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에서 첨단기술 요람으로…게임 뒤에 숨은 ‘기술력’이 혁신 이끈다
[IT동아 권택경 기자]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국내 게임 산업 매출액은 20조 9913억 원으로, 사상 최초 20조 원을 돌파했다. 수출액도 약 86억 원 달러로 꾸준히 늘고 있다. 이처럼 게임의 산업적 가치가 커짐에 따라 유해매체 취급받던 과거와 달리 정보통신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게임의 산업적 가치와 더불어 기술적 가치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게임을 통해 개발되거나 발전한 기술들이 게임 외 다른 분야에서 응용되는 사례가 늘면서다. 게임 개발에는 그래픽, 인공지능(AI), 프로그래밍, 네트워크 기술 등 다양한 층위의 기술이 동원된다. 더 재밌고 실감 나는 게임을 만들려는 열망으로 여러 기술 분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최신 기술을 발 빠르게 채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최신 기술의 등장과 발전을 이끌기도 한다.
예컨대 게임 속 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그래픽, 물리법칙 등의 뼈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게임 엔진은 메타버스,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 분야 등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추세다. 독일 자동차 제조사인 BMW는 자율 주행 테스트의 95%를 실제 도로가 아닌 게임 엔진인 유니티로 구현한 가상 세계 안에서 시뮬레이션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제트의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나 SK텔레콤의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도 유니티를 활용해 개발했다.
에픽게임즈의 게임 엔진인 언리얼 엔진은 영화나 방송 제작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기존 그린스크린 대신 대형 LED 화면으로 벽을 채운 세트장에서 영상을 촬영하는 버추얼 프로덕션이 대세가 되면서다. 버추얼 프로덕션 현장에서 언리얼 엔진은 LED 화면에 배경 역할을 할 3D 그래픽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배우 움직임, 카메라 앵글 등을 인식해 실시간으로 시각효과(VFX)를 그려낸다. 디즈니 플러스의 ‘만달로리안’, 넷플릭스 ‘승리호’, ‘스위트홈’, ‘고요의 바다’ 등의 제작에 언리얼 엔진을 활용한 버추얼 프로덕션이 도입됐다.
비록 규제 당국의 제동으로 암초에 부딪히긴 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90조 원에 달하는 거액을 들여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하려 했던 일도 게임의 기술적 가치와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인수 이유를 발표하며 게임이 메타버스를 위한 기본 요소(Building Blocks)를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명처럼 게임, 특히 그중에서도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은 메타버스의 원형으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게임 엔진 개발력, 서버 및 클라이언트 기술, 서비스 운영 노하우 등의 기술적 요구 사항도 비슷하다. 게임이 사실상 메타버스와 같은 미래 기술의 청사진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MMORPG를 주력으로 성장해 왔던 국내 게임사들의 기술적 역량이나 가치도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시사한다.
실제로 국내 게임사들의 연구개발 비용 비중은 매우 높은 수준이며,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국내 주요 게임사인 넷마블, 엔씨소프트(NCSOFT), 넥슨, 크래프톤 모두 지난해 전년보다 연구개발비 지출을 늘렸다. 매출 대비 비중을 보면 통상 20% 수준이며, 많게는 30%를 넘기도 한다. 10~20% 수준으로 알려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을 웃도는 수치다.
엔씨소프트는 2021년 연구개발비로 4288억 원을 투입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4730억 원을 쓰며 그 규모를 더 키웠다. 전체 매출액의 약 19% 수준이다. 엔씨소프트는 특히 ‘리니지W’를 다양한 국가의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서버, 같은 버전의 게임에 접속해 즐기는 ‘글로벌 원빌드’로 구축하기 위한 기술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수많은 이용자가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MMORPG는 장르 특성상 글로벌 원빌드 구현에 필요한 기술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마다 인프라 차이로 네트워크의 질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만약 네트워크 환경이 좋지 않으면 캐릭터가 순간이동하듯 움직이거나, 방금 획득한 아이템이 소지창에 들어가는 대신 바닥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장애가 발생하곤 한다.
