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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CEO 열전] 사악한 MS, 구글과 대립각 세운 오라클 창업주 래리 엘리슨

강일용

[IT동아 강일용 기자] 회사에 저장된 데이터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DBMS)을 만들어 세계 7번째(2017년 포브스 기준)로 부자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DBMS 업계 1위 기업 '오라클'의 창업자이자, 전 최고경영자(CEO)였고, 현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래리 엘리슨(Lawrence Joseph Ellison) 오라클 회장이다.

데이터베이스의 모음인 인터넷과 데이터 중심 기업 경영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DBMS는 컴퓨터 운영체제 못지않게 중요한 소프트웨어로 떠올랐다. 오라클은 이 DBMS 업계에서 IBM, MS, 오픈소스 진영 등과 경쟁하면서 입지를 쌓았다. 래리 엘리슨은 이러한 오라클의 지분을 25%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덕분에 522억 달러(59조3253억 원)의 자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세계에서 손 꼽히는 부자가 되었을까.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이 소비자 구매 및 소비 행태가 미래에 어떻게 변화할 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출처: 오라클 공식 트위터>

내가 바로 오라클이다

엘리슨은 실리콘밸리의 산증인이다. 1977년 오라클의 전신이 되는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실(SDL)'이라는 회사를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이래 꾸준히 최고경영자로 재직하며 오라클과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지켜봤다. 그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은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손을 떼고 후계자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엘리슨은 73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라클을 지휘하며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7년 회사를 창업했을 때부터 2014년까지 37년간 오라클 최고경영자로 재직했고,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라클 회장 및 CTO로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트<전 세계 부호 순위. 출처: 비즈니스인사이트>

엘리슨의 삶은 '오라클'로 요약할 수 있다. 오라클의 주식이 폭락하는 중에도 엘리슨은 절대로 오라클의 주식을 팔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훨씬 가치가 있던 다른 회사의 주식을 팔아 현금을 확보한 후 그 현금으로 오라클의 주식을 추가로 매입했다. 컨설턴트들이 엘리슨에게 안정적인 재산 확보를 위해 오라클의 주식 대신 수익률이 보장되는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엘리슨은 "나와 회사(오라클)는 완전히 하나다. 회사는 내 몸의 일부다. 몸의 일부를 잘라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오라클 주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오라클
<오라클 회사 내부 모습. 공간을 클라우드 개발을 테마로 꾸며놓았다. 출처: 오라클 공식 트위터>

현재 엘리슨의 공식적인 직함은 CTO다. 오라클의 기술 개발에만 관여하지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2014년 9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마크 허드 부사장에게 CEO 자리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개발자와 기업이 오라클과 엘리슨을 동일시 여기고 있다. 1996년부터 열린 오라클의 개발자 행사 '오라클 오픈월드'의 기조 연설은 언제나 엘리슨이 전담하고 있다. 행사 동안 2~3번에 걸쳐 기조 연설을 하고 있으며, 참가자들도 이를 당연시 여기고 있다. CEO가 개발자 행사의 기조 연설자로 나와 한 해 동안 어떤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는 엘리슨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양아라는 자격지심이 창업으로 이어져

엘리슨은 1944년 유대계 미혼모와 이탈리아계 미 공군 조종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9개월이 지나 엘리슨이 폐렴에 걸리자 생모는 그의 양육을 포기했다. 그는 시카고에 거주하는 유대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두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의 원래 성 대신 뉴욕시의 엘리스 섬에서 따온 엘리슨을 자신들의 성으로 삼았고(국내에 귀화하는 사람들이 새로 성과 본관을 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를 래리 엘리슨에게 물려줬다.

그의 양어머니 메간 엘리슨은 래리 엘리슨을 친자로 여기고 따듯하고 자상하게 돌봐주었다. 부부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으나, 엘리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3세 때 진행되는 유대교 성인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고, 지금까지도 무교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슨은 두 부부에게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창업한 회사의 이름을 신탁을 뜻하는 오라클로 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엘리슨은 일리노이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2학년에 들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큰 시련에 부딪친다. 그의 어머니가 숨진 것이다. 엘리슨은 기말고사조차 보지 않고 학교를 그만뒀다. 일리노이대를 떠나 당시 히피들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방황은 길지 않았다. 양아버지의 설득과 히피 생활 자체가 체질에 맞지 않았던 엘리슨은 다시 시카고대 물리학과에 입학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카고 대학에서 당시 세상을 바꿀 기기로 떠오르고 있던 컴퓨터를 접한 엘리슨은 이번에는 히피가 아니라 컴퓨터 산업의 본산인 실리콘밸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로 떠났다.

