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일군 꽃 - FX기어 기술이사 최광진 공학박사
국내 제조산업은 전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의 휴대폰 판매량은 세계 1, 2위를 다투며,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국내 자동차도 유럽, 미국 등에 수출되어 점차 영향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리고 가전제품, 노트북 등도 전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국내 반도체 산업은 전세계에서도 굳건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조선업은 어떤가. 지금도 우리나라가 생산한 대형 컨테이너선, 대형 크루즈 등이 바다 위를 누비고 있다. 하지만, 유독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은 제자리 걸음이다.
애플은 모바일 운영체제 iOS로 스마트폰 시장을 재편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는 PC 운영체제 윈도 시리즈로 시장을 장악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문서 프로그램은 MS의 워드이며, 업무 용도로 사용하는 프로그램 역시 MS의 오피스이다. 어도비의 포토샵은 유명한 그래픽 소프트웨어이며, 오토데스크의 여러 3D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는 산업 전반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중 국내 소프트웨어는 단 하나도 없다.
국내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국내 시장의 여건에 한숨부터 내쉰다. 여건은 둘째 문제다. 국내 사용자들의 인식도 제자리다.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일지라도 국내 사용자의 대부분은 제 값 주고 구매하지 않는다. 최근에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가 대부분이다. 윈도7 프로페셔널의 정가가 359,000원이라는 것을 아는 사용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저 마우스 클릭 몇 번을 통해 불법 복제 된 프로그램을 내려받고 설치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FX기어’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를 아십니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FX기어’라는 작은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있다. 총 직원은 약 20명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그 외의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5명 정도다. 그런 회사가 지난 2005년부터 드래곤 길들이기, 쿵푸팬더, 슈렉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드림웍스에 컴퓨터그래픽(이하 CG)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새 7년째다. 가히 맨 땅에서 노력 하나로 일궈낸 결실이라 할만하다.
이에 IT동아는 FX기어에서 기술이사를 담당하고 있는 최광진 공학박사(이하 최 이사)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T동아: 미안하지만, FX기어라는 회사 이름 자체가 낯설다. 본 기자 아니, 많은 일반인들에게 FX기어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최 이사: 먼저 FX기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된 계기부터 얘기를 하고 싶다. 2004년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 의상관련 3D 시뮬레이션을 논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3D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영상을 당시 시그라프(SIGGRAPH, 시그라프는 1974년부터 개최된 컴퓨터그래픽 박람회다. 세계 각국의 관련 논문이 발표되는 행사로 게임 박람회에 E3, 자동차 박람회에 제네바 모터쇼 등이 있다면, CG 박람회에는 시그라프가 있다)에서 발표했었다. 이 곳에서 업계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웃음).
여담이지만, 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학생 신분이었다. 해외에서 동양인을 보면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게 어리게 본다고 하지 않은가. 덩치도 작은 동양인 학생이 와서 자기네들의 생각보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발표하던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일을 지금도 기억해 주는 이들이 많다.
IT동아: 그렇게 FX기어를 만들게 된 것인가.
최 이사: 업계 관계자들의 높은 호응 이후, ‘의상 3D 시뮬레이션을 상용화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냥 부딪혔다. 무작정 디즈니 애니메이션, 픽사, 소니컴퓨터 애니메이션 등에 방문해 소프트웨어를 보여줬다. 이게 나름 소문이 났다. 그렇게 발로 뛰다가 지난 2005년, 디즈니에서 최초로 구매의사를 전해왔다. 하지만, 당시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계약이 중단됐다. 그 때 드림웍스에서 연락이 왔다. 방문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다(웃음). 그렇게 드림웍스와 만나게 되었고, 2007년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에는 FX기어의 3D CG 소프트웨어가 사용됐다. 슈렉3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입고 있는 옷은 우리의 기술로 제작된 것이다. 슈렉3, 슈렉4, 몬스터VS에일리언, 드래곤 길들이기 등이 있다. 아, 최근에 개봉한 마다가스카3에도 우리 기술이 들어가 있다.
IT동아: 드림웍스에 제공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최 이사: 퀄로스(Qualoth)와 FX헤어(FXHair)다. 각각 의류와 머리카락을 표현해주는 CG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다. 퀄로스는 의류의 움직임과 주름 및 재질 등을 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천의 움직임 등을 실제와 같게 표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FX헤어는 캐릭터의 머리카락을 각각의 머리 스타일에 따라 흩날리는 표현을 다르게 적용하는 기술이다. 바람과 같은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대한 상호작용까지 고려되었다.
퀄로스의 데모 영상은 http://www.qualoth.com/gallery.asp?swf=qualothdemo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월 15일 개봉한 영화 ‘금의위: 14검의 비밀’에도 퀄로스 기술이 적용되었다. 주인공 견자단이 빠른 움직임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공중에 벗어두는 영상 장면인데, 여기에 퀄로스 기술이 적용되었다.
FX헤어의 데모 영상은 http://www.qualoth.com/gallery.asp?swf=c_nike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이키CF ‘불사조의 전설(Legend of Phoenix)’편인데, 아마 영상을 보면 ‘아~. 이거?’라고 기억할 수 있으리라. 2008년도에 나이키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박지성 축구화를 만든 기념으로 제작되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상이다.
