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과 게임으로 암·당뇨·ADHD·트라우마 치료한다... 디지털 치료제란?
[IT동아 정연호 기자] 프랑스 기업 볼룬티스의 ‘올리나’ 앱은 암 환자가 빠르게 증상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 디지털 치료제이다. 암 환자가 항암 치료 부작용을 앱에 올리면, 증상을 빠르게 분석하고 개인에게 최적화된 해결책을 제시한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 시 의료팀 연결도 가능하다.
코로나19 이후로 올리나와 같은 디지털 치료제라는 신기술은 우리 삶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젠 집에서도 디지털 치료제 앱을 통해서 건강상태를 분석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대응 방식을 따를 수 있게 됐다. 질병을 관리하고 치료하기 위해 개인들에게 제공되는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디지털 치료제’ 덕분이다. 현재 한시적으로 허용된 비대면 진료도 디지털 치료제의 일환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기존 치료제와 함께 쓰이거나, 이를 대체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디지털 치료제는 의료적 효능과 안전성이 검증된 기술을 의미하며, 의사의 처방 아래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기존 의료 방식과 같다. 대신 부작용이 거의 없으며, 신약 개발에 비용과 시간이 덜 들어간다는 것이 장점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서 의료의 패러다임이 치료에서 예방과 관리로 전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의료 시스템은 진료를 통해서 병을 발견하고, 이를 치료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대부분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서 치료 예후가 좋지 않고, 치료와 수술 등에 따른 비용으로 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되는 등 사회적 비용이 큰 상황이다.
디지털 치료제로 개인의 건강상태를 모니터링하면서 관리한다면, 병을 예방하는 게 가능해지며 사회적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센서 등을 통해서 환자가 보고하는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디지털 치료제는 데이터를 통해 맞춤형 관리 및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디지털 치료제의 세계 시장 규모는 2020년 21억 달러에서 연평균 34.4%로 성장해 2025년 69억 달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시장은 2020년 4742만 달러에서 연평균 29.7%로 성장해 2025년 1억 3459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디지털 치료제의 치료 기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일상에서 나오는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하는 빅데이터다. 불면증 환자 세 명이 있다고 해보자. 각각의 환자는 불면증의 원인이 모두 다르다.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서 개인의 생활 방식을 분석하고, 원인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이에 맞는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
환자가 자기 몸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3분 진료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환자들은 의사로부터 질병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하는 게 국내 현실이다.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 당뇨병 합병증과 관리 방법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환자는 질병 관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은 물론 효율적인 방식으로 병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하나는 심리치료 기술 기반의 중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금연을 위한 니코틴 패치 등과 디지털 치료제 앱을 함께 사용하면 사람들은 담배를 더 잘 끊게 된다. 흡연의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 등을 파악하고 이를 해소할 대안적인 방법을 추천받게 돼 실험 참가자들이 담배 대신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 기존 연구들도 인터넷인지행동치료(ICBT)는 수면 장애, 우울이나 불안, PTSD, 알코올 사용 장애 등 정신 증상에서 호전 효과가 있다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세계 최초 디지털 치료제인 페어 테라퓨틱스의 ‘리셋’은 알코올, 코카인, 대마 등 약물중독 환자에게 인지행동치료(자동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변화시키는 치료방법)를 제공하는 앱으로 2017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환자들은 리셋 앱을 통해서 마약에 대한 충동을 제어하고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임상시험 결과, 기존 치료와 리셋을 함께 사용한 환자군은 40.3%가 금욕을 유지했지만, 기존 치료 방법만 쓰는 경우 17.6%만 금욕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아킬리 인터랙티브는 신경정신질환 치료 게임 치료제 엔데버Rx를 개발한 기업으로, 이는 FDA 허가를 받은 최초의 게임 기반 치료제다. 엔데버Rx는 소아 ADHD 증상으로 인한 주의력 결핍을 개선할 수 있는 태블릿용 비디오 게임이다. 이용자는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면서 다양한 운동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엔데버RX에 내장된 선택적 자극 관리 엔진(SSME)은 저하된 인지 기능을 치료하기 위해서 뇌의 특정 신경 시스템을 활성화하는데, 이때 개별 환자 맞춤 치료를 제공하기 위한 특정 알고리즘도 사용된다.