실리콘밸리의 여러 기술 기업에서 일하던 엘리슨은 앰펙스(AMPEX)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훗날 그의 회사 이름이 될 '오라클'이었다. 이 업무를 담당하면서 엘리슨은 데이터와 데이터베이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련된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1970년 IBM이 발표한 '대규모 데이터 은행을 활용한 데이터 관계 모델 구축 방법'이라는 논문을 읽고 DBMSData BaseManagement System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래리 엘리슨
<래리 엘리슨의 요트였던 '라이징 선'. 일본문화와 에도시대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다른 요트의 이름은 '무사시'로 지었다>

1977년 엘리슨은 앰펙스를 떠나 프리시전 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할 필요가 생겨 외부에 개발을 의뢰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사업을 엘리슨이 따내게 되었다. 엘리슨은 앰펙스에서 일하던 시절 알게 된 동료인 밥 마이너와 에드 오츠에게 연락했다. 둘을 설득해 DBMS만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업체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초기 자본금은 고작 2000달러(227만 원)였다. 이 2000달러 가운데 1200달러(136만 원)를 엘리슨이 냈고, 남은 800달러(91만 원)를 둘이 반반씩 냈다. 비록 1200달러라는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지만, 이는 오라클 전체 지분의 60%에 달하는 수치였다. 현재 500억 달러(56조8250억 원)가 넘는 그의 막대한 재산은 바로 이 지분 60%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정한 회사의 이름은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실(SDL)이라는 멋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었다. 1979년 이를 의식한 것인지 회사 이름을 '릴레이셔널 소프트웨어(관계형 소프트웨어)'로 변경했다. 회사의 주력 상품이 관계형 DBMS라는 점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 역시 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참다못한 엘리슨은 회사 이름을 회사의 주력 상품인 '오라클 데이터베이스'에서 따온 '오라클'로 최종 결정했다.

먼저 시장을 선점하고 그다음 문제를 고쳐라

엘리슨과 오라클은 IBM이 관계형 DBMS '시스템R'을 구축하기 위해 개발한 SQL이라는 데이터베이스용 프로그래밍 언어에 주목했다. SQL은 DBMS를 구축하는데 최상의 기술이었으나, 이를 이용하려면 IBM의 비즈니스 컴퓨터 '메인프레임'을 구매해야만 했다. 메인프레임은 대규모 기업에게는 적합한 하드웨어였지만, 중견 기업이나 작은 기업(SMB)에겐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유닉스(UNIX) 기반의 하드웨어가 더 적합한 시스템이었다. 엘리슨과 오라클은 유닉스 하드웨어에서도 SQL 기반으로 만들어진 DBMS를 이용할 수 있도록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를 출시했다. 이 새로운 DBMS는 IBM의 시스템과 DBMS를 구매하는 것이 부담되었던 중견 기업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오라클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행운도 뒤따랐다. 정작 SQL을 개발한 IBM은 SQL을 활용한 제대로 된 DBMS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 몇 년 동안 연구 및 개발을 진행했다. 반면 엘리슨과 오라클은 완벽한 제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를 바로 시장에 출시했다.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는 지금 기준으로 살펴보면 함량 미달의 제품이었다. 소프트웨어에는 버그가 가득했고 당연히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해당 기업 시스템에 맞는 강력한 최적화를 진행해야 간신히 이용할 수 있었다.

