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개발 CPU' 시도하는 러시아, 실현 가능성은?
[IT동아 남시현 기자] 우크라이나발 전쟁으로 대규모 금수 조치가 적용된 러시아가 반도체 자립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러시아는 70년대부터 무기 개발 및 기술 자립을 위해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직접 개발해오고 있으며, 2010년 이후부터 정부 소속 컴퓨터에 활용할 ARM 기반 프로세서를 제조해오는 등 꾸준히 연구 개발을 이어왔다. 하지만 현대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물류 체인으로 개발과 공정이 연계돼있는 만큼, 고립된 러시아가 단독으로 개발하는 프로세서가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70년대부터 CPU 개발한 러시아, 상용화엔 한계
러시아는 현재 VLIW(Very Long Instruction word)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는 MCST(모스크바 스팍 연구소)의 옐브루스 프로세서, 그리고 바이칼 테크놀로지가 ARM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제조한 바이칼 프로세서에 대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옐브루스 프로세서는 70년대 탄도미사일 제어용 프로세서로 자체 개발을 시작했고, 냉전 시기가 종식되면서 모스크바 스팍연구소가 지식재산권을 인수해 개발을 이어오고 있다.
옐브루스 자체는 군용이기 때문에 상용 제품 보다는 보안이 중요한 군용 프로세서로 활용되어 왔지만, 2014년부터 28나노미터 공정의 8코어 VLIW 프로세서인 옐브루스-8을 시작으로 상용 제품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MCST가 2014년을 전후로 프로세서의 성향을 바꾸고 라인업을 키운 이유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직접적으로 관련돼있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을 이유로 서방 세계와의 마찰을 겪기 시작하면서 자체 기술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프로세서 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트럼프 정부 당시 중국과 미국이 반도체를 놓고 무역 분쟁을 벌이자, 러시아 역시 산업 전반에 쓸 수 있도록 개발 영역을 넓힌다. MCST는 지난 2021년에 러시아 연방 산업통산부의 지원을 받아 12코어 및 16코어 프로세서를 내놓을 예정임을 밝혔고, 2025년까지 32코어 프로세서를 내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32코어 제품의 경우 목표 제품은 7nm 공정 기반에 64MB 캐시 메모리와 DDR5 메모리, PCIe 5.0의 스펙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문제는 8코어 제품의 성능도 실사용으로는 어렵다는 점이다.
러시아 스베르방크(Sberbank)의 기술 부문인 스베르인프라가 지난 해 옐브루스 파트너 데이 콘퍼런스에서 8코어 기반의 옐브루스-8CB와 인텔 제온 골드 6230과 비교 테스트한 결과에 따르면, CPU 성능이 스펙 CPU 2017 벤치마크 기준 2.62~3.15배 느리며, Java 응답 시간이 23~26배까지 느리다고 밝혔다. 게다가 보안이나 기능, 애플리케이션, 합성 테스트의 요구사항이 충족되지 않아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밝힌 바 있다. 상용 제품을 내놓겠다는 MCST의 로드맵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목표 달성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 것이다.
상용화까지 성공한 모델도 위탁 제조 불가능
러시아가 밀고 있는 또 다른 프로세서는 바이칼 일렉트로닉스의 ARM 기반 프로세서다. 바이칼 일렉트로닉스 역시 MCST와 마찬가지로 크림반도 합병을 계기로 기술 개발을 시작했으며, 작년 말에 TSMC 28nm 공정 기반의 ‘바이칼-M’ 프로세서 양산을 시작했다. 바이칼 프로세서는 ARM Cortex-A57 기반의 옥타코어 프로세서로, 코어는 최대 1.5GHz로 동작하며, Mali-T628 MP8 GPU 코어를 채택했다. 운영체제는 리눅스 기반의 운영체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칼-M이 갑자기 등장한 건 아니다. 러시아는 2014년부터 인텔 및 AMD의 x86 프로세서가 탑재된 정부 소속 컴퓨터를 바이칼 일렉트로닉스의 제품으로 교체하는 계획을 세워왔다. 20년 12월에는 러시아 연방 법령 2013호를 통해 정부 기관은 2022년까지 러시아산 노트북 및 태블릿의 최저 점유율 60%, 2023년에 70%를 맞춘다는 목표로 세우기도 했다.
문제는 프로세서의 성능이나 호환성 등이 아니다. 바이칼-M을 사용한 최초의 제품은 러시아의 컴퓨터 하드웨어 제조사 프로모빗(Promobit)이 공개한 노트북, 비트블레이즈 타이탄 BM15이다. 타이탄 BM15는 바이칼-M 기반에 16GB 메모리, SSD NVMe가 장착된 러시아 제품이다. 제품은 수개월 내 조립을 끝내고 1천 개 정도를 시범 출하할 계획이며, 가격은 1600달러에서 1900달러(209만 원에서 238만 원대)가 될 예정이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되는 바이칼-M은 제조를 대만 TSMC에 위탁 제조한 제품이며, 지난주 대만은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25MHz 이상 반도체 수출을 금지했다. 곧 출시될 제품에 탑재되는 프로세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인도받은 제품의 재고로 보인다.
또 ARM은 지난달 바이칼과 MCST 모두 ARM 기술 사용을 금지했다. 아울러 메모리 반도체, 낸드 플래시, 디스플레이 패널 등 컴퓨터 제조에 필요한 모든 장치가 글로벌 공급망에 걸쳐져있다 보니 재고가 모두 소진되면 노트북 제조는 100% 자체 제작하거나 중국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어진다. 사실상 제조가 불가능하다.
사면초가 몰린 러시아, 멀리 내다봐도 힘들어
러시아가 미국 CPU에서 자립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도 자체 제작 CPU 점유율이 0.5%에 불과하다며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해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작에 나섰지만, 무역 분쟁을 겪으면서도 당장 인텔과 AMD CPU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위탁 생산도, 수입도, 라이선스 생산도 막힌 상황이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중국의 도움을 받더라도 한계가 명확하다.
한편, 재닛 옐런 미 재무부장관은 7일(현지 시간)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 중 3분의 1은 반도체 부족 사태에서 빚어졌다고 답변했다.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마저도 반도체 전체에 대한 수급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과연 러시아가 자립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글 / IT동아 남시현 (s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