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열전: 라지브 수리] 노키아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기업 살리는 CEO의 결단
[IT동아 강일용 기자] 노키아는 경영학 교과서에 반면교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한때 세계 최고의 휴대폰 제조사였지만, 스마트폰으로 변하는 시장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몰락한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대부분의 기사나 교과서는 노키아가 몰락한 것만 언급하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노키아는 망하지 않았다.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 끝에 스마트폰 등 무선 기기를 인터넷과 연결해주는 무선 네트워크 장비(기지국)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B2C 기업이 B2B 기업으로 변신함 셈. 이러한 변화를 이끈 인물이 바로 라지브 수리(Rajeev Suri) 노키아 최고경영자다. 스마트폰 사업부마저 매각하고 수렁에 빠져있던 노키아는 어떻게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일까. 노키아의 몰락사와 수리의 경영 전략을 통해 그 비결을 알아보자.
<라지브 수리 노키아 최고경영자 출처: 노키아>
노키아의 몰락, CEO의 오판이 부른 참혹한 결과
노키아는 1865년 핀란드에서 설립된 기업으로,150년이 넘는 업력을 자랑한다. 처음 노키아의 주력 비즈니스는 핀란드의 국책 사업이었던 목재 수출에 맞춘 제재소와 종이 생산이었다. 이후 핀란드와 소련의 관계 변화를 감지하고 케이블과 타이어를 생산해 소련에 수출하는 사업을 진행했고, 1990년대 휴대폰 사업이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자 적극적인 인수 합병으로 휴대폰 사업에 진출했다. 과거에 진행했던 케이블, 타이어 제조 같은 경공업은 정리했다.
유럽 시장과 GSM 통신 기술을 등에 업고 노키아는 승승장구했다. 1998년 미국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휴대폰 제조사로 등극했다. 2007년 최대 전성기 시절에는 전 세계 휴대폰 판매량의 40% 이상을 점유하기도 했다. 한국에 삼성전자가 있는 것처럼, 핀란드에는 노키아가 있었다. 핀란드 전체 상장기업의 시가총액1에서 노키아가 60%를 차지하던 시절마저 있었다.
<노키아 로고>
하지만 2010년 스마트폰이 모바일 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노키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이 일반 휴대폰 대신 스마트폰을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노키아의 휴대폰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삼성전자에게 전 세계 휴대폰(스마트폰 포함) 판매량 1위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다급해진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제휴를 맺고 자체 모바일 운영체제인 '심비안' 대신 '윈도우폰OS'를 채택한 스마트폰을 시장에 내놨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시장점유율은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적자는 나날이 늘어났다. 결국 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노키아는 2013년 9월 휴대폰과 스마트폰 생산을 담당하던 디바이스 및 서비스 사업부분과 핀란드 본사 사옥을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매각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노키아는 왜 이렇게 급격히 몰락한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최고의사결정권자인 CEO의 오판을 꼽을 수 있다. 애플 아이폰이 시장에 출시되고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던 2010년 노키아의 최고경영자는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이었던 올리페카 칼라스부오였다. 그는 CFO 출신답게 원가 절감을 통한 수익 확보라는 비즈니스 전략에 집중했다. 그의 전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략을 시행한 시기였다. 원가 절감을 통한 수익 극대화는 보통 시장이 안정화되고 기업의 점유율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을 때 꺼내드는 경영 전략이다. 문제는 당시 모바일 시장은 일반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대세가 변하는 격동기였다는 점이다. 원가 절감보다는 R&D를 통해 시장 변화에 대응해야하는 시기였다.
칼라스부오는 수익 극대화를 위해 마진율이 높은 일반 휴대폰에 집중하고 별다른 이익이 나지 않는 스마트폰 사업을 소홀히 했다. 그 탓에 노키아의 모바일 운영체제 심비안은 스마트폰 생태계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안드로이드와 iOS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칼라스부오는 아이폰을 보고 "이해하기 힘든 제품이다. 결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나, 시장은 그 평가와 반대로 움직였다. 삼성전자 등 다른 경쟁사는 아이폰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제품을 시장에 출시해서 애플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원가 절감에 치중하던 노키아는 그런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지 못했다.
<출처 노키아>
일반 휴대폰 시장이 쪼그라들고 스마트폰 판매량이 급증하자 노키아도 경각심을 느꼈다. 회사의 체질을 스마트폰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인 스티븐 엘롭을 다음 CEO로 영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엘롭도 잘못된 결정으로 노키아를 나락에 빠뜨렸다.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인 엘롭은 모바일 운영체제의 대세인 구글 안드로이드 대신 간신히 3위 점유율을 수성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폰에 집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윈도우폰은 안드로이드에 밀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노키아의 존재감도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엘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2013년 10월 거액의 퇴직금을 챙겨 마이크로소프트로 복귀했다. 그나마 남은 옛정으로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였던 스티브 발머를 설득해 노키아의 디바이스 사업 부문을 72억 달러라는 거금에 인수한 후 자신이 그 사업부서의 수장을 맡았다.
회사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하는 CEO의 결정
칼라스부오와 엘롭의 오판은 잘나가던 기업이 CEO의 잘못된 결정으로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반대로 이렇게 몰락한 기업도 CEO가 시장을 읽고 제대로된 판단을 내리면 다시 재기할 수 있다. 엘롭이 마이크로소프트로 복귀한 후 노키아의 최고경영자 자리는 7개월 동안 비어있었다. 당시 노키아의 내부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5월 노키아의 신임 CEO로 결정된 인물은 20년 동안 노키아에 근무한 '노키아맨' 라지브 수리였다.