VR(가상현실) 노출 치료는 디지털 치료제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노출 치료는 위험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가상상황에 환자를 노출하고, 환자가 공포 자극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치료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퇴역 군인을 위한 ‘Virtual Vietnam’과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를 위한 ‘Virtual Iraq’가 있다. 환자들은 VR로 구현된 전쟁 시나리오 속에서 전시 상황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이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
미국 워싱턴대가 개발한 VR영상 게임 스노우월드는 사용자가 움직이는 펭귄과 눈사람에게 눈덩이를 던지면서 얼음 협곡을 탈출하는 게임이다. 화상을 입은 군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시험에서 스노우월드는 모르핀보다 진통 효과가 뛰어났다.
국내에서는 룩시드랩스가 인지 상태를 분석하는 헤드셋 루시1.0(LX-1)을 개발했다. 루시1.0은 VR과 증강현실(AR)에 접목하는 시선-뇌파 기반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다. 루시 VR 기기 이용자는 뇌파를 분석하고 치매 등을 인지하고 관련 훈련을 받거나, 스트레스 해소 및 집중력 향상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이용자가 게임을 즐기는 동안 뇌파를 읽고 인지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국내 스타트업 '라이프시맨틱스'가 디지털치료제 개발에 나서고 있다. 현재 호흡기질환 환자를 위한 호흡재활 프로그램 '숨튼', 암 환자의 예후 관리 프로그램 '레드필케어' 등을 개발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 상용화 전 넘어야 할 장벽
우리 정부는 2020년 3월 ‘포스트 코로나에 대비할 유망기술’에 디지털 치료제를 포함시키고, 이를 위한 투자와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디지털 치료제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디지털 치료제는 국내의 경우 상용화된 사례가 없으며 이에 대한 원인으로 높은 허들의 규제와 수가 문제가 지적된다.
산업 관계자들은 국내 디지털 치료제 산업을 육성하려면 우선적으로 보험 수가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적절한 수가가 산정되야 의사들도 이를 처방하게 되고, 관련 기업에게도 신기술을 개발할 유인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 정부는 디지털 치료제는 비교 가능한 품목이 없어서 수가를 위한 가치평가 체계를 마련하기 어렵지만, 개발 비용을 보상하는 수준에서 임시 수가를 부여하고 의료 절감 효과 등을 파악해 원가를 보상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디지털 치료제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엔 왜곡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학술지 ‘정신의학 최신연구(Frontiers in Psychiatry)’에 실린 논문 ‘Digital therapeutics for mental health: Is attrition the Achilles heel?’은 디지털 치료제 임상시험 결과가 치료 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논문에 따르면, 엔데버 Rx는 4주에 걸친 탐색실험에서 환자들이 치료 절차를 엄격하게 따르는지(실험 순응도)가 모니터링됐고, 치료는 부모의 감독하에서 진행됐다. 이러한 장치가 없는 치료 현장에선 환자 이탈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12주 동안의 후속연구에선 이탈률이 4주 차에 34%, 12주 차엔 50%로 높아졌다.
페어 테라퓨틱스의 마약성 진통제 중독 치료제 리셋오도 실험 참여자의 이탈률이 12%로 낮았지만, 실험 연구는 치료사 감독하에 진행됐고 최대 100달러 현금이 참가 보상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우울증 등의 환자는 치료에 참여하는 동기가 낮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환자들이 디지털 치료제를 꾸준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료제가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중간 이탈자들은 제한적인 치료 효과를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상용화된 디지털 치료제를 대중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센티브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 이를 위해선 게임화, 적극적인 의료진의 피드백, 병이 개선되는 정도를 차트화 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치료제 사용을 망설이는 이유는 개인정보 침해 때문인 경우가 많다. 데이터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다.
글 / IT동아 정연호 기자(hoh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