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우디에서 느낀 한국…IT 강국 아닌 콘텐츠 강국
[IT동아 권택경 기자] 지난 2일 오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리야드 프론트 컨벤션 센터. 이곳에서 올해 처음 열린 국제 기술 전시회 ‘LEAP 2022’을 취재하기 위해 행사장을 돌아다니던 기자에게 누군가 영어로 “실례한다”며 말을 걸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니캅(눈만 내놓는 무슬림 여성용 복면)을 착용한 젊은 사우디 여성이 있었다.
니캅을 쓴 여성이 먼저 말을 걸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해 다시 시선을 돌리자 여성은 “내가 당신을 부른 게 맞다”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여성은 난데없이 “잠시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요구했다. 어리둥절한 채 요구에 응하자 여성은 “생김새와 옷차림이 한국인 같아서 그랬다. 한국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여성은 “K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호텔이나 행사장 인근 식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이어졌다. 한국인임을 먼저 알아보거나, 물어서 알게 된 경우 십중팔구 K팝이나 K드라마 얘기를 꺼냈다. 기자가 우연히도 K팝과 K드라마 팬만 마주치게 된 것도 아니다. 현지 넷플릭스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도 한국 드라마인 ‘지금 우리 학교는’이었다.
이번 ‘LEAP 2022’에서 전시 출품을 한 한국 기업은 스타트업 한 곳을 제외하곤 없었고, 기조연설에 참여한 기업인도 현대차그룹 지영조 이노베이션 부문 사장 한 명에 그쳤다. 세계 무대에서 ‘정보기술(IT) 강국’을 자처하기엔 그 존재감이 너무 옅었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이 국내 기업들의 주력 시장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도 아쉬운 대목이다. 반면, ‘콘텐츠 강국’으로서의 존재감과 위상은 굳이 찾아보려 애쓰지 않아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대차를 탄다고, 삼성 스마트폰을 쓴다고 한국에 호감을 느끼고 한국 문화나 언어에 관심을 가질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애플 아이폰이나 캐논 카메라를 쓴다고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 갑자기 솟아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콘텐츠는 달랐다.
K팝이나 K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을 꺼낸 이들은 한국이란 나라와 한국의 문화, 언어에 적극적인 호감과 관심을 드러냈다. 행사장에서 만난 사우디 여성은 옷차림을 보고 한국인임을 짐작할 정도였다.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도 많았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뿐이 아니었다. 음식을 서빙하던 종업원은 뜨거운 접시를 내려놓다 “앗! 뜨거”라는 또렷한 한국어를 내뱉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사우디인도 있었지만,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도 많았다.
한국의 수출 품목 부동의 1위는 반도체로 지난 2020년 기준 약 992억 달러(약 118조 원) 수준이다. 같은 해 영화, 만화, 게임, 음악 등을 모두 포함한 국내 콘텐츠산업 수출액은 약 108억 달러(약 13조 원) 수준이다. 규모로만 보면 9분의 1 수준이지만 앞으로의 성장 여지는 크다.
무엇보다도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문화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콘텐츠 열풍을 바라보며 그저 자부심을 채우는 데 만족하기보다는 이를 지렛대 삼아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쩌면 한국의 미래는 ICT 산업이 아니라 콘텐츠 산업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우디도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듯하다. LEAP 2022 행사에서 사우디 디지털 콘텐츠 협의회는 디지털 콘텐츠를 위한 투자 계획인 ‘이그나이트’를 발표했다. 11억(약 1조 3천억 원) 달러를 사우디를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디지털 콘텐츠 및 미디어 제작의 선도자이자 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