유일한 장점은 어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접목할 수 있는 DBMS라는 점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시장에 그만큼 큰 DBMS 수요가 존재했던 것이다. 오라클은 매년 지속적으로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버전업을 진행했고, 1988년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6'가 되어서야 간신히 경쟁사와 대등한 수준의 안정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초창기 DBMS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엘리슨이 취한 전략은 고객의 수요에 맞춰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제품을 시장에 출시한 후 문제점을 차근차근 개선해나가는 것이었다. 한 번 도입하면 교체가 힘든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시장의 특성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이 전략을 통해 오라클은 SQL 시장의 경쟁자인 IBM과 '잉그레스(Interactive Graphics and Retrieval System, SQL의 경쟁 데이터베이스 관리 언어)'를 앞세운 또 다른 경쟁자 '릴레이셔널 테크놀로지'를 제압하고 DBMS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조금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오라클은 기술력보다는 엘리슨의 천재적인 사업감각과 영업력으로 경쟁자를 밀어내고 DBMS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1992년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6 이후 4년 만에 출시한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7으로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과거 200개나 되는 명령어를 사용해야 처리할 수 있었던 작업을 단 하나의 명령어로 해결할 수 있게 해줄 정도로 세련되고 강력한 DBMS였다. 오라클의 강력한 영업력과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7의 성능을 앞세워 오라클의 시장점유율은 나날이 증가했고, 출시 후 4년 만에 오라클의 전체 매출은 15억 달러(1조7047억 원)에서 42억 달러(4조7733억 원)로 상승했다.

물론 오라클의 경쟁자는 꾸준히 등장했다. 첫 번째 경쟁자는 '사이베이스'다. 1990년대 초 사이베이스는 유닉스와 윈도용 DBMS를 개발하며 오라클의 자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두 가지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의 몰락을 자초했다. 1993년 윈도 서버의 시장 규모가 그리 크게 성장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하고 MS에 자사의 윈도 서버용 DBMS 'SQL 서버'를 팔아버렸다. 이어 1996년 회사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파워소프트와 합병을 진행했다가 자금난에 빠져 유닉스 서버용 차세대 DBMS 개발이 늦어졌고 오라클과의 경쟁에서 탈락하고 만다.

두 번째 경쟁자는 '인포믹스'다. 1994년 사이베이스가 몰락한 후 인포믹스는 오라클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3년 동안 오라클과 인포믹스가 벌인 살벌한 경쟁은 실리콘밸리의 주요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1997년 인포믹스가 분식회계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인포믹스의 최고경영자가 감옥에 끌려감에 따라 인포믹스 역시 오라클과의 경쟁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내홍에 시달리던 인포믹스는 결국 2001년 IBM에게 인수합병당했다.

DBMS 시장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엘리슨과 오라클은 2010년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74억 달러(8조4101억 원)에 인수하면서 실리콘밸리에 파문을 일으켰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원래 유닉스 서버인 '스팍'으로 유명한 회사다. 오라클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한 것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하드웨어 회사를 인수한 것인 동시에 IT 시장의 주도권이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엘리슨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물간 유닉스 서버 사업 따위가 아니라 인터넷 업계의 표준 프로그래밍 언어로 떠오르고 있던 자바와 오픈소스 DBMS의 표준인 MySQL을 얻기 위해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한 것이다. 실제로 2009년 엘리슨은 자바와 MySQL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했다. 두 가지를 확보함으로써 엘리슨과 오라클은 인터넷 업계 전반과 오픈소스 DBMS 진영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오라클, 래리 엘리슨과 MS, 구글과의 악연

엘리슨은 실리콘밸리의 독설가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엘리슨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사악한 독점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와 그 수장인 빌 게이츠와 대립각을 세우고, '남의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가져다 쓰는 나쁜 기업' 구글과 그 회장인 에릭 슈미트를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황야에서 고난을 겪은 이 시대의 진정한 혁신가' 스티브 잡스와는 절친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설하면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지만, 엘리슨 역시 그의 친구 잡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경쟁사를 상대로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었다.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주와 MS, 구글과의 악연은 유명하다. 엘리슨과 오라클은 1990년대에는 반 MS의 선봉에 섰고, 2010년대에 들어서는 반 구글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엘리슨은 대체 왜 이들과 대립 각을 세우는 걸까?