엔씨소프트에서는 어떤 네트워크 환경에서도 안정적이고 일관된 게임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리니지W에서 RIO(Registered I/O)라는 네트워크 모델을 도입했다. 기존 MMORPG에 흔히 쓰였던 IOCP(Input/Ouptput Completion Port) 방식보다 데이터를 더 잘게 쪼개고, 더 자주 주고받는 방식이다. 더 안정적 연결을 보장하는 데다 연결이 끊겼을 때 복구도 더 빠르게 이뤄진다. 그만큼 개발 난도도 높지만 엔씨소프트는 먼저 이를 기존에 서비스 중이던 ‘리니지M’에 적용해 검증을 마친 뒤, 리니지W에 적용한 덕분에 원활한 도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스 맵 로딩을 한층 개선한 ‘레벨 세그먼트 그래프’도 엔씨소프트의 기술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리스는 이음매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구조를 말한다. 게임에서는 주로 게임 내 지역 사이 이동이 로딩 없이 이뤄지는 것을 뜻한다. 리니지W 개발에 활용된 언리얼 엔진4에도 심리스 맵 로딩 기능이 있지만 맵 규모에 따른 성능 저하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벨 세그먼트 그래프는 이를 대체하기 위해 엔씨소프트가 자체 개발한 지형 처리 시스템이다.
레벨 세그먼트 그래프는 맵을 레벨이라는 작은 단위로 세분화한 뒤 자동으로 관리하며, 우선순위를 정해 더 중요한 레벨을 먼저 불러오고, 덜 중요한 레벨은 나중에 불러오는 식으로 작동한다. 그 덕분에 무작위 이동 시 기존 2~5초 수준이었던 로딩 속도를 최대 0.1초까지 줄일 수 있었다는 게 엔씨소프트 측 설명이다. 서울 강남구 면적의 약 11배 규모인 리니지W 내 모든 지역을 로딩 없이 1초 이내에 무작위로 이동할 수 있는 수준이다.
2011년부터 일찍이 전담 부서를 만들어 개발하고 있는 AI 기술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AI 연구개발 경진 대회인 ‘인공지능 그랜드 챌린지’ 3차 대회에서 비전 AI 연구로 우승을 차지하며 기술력과 활용도를 입증하기도 했다. 적으로 등장하는 몬스터 행동에 AI를 적용하거나, 리니지W에 자체 개발한 AI 번역 모델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글로벌 이용자들이 원활히 소통하도록 돕는 등 게임 내에서도 다양한 방면으로 AI를 활용 중이다.
엔씨소프트는 이처럼 검증된 AI와 3D 그래픽 기술을 집대성해 차세대 첨단 기술인 ‘디지털 휴먼’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실제 지난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 2023)에서 김택진 대표를 본떠 만든 디지털 휴먼을 깜짝 공개하기도 했다. 디지털 휴먼은 일종의 가상 인간이다. 3D 기술로 실사와 분간이 어려운 외관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처럼 말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다.
엔씨소프트의 디지털 휴먼은 4D 스캐너를 비롯한 최신 하드웨어와 자체 개발한 AI 기술을 접목해 탄생했다. 4D 스캐너는 얼굴 3D 정보를 이미지로 추출하는 이전 3D 스캐너와 달리 동영상으로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렇게 추출한 얼굴 3D 정보에 텍스트 음성 합성 기술(TTS)과 립싱크 합성 기술인 엔페이스(NFace)를 적용해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한 디지털 휴먼을 만들었다. 엔페이스는 음성을 넣으면 그에 맞는 표정과 입 모양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기술이다.
엔씨소프트가 디지털 휴먼에 주목하는 건 MMORPG의 차원 높은 재미가 상호작용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람만큼 깊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디지털 휴먼 기술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게임 장르 개척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