수리는 1967년 인도 뉴델리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명문 마니팔 공과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한 후 칼콤전자 등 인도의 여러 회사에 근무하다가 1995년 노키아에 입사했다. 그가 노키아에 입사해 담당한 부서는 당시 노키아의 주력이었던 단말기 사업부서가 아니라 무선 네트워크 장비를 만들어 이동통신사에 판매하는 네트워크 사업부였다. 조금 한직이었던 셈이다.
<라지브 수리 노키아 최고경영자 출처: 노키아>
하지만 그는 네트워크 전문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꾸준히 다졌다. 2G, 3G, LTE(4G) 등으로 네트워크의 패러다임이 바뀔때마다 이동통신사를 방문해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꾸준한 조언을 제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네트워크 사업부의 주요 요직을 섭렵할 수 있었다. 2007년 노키아 네트워크 사업부는 지멘스 네트워크와 합병해 노키아 지멘스 네트워크(NSN)라는 별도의 회사로 거듭났고, 수리는 이 회사에서 부사장을 거쳐 2009년 CEO 자리에 올랐다. 결국 모회사의 부름을 받고 2014년 노키아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CEO로 임명되었다.
몰락한 노키아를 살려내기 위해 수리가 취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못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는 취임 후 전 직원에게 "과거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큰 꿈을 꾸자"라는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보내 그가 향후 취할 경영 전략을 예고했다.
20년 넘게 네트워크 사업부에 종사한 수리는 노키아가 살아남으려면 무선 네트워크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먼저 NSN에서 지멘스 지분을 모두 인수해 네트워크 사업부를 완전히 노키아의 것으로 바꿨다. 이어 불필요한 사업부를 모두 정리했다.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인 위성 지도 사업 '히어'조차 자금 마련을 위해 벤츠, BMW, 아우디 등으로 구성된 독일 자동차 컨소시엄에게 28억 유로에 팔아버렸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에게 팔아버린 디바이스 사업부서 매각 대금과 히어 매각 대금을 합쳐 4위 네트워크 사업자였던 프랑스 '알카텔루슨트'를 156억 유로에 인수했다. 유선과 무선을 아우르는 종합 네트워크 기업이 되기 위해서다. 무선 네트워크 분야에서 3위 사업자였던 노키아는 4위 사업자였던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해 잠시나마 1위 사업자가 될 수 있었다. 원래 1위 기업이었던 에릭슨과 무섭게 성장하며 에릭슨의 자리를 위협하던 화웨이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노키아는 LTE와 5G 장비 분야에서 화웨이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했고, 2017년 오랜 침체를 깨고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핀란드 언론이 선정한 2017년 비즈니스 리더로 선정되기도 했다.
결국 둘 만 남는다... 사람과 기술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키아의 전략
수리를 포함해 무선 네트워크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관계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결국은 둘 만 살아남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 양질의 무선 네트워크 장비를 전 세계 이동통신사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초거대기업 둘 만이 살아남아 네트워크 장비 시장을 양분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현재 화웨이, 에릭슨, 그리고 노키아가 살아남는 둘에 포함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아쉬운 얘기지만 자체 네트워크 사업을 전개 중인 삼성전자도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다. 중국 정부의 비호를 받던 ZTE조차 경쟁에서 탈락했다.
<출처 노키아>
살아남기 위해 수리가 택한 전략은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미국과 유럽에 발을 걸친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과 기술에 투자하는 것이다. 수리는 인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했고, 현재 런던에 거주하고 있다. 특정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국가를 돌아다니며 비즈니스를 진행한 경험을 토대로 노키아를 핀란드의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하고 있다. 노키아의 명목상 본사는 핀란드 에스푸이지만, 그곳의 규모는 노키아 전체에서 세 번째에 불과하다. 더이상 본사라고 할 수 없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연구소와 런던에 있는 사옥의 규모가 훨씬 크고 상주하는 인원도 더 많다. 기술 개발은 미국을 중심으로, 경영은 런던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임원 가운데 핀란드인 비중도 확 줄였다. 미국, 영국, 일본 등 경쟁사인 화웨이가 발붙이지 못하는 시장을 중심으로 내실을 다진 후 글로벌 시장 공략을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기술 개발을 통한 원천 기술 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키아 전체 인력 10만 명 가운데 연구 개발에 투입된 인력은 4만 명에 달한다. 실리콘밸리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 세계 각국에 연구소를 설립해 현지 시장에 맞는 네트워크 장비를 개발 중이다.
마지막으로 수리가 만지작거리는 카드는 합병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살아남는 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기업은 시장점유율 1위인 화웨이다. 결국 에릭슨과 노키아 둘 중 하나는 시장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시장에선 에릭슨과 노키아가 합병할 것이라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온다. 하지만 같은 유럽 출신 기업이라도 기업 문화가 달라 합병이 쉽지는 않을 전망. 게다가 유선 네트워크 시장의 강자인 시스코가 에릭슨과 노키아 가운데 하나를 인수해 무선 네트워크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국가의 전략 자산인 통신망을 외국 기업에 맡겨둘 수 없다는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5G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시점을 앞두고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물 밑에선 이렇게 합종연횡이 조용히 진행 중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