래리 엘리슨<출처: 비즈니스인사이트>

일단 MS와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는 명백하다. MS가 오라클의 유력한 경쟁사이기 때문이다. 한때 운영체제만 개발하던 MS는 1990년대 초 서버용 운영체제와 이 운영체제를 위한 DBMS를 개발하며 오라클이 지배하던 DBMS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MS는 한때 오라클의 경쟁자였던 사이베이스로부터 DBMS 원천 기술을 획득한 후 MS SQL을 개발해 DBMS 시장에 뛰어들었다. 윈도 서버와 MS SQL은 한때 오라클의 주력 사업이었던 중소기업용 DBMS 시장에서 세를 넓히며 엘리슨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엘리슨과 오라클이 처음 MS를 상대로 취한 전략을 맞불 놓기였다. MS가 우리의 주력 사업인 DBMS에 진출했으니, 우리도 그들의 주력 사업인 개인용 컴퓨터에 진출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엘리슨이 꺼내든 카드는 PC(퍼스널 컴퓨터)에 대응하기 위한 NC(네트워크 컴퓨터)였다. 윈도 95가 시장에 출시되고 10일 후 파리에서 열린 유럽정보기술포럼에서 엘리슨은 NC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중앙의 대용량 고성능 슈퍼컴퓨터와 가정의 단말기를 인터넷으로 연결해, 개인이 저렴한 가격으로도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젝트였다. 연결의 매개체는 마크 안드레센이 개발한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라고 설명했다. 엘리슨은 수천 달러에 이르는 고가의 PC와 윈도 대신 오라클이 개발한 500달러 내외의 NC를 이용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에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VDI(가상 데스크탑)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 상용화된 기술이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개념이었다. 엘리슨은 NC를 통해 사람들이 오라클의 소프트웨어와 DBMS를 더욱 많이 이용하게 되길 꿈꿨다.

하지만 구리선으로 연결되던 당시 네트워크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나간 생각이었다. 게다가 PC의 지속적인 가격 인하와 놀라울 정도로 편리한 윈도 운영체제 앞에 NC의 꿈은 무참히 부스러졌다. 엘리슨과 오라클조차도 이러한 PC와 윈도의 인기에 밀려 NC를 상용화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용자가 오늘날 VDI와 클라우드 컴퓨팅의 기초 개념을 엘리슨이 제안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빌 게이츠는 엘리슨이 제안한 NC를 두고 "앞으로도 PC가 계속 시장을 지배할 것입니다. (엘리슨은) NC를 이용하면 소프트웨어를 구매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의문입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맞불 놓기가 실패하자 그다음으로 꺼낸 전략이 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엘리슨과 오라클은 2000년 MS가 반독점 소송에 직면하자 가장 열정적으로 증인으로 나서 MS의 독점 행위를 고발했다. 다른 기업이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미칠까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을 거부한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 심지어 엘리슨과 오라클은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MS 파트너사의 휴지통을 뒤져 증거를 수집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때 엘리슨은 "MS와 빌 게이츠가 SW 시장을 독점함에 따라 정보 기술의 혁신이 가로막히고 있다"고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 전략은 실패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고발로 엘리슨과 오라클의 이미지는 경쟁사의 휴지통을 뒤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회사로 추락했고, 빌 게이츠와 MS는 이러한 오라클의 행보를 두고 정부와 경쟁 기업이 손잡고 MS에게 독점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있다고 반격했다.

엘리슨과 오라클은 2010년대에 들어 구글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구글이 오라클의 보유한 자바 관련 지적재산을 무단으로 침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다. 구글이 세계 최대의 인터넷 업체이고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한 업체임에도 오라클의 DBMS를 쓰지 않는 기업이라는 것이 엘리슨과 오라클이 소송을 제기한 진짜 이유라는 분석이다.

래리 엘리슨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0년 8월 오라클은 구글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개발하면서 오라클이 보유한 자바 37종의 API 지적 재산을 침해했으며 이에 대한 침해를 즉각 중단하고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글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지적 재산을 침해했으며,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지적 재산에 대한 권리를 회사를 인수한 오라클이 보유하고 있으니 오라클의 지적 재산을 침해한 것이라는 논리다.

소송을 제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슨은 미국 CBS 방송에 출연해 구글과의 특허 분쟁을 언급했다. "구글이 오라클의 것을 그냥 가져다 썼다. 구글이 한 일은 절대적으로 사악한 일이다"고 말했다. 이는 한때 구글의 슬로건이었던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를 정면으로 비꼰 것이다.

