권택경 기자] 최근 유럽 의회 문턱을 넘은 배터리 규제 법안이 스마트폰 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배터리 일체형 스마트폰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유럽 의회는 배터리 규제 법안이 찬성 588표, 반대 9표, 기권 20표로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지속가능한 배터리법’으로 불리는 이번 법안은 배터리의 지속가능성과 순환성을 높이는 게 목적이다.
법안에 따르면 앞으로 배터리 업계는 탄소 배출량 신고를 의무화하는 탄소 발자국 제도와 배터리 생산 및 사용 이력을 기록하고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배터리 여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배터리 원료 재활용과 폐배터리 수거 의무도 강화된다.
배터리의 생산부터 이용, 폐기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를 관리한다는 취지의 법안인 만큼 배터리 업계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뿐만 아니라 배터리가 핵심 부품으로 사용되는 업계에 대한 전방위적 규제안이 포함됐다. 그중 하나가 일체형 배터리 제품에 대한 규제 조항이다. 법안에 따르면 앞으로 유럽연합(EU) 내에서 판매되는 휴대용 전자제품은 배터리를 소비자가 쉽게 제거하고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마지막 모델 판매 후 최소 5년 동안 교체용 배터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할 의무도 부여한다.
문제는 현재 판매되고 있는 스마트폰 대다수가 일체형 배터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은 첫 아이폰부터 지금까지 모든 모델을 예외 없이 배터리 일체형으로만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 2015년 선보인 갤럭시 S6 이후부터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일체형 배터리를 채택하고 있다. 법안이 시행되면 시중 대부분의 스마트폰이 이 규제를 위반하게 되는 셈이다.
EU가 이같은 규제를 추진하는 이유는 일체형 배터리가 제품 교체 주기를 앞당겨 자원 낭비를 부추기고, 폐배터리 수거도 어렵게 만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유럽의 제품 수리권 옹호 단체인 ‘리페어닷이유(Repair.eu)’는 2030년 EU에 판매되는 새 스마트폰 ,태블릿을 배터리 교체형으로 만들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절감할 수 있으며, 배터리에 포함된 코발트, 희토류, 인듐 등의 낭비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단체는 또한 불필요한 기기 교체 건수가 3900만 건 줄어들면서 198억 유로(약 28조 원)에 달하는 소비자 지출을 줄이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간 방수, 방진 기능이나 디자인 등을 이유로 일체형 배터리에 사실상 ‘올인’해 왔던 스마트폰 업계는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그나마 교체형 배터리 제품을 생산한 경험이 있고, 지금도 일부 생산 중인 삼성전자와 달리 애플은 탈착식 배터리를 위한 생산 라인과 공정을 완전히 새롭게 마련해야 할 수 있다.
애플이 EU 규제안으로 인해 스마트폰 기능이나 디자인을 바꾸길 강요받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해 유럽 의회에서 승인된 충전기 규격 통일 법안에 따라 독자 규격인 라이트닝 단자를 채택했던 애플은 차기 스마트폰에서는 USB-C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다만 규제가 아니더라도 시간문제로 여겨졌던 단자 규격 교체 문제와 달리 이번 규제는 애플이 첫 아이폰부터 지켜왔던 정체성을 흔드는 셈이어서 반발도 더 클 전망이다.
법안이 당장 시행되는 건 아니다. 아직 유럽연합 이사회 승인 등 형식적 절차가 남았기 때문이다. 법안이 당장 발효되더라도 유예기간 등을 거치면 일러도 2027년에나 본격적으로 적용될 것으로 점쳐진다.
예외 조항도 있다. 교체형 배터리가 안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는 일체형 제품도 허용된다. 전동 칫솔이나 면도기처럼 습하거나 물기가 있는 환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제품, 이어폰과 스마트워치 등의 웨어러블 기기가 이 예외 조항의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같은 예외 조항이 불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자제품 수리 전문 업체인 아이픽스잇(iFixit)의 토마스 옵소머는 “교체형 배터리를 채택하고도 습한 환경에서 잘 작동하는 기기가 이미 시중에 존재한다”면서 “이러한 예외 조항은 아무런 근거 없는 안전 우려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