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은 삐삐 수준”…구글·삼성이 애플 망신 주는 이유는?

권택경 tk@itdonga.com

[IT동아 권택경 기자] “혁신을 기다리고 있으신가요? 아이페이저(iPager)를 만날 시간입니다”

지난달 22일 구글이 안드로이드 유튜브 공식 계정에 게재한 영상에 등장하는 문구다. 마치 애플의 신제품 발표 영상을 연상시키지만, 등장하는 제품은 최첨단 스마트폰과는 거리가 멀다. 페이저(Pager)는 휴대전화 보급 이전에 널리 쓰였던 무선호출기, 즉 삐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애플이 아직 무선호출기 수준의 낡은 기술에 머물고 있다고 꼬집는 패러디 영상인 셈이다.

해당 영상은 구글의 ‘문자받아(GetTheMessage)’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애플에 RCS(Rich Communication Services) 도입을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구글이 지난해부터 펼치고 있는 캠페인이다.

출처=안드로이드 공식 유튜브
출처=안드로이드 공식 유튜브

RCS는 단문만 보낼 수 있는 SMS, 저화질 사진과 영상만 전송되는 MMS 등 기존 낡은 문자메시지 규격을 대체하는 차세대 문자메시지 규격이다. 전세계이동통신협의회(GSMA)가 표준을 마련한 뒤로 세계 각국 주요 이동통신사, 스마트폰 제조사와 더불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RCS 생태계에 동참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와 이통3사가 RCS를 지원 중이다.

RCS는 최대 100명이 참여하는 단체 대화, 메시지 수신 여부 확인, ‘좋아요’와 같은 공감 표시 혹은 감정 표현 기능 등을 지원한다. 사진, 영상도 기존MMS 방식보다 훨씬 높은 화질로 전송할 수 있다. 카카오톡이나 왓츠앱에서나 가능했을 기능을 문자메시지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플은 RCS 생태계 참여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아이폰 이용자 간의 메시지 서비스인 아이메시지를 통해 강력한 록인(Lock-in) 효과를 누리고 있는 애플 입장에선 굳이 RCS를 도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폰 점유율이 높은 미국에서 아이메시지의 폐쇄적 생태계는 이른바 ‘초록 말풍선’ 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이폰 이용자끼리 메시지를 주고받으면 아이메시지라는 의미로 파란 말풍선이 뜨지만, 상대가 안드로이드 이용자라면 일반 문자메시지를 뜻하는 초록 말풍선으로 표시되는 데서 비롯된 표현이다.

애플 아이메시지 / 출처=셔터스톡
애플 아이메시지 / 출처=셔터스톡

만약 단체 대화에 안드로이드 이용자가 참여하면 아이메시지가 아닌 일반 문자메시지로 전환되기 때문에 아이메시지가 제공하는 여러 편의 기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10대처럼 또래문화가 강한 집단에서는 안드로이드 이용자를 배척하거나 멸시하는 분위기까지 생기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아이폰 선호 현상을 더욱 가속하기 때문에 애플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상황이다. 미국 매체 더버지는 “애플은 지난 수년간 서서히 초록 말풍선을 열등한 메시지처럼 느끼게 했다”면서 이러한 애플의 전략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지적한다.

구글이 캠페인까지 전개하면서 애플의 RCS 도입을 촉구하는 건 ‘초록 말풍선’ 문제가 안드로이드의 문제가 아니라 애플의 문제임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안드로이드가 열등한 게 아니라, RCS를 도입하지 않은 애플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것이다.

구글은 지난 5월 열린 구글 연례 개발자 회의 I/O에서도 애플의 행보를 겨냥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사미르 사마트(Sameer Samat) 구글 제품 관리 담당 부사장은 “우린 모든 스마트폰 운영체제가 메시지를 받고 RCS를 채택하길 바란다”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장치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단체 대화방에서 어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또한 구글의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삼성전자 미국 법인은 지난 10일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애플 이용자와 안드로이드 이용자를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주인공에 빗대어 표현했다. 이 영상에서도 애플은 줄리엣을 로미오와 만나게 하지 못하는 부모님에 비유된다.

국내 이통사들도 2019년부터 '채팅플러스'라는 이름으로 RCS 기반 문자메시지를 서비스 중이다 / 출처=SK텔레콤
국내 이통사들도 2019년부터 '채팅플러스'라는 이름으로 RCS 기반 문자메시지를 서비스 중이다 / 출처=SK텔레콤

경쟁사들의 망신 주기에도 애플은 여전히 꿈쩍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큰 변수는 유럽연합의 디지털시장법(DMA)이다. 아이메시지가 디지털시장법의 규제 대상에 포함될 경우, RCS 호환 기능을 넣는 등 상호운용성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EU는 아이메시지가 규제 대상에 포함될 요건을 충족한다고 보고 있지만, 애플이 이에 반발하며 이의를 제기함에 따라 추가 조사가 진행 중이다.

다만 RCS 확산이 지지부진한 걸 애플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무리가 있다. 표준 규격이라고는 하나 아직 기기나 이통사 간의 호환이 완벽하지 않은 등 RCS 규격 자체에도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매체 디지털트렌드는 “구글에는 미안하지만, 애플이 RCS를 계속 무시하는 건 옳다”면서 “RCS는 여전히 엉망”이라고 꼬집었다. 매체는 “RCS가 명목상으로는 이통사 주도 표준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구글 서버를 통해 실행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구글은 RCS의 장점으로 종단간 암호화 기능을 들고 있지만, 이는 RCS 자체 기능이 아니라 구글 메시지 앱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이동통신망 기반 문자메시지가 아닌 카카오톡, 왓츠앱과 같은 인터넷망 기반 메신저 앱을 활용하기 때문에 차세대 문자메시지 규격에 대한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하는 점도 RCS 생태계가 크게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안드로이드 전문 매체 안드로이드 폴리스가 지난해 1월 이용자 6328명을 대상으로 RCS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사용하냐고 설문한 결과, 왓츠앱이나 메타의 메신저 등 다른 앱을 쓰기 때문에 RCS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32%로 가장 많았다. 국내에서도 이통3사가 지난 2019년 RCS 기반 문자메시지 서비스인 ‘채팅플러스’를 출시했지만 아직 인지도는 높지 않은 실정이다.

RCS 확산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애플이 아니라 왓츠앱, 카카오톡 등 메신저 앱일 수 있다 / 출처=셔터스톡
RCS 확산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애플이 아니라 왓츠앱, 카카오톡 등 메신저 앱일 수 있다 / 출처=셔터스톡

팀 쿡(Tim Cook) 애플 CEO도 RCS 도입을 검토하지 않는 이유로 이용자 요구가 없다는 점을 든다. 지난해 미국 매체 복스(Vox)와의 인터뷰에서 팀 쿡은 “현재로서는 우리 이용자들로부터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으라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메신저 앱이 이동통신망 기반의 문자메시지를 완전히 대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 사건에서 보듯, 사실상 국가 기반 인프라 역할을 하는 메시지망을 일반 사기업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카카오 화재 사건을 계기로 RCS가 대체재로 확산될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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