원래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구글이 자사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글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DBMS 기술이었던 MySQL의 최대 이용 업체인 만큼 언젠가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장비를 대량 구매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한 오라클 입장에선 오라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지 않는 구글을 봐줄 이유가 없다.

때문에 엘리슨은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자마자 바로 구글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길고 지루한 소송은 엎치락뒤치락하며 7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중간에 양측의 CEO가 만나 합의점을 찾으려 하기도 했지만 결국 결렬됐다. (엘리슨과 래리 페이지가 만난 것은 아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구글은 안드로이드에 적용된 자바 기술을 제거하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개발 언어를 자바에서 코틀린으로 변경했다. 또한 오라클의 입김이 세진 오픈소스 DBMS MySQL 대신 새로운 오픈소스 DBMS '마리아DB'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등 오라클이 보유한 기술과 거리를 점점 벌리고 있다. 두 회사의 대립은 점점 더 격렬해질 전망이다.

한편 미국의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에서는 이렇게 지속적으로 소송에 휘말리는 오라클의 행보를 두고 개발 인력보다 법조 인력을 더 많이 보유한 IT 회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와의 남다른 인연

'독설가' 엘리슨과 독설을 던지기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는 남다른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도중 엘리슨을 만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브 잡스가 조깅 도중 바로 옆에 살던 엘리슨의 자택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 엘리슨을 만날 수 있었다.

애플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와 래리 엘리슨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입양아, 젊은 시절의 방황, 조금은 독단적인 경영방식, 일본 문화에 심취한점 등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엘리슨 역시 잡스와 마찬가지로 입양아였는데, 입양아라는 사실자체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둘의 양부모가 친부모보다 더한 사랑으로 잡스와 엘리슨을키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둘은 양부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에 나섰다. 양자라는 자격지심이 이른 창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공통된 경험이 훗날 둘을 절친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엘리슨은 한때 스티브 잡스에게 자신의 돈으로 다시 애플을 되찾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친밀하게지냈다. 애플이 경영위기에 빠지자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엘리슨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지만, 결국 애플 이사회가 스티브 잡스를 다시 최고경영자로 불러들이면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후에도 둘은 같이 엘리슨의 보트를 타고 회사 경영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등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별세하자 엘리슨은 잡스를 두고 "그는 우리의 에디슨이자 피카소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재적인 발명가다"라며 "현재의 애플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잡스의 후임인 팀 쿡도 좋아한다. 애플 내부에도 재주 있는 인력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티브잡스는 대체가 불가능한 천재였다"고 평가했다.

스티브 잡스 사후 그의 친동생인 모나 심슨의 주도로 열린 비공개 추모회에 엘리슨은 빌 게이츠, 마이클 델 등과 함께 참석해 오랜 친우를 기렸다.

미국의 언론은 이러한 엘리슨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를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를 엘리슨이 추종한것이라고 평가했다. 엘리슨은 늘 스티브 잡스를 닮고 싶어 했다. 그의 카리스마 있는 발언과 놀라운 언론 장악력을 지속적으로 벤치마킹했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 방황하던 젊은이에게 도움을 주었고, 이후에도 회사 운영 경험이 더 많은 선배로서경영에 관한 많은 조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서로를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엘리슨의 기행과 선행

전 세계에서 손 꼽히는 부자인 래리 엘리슨은 씀씀이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많은 자동차, 요트, 비행기, 저택을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엘리슨은 하와이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라나이섬 부동산의 98%를 보유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섬 하나를 통째로 사들인 것이다. 이 섬으로 원활하게 이동하기 위해 작은 항공사를 매입하기도 했다. 건조에만 2억 달러(2270억 원)가 들어간 전 세계에서 8번째로 큰 요트 '라이징 선'을 보유하고 있다가 매각하기도 했다. 수많은 제트기를 보유하고 있고, 비행 면허가 있어 직접 조종하기도 했다.

구글 맵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와이 대표 섬 중 하나인 리나이섬. 이 섬 대부분의 부동산이 래리 엘리슨의 것이라고 한다

2000년 새너제이 공항에서 심야 이륙 금지 규정을 어기고 이탈리안 마르체티 제트기를 몰다가 소음 억제법 위반이라는 지적을 받자 이 법을 시정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용기인 미그-29기를 구매하기도 했는데, 법에 걸려 미국에 가져오지는 못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에 있는 그의 자택은 일본식 디자인이 도입되어 있다. 1억1000만 달러(1248억 원)에 이르는 이 대저택은 북미 최대의 일본식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자택 외에도 엘리슨은 캘리포니아 란초 미라지, 말리부 해변 카본비치 등에 수십 채에 이르는 자택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엘리슨이 역시 가장 수집에 공을 들이는 것은 요트다. 그는 요트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아메리카컵 경주에 참여하는 요트경주팀을 운영하고 있다. 오라클의 비용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래리 엘리슨이라는 개인의 비용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요트 팀의 이름은 오라클이다. 이 요트팀의 배는 BMW의 제작품으로 개당 800만 달러(90억 원)에 이른다. 심지어 엘리슨은 과거 아메리카컵 요트 경주에 미디어 업계의 거물 루퍼트 머독과 함께 '사요나라(일본어: 안녕히 가십시오)'를 이끌고 선수로 직접 참여해 우승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라클 요트팀이 아메리카컵 결승에 진출하자 이를 관전하기 위해 오라클 오픈월드 2013의 키노트 기조 연설자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아 6만 명에 이르는 고객과 파트너들에게 물을 먹인 적도 있었다.

오라클

여성 편력도 유명하다.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을 반복했고, 애인이었던 오라클의 전 직원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본인 역시 플레이보이임을 외적으로 거리낌 없이 과시하고 있다. 그의 아들과 딸은 이러한 아버지와 오라클에게 거리를 두고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마냥 인색하게 산 것은 아니다. 엘리슨은 지금까지 전 재산의 1% 이상(약 6억 달러)을 기부했고, 죽기 전에 자산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내놓는 '기부 서약'에도 동의했다. 기부 서약은 2010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전 세계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운동이다. 특히 의료 연구에 대한 기부에 적극적이다. 캘리포니아 의대에 5000만 달러(567억 원)를 기부해 엘리슨의 이름을 딴 정형외과 연구센터가 세워지기도 했고, 2016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 암 치료 센터에 2억 달러(2270억 원)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회장님의 이유 있는 말 바꾸기

특정 회사가 서비스나 제품을 발표할 때에는 경쟁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서로 얼굴 찌푸리는 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기서 래리 엘리슨은 예외다. 절친이었던 스티브 잡스처럼 엘리슨 역시 경쟁사와 경쟁사의 기술을 서슴없이 언급하며 비판하고 있다. 새로운 서버를 출시하며 IBM의 서버보다 성능이 떨어지면 100억 원을 보상하겠다고 큰 소리친 것이나, 오라클 클라우드의 가격이 업계에서 제일 저렴하며 AWS(아마존웹서비스)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말도 사실 자주 바꾸는 편이다. 2009년 엘리슨은 클라우드는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며 제대로 된 사업 모델이 될 수 없다고 AWS를 비판했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본인이 클라우드 전도사를 자처하며 오라클이 DBMS 기업에서 클라우드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클라우드 기업인 넷스위트 인수를 본인이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오라클이 넷스위트 인수를 위해 투입한 비용은 93억 달러(10조5555억 원)로,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인수보다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한 오라클 역사상 가장 큰 인수합병 사례다. 또한 멀티테넌트 기반의 CRM 업체인 세일즈포스를 비판하며 "멀티테넌트는 끔찍한 기술이다. 오라클의 소프트웨어 서비스는 싱글테넌트로 만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멀티테넌트란 하나의 소프트웨어나 데이터베이스를 여러 고객이 사용하는 기술로, 클라우드 기반 소프트웨어 서비스(SaaS)의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현재 오라클의 주력 상품인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12c'의 핵심 기술이 멀티테넌트이며, 오라클 클라우드에서 제공되는 SaaS 역시 멀티테넌트를 이용하고 있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엘리슨이 경쟁사를 비판하고,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오라클의 경쟁사를 견제하고, 오라클의 미래를 위해 서슴없이 말을 뒤집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래리 엘리슨과 오라클은 하나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라클의 영원한 회장님은 경쟁사를 비판하고 말을 뒤집어 가면서 오라클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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