IT동아: 국내 CG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글로벌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드림웍스에 관련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제공해오고 있다고 했는데, 다른 업체는 없는지 궁금하다.
최 이사: 당연히 있다(웃음). 특히, 게임 개발사들과 활발한 교류 중이다. NC소프트, 라이언 게임즈, 스마일 게이트의 몇몇 스튜디오에 FX기어의 CG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있다. NC소프트와의 일화가 떠오른다. 당시 NC소프트 리니지3 개발팀에 옷을 표현하는 3D CG 소프트웨어 ‘이지클로스(ezCloth)’를 지원했다. 그 이전에는 모든 것을 손으로 직접 그리는 시스템이라 작업 속도 및 작업량 등이 상당했다. 이후 이 기술은 아이온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옷에 적용된 것.
IT동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 기술 지원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 것인가? 전문가 입장에서는 너무 기초적인 질문일 것 같지만, 아마 대다수의 일반인도 궁금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최 이사: 드림웍스의 경우는 사이트라이센스 계약이다. 드림웍스의 사이트에 FX기어의 기술을 모두 제공하는 것이다.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있는데, 일종의 기술 지원비다. 상대방이 추가하고자 하는 기능이나 버그 등이 발견되었을 때 그에 대한 기능 추가나 해결방법을 찾아 업데이트를 제공한다.
초기 드림웍스와 주고받은 이메일만 1년에 약 500통 정도 된다. 하루에 1통 이상의 메일이 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까지 많이 주고받지 않는다(웃음). 이메일은 대부분 버그 리포트다. ‘이것이 안되더라, 이런 것 좀 추가해달라’라는 것들이다.
한가지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프로그램이나 소프트웨어에 완벽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버그가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개발자들 사이에 하는 농담 중 ‘버그가 없는 것이 버그’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어떤 소프트웨어에 버그가 없다는 뜻은 아무도 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쓸수록 버그는 많이 발견된다. 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바로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하는 일이다. 사용자의 불만이 생겼을 때 빨리 대처해 안정화하는 것이다.
IT동아: 말을 듣다 보니 ‘쉬운 일은 없다’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새삼 떠오른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답변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국내외에서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다. 아니,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것 자체에 제대로 인정은 해주는지 모르겠다. 해외와 비교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하다.
최 이사: (지금까지 시종일관 웃음을 띄고 있던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도 오히려 국내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는 것에 냉소한 반응을 보인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초창기 FX기어의 CG 소프트웨어를 인정받은 것은 해외에서였다. 그리고 해외에서 인정받자 다시 국내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국내의 기업은 국내에서 이런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상스럽게도 그렇다. 더 비싼 해외의 제품을 사용한다. 해외에서는 정작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데 말이다.
국내의 업체는 이상하게 네임 밸류, 브랜드 등을 우선시한다. 소프트웨어에 투자한다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건물과 같은 부동산이나 전체 시스템 구축 등에 투자를 더 많이 한다. 그래서 해외보다 국내에서 영업하기가 더 힘들었다.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기술을 있는 그대로 봐준다. 누가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요즘은 국내 게임 업계를 중심으로 점차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상당히 고무적이고, 기운도 난다. 비싼 해외 게임 엔진, 물리 엔진 등을 직접 구매해서 게임을 개발하고 운영하다 보니 소프트웨어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전세계적으로도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다른 업체에게 제공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IT동아: 대화를 하다 보니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의 아버지라 불리는 ‘앤디 루빈’이, 처음 구글이 아닌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들고 갔었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잠시 침묵) FX기어가 새로 개발하는 소프트웨어는 무엇이 있나.
최 이사: 퀄로스, FX헤어, 이지클로스 이외에 ‘플럭스(Flux)’라는 유체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유체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해서 그렇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액체의 흐름을 CG로 구현하는 것이다. 영화 2012에서 히말라야 산을 뒤덮는 거대한 해일 장면 등을 상상하면 된다.
CG로 물방울 하나 하나의 움직임은 모두 데이터로 처리되는데, 쓰나미나 파도와 같은 유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해야 한다. 최근 들어 CG를 이용하는 시각효과 분야에서 쓰나미나 폭발에 의한 화염과 같은 대규모 유체 시뮬레이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지고 있으며, 유체 효과의 사실성과 세밀함에 대한 눈높이 역시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대규모의 유체를 CG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해상도의 대용량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계산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외산 상용 소프트웨어에만 의존했던 국내 스튜디오는 대규모 유체를 표현하기 위한 방대한 데이터를 감당할 수 있는 인하우스(in- house) 기술이나 소프트웨어가 없다. 2010년, 유체 CG로 큰 호평을 받았던 영화 ‘해운대’ 역시 해일과 쓰나미를 표현하기 위해 350만 달러를 들여 할리우드의 기술을 빌릴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FX기어가 이번에 개발한 플럭스는 큰 용량의 데이터를 분산병렬데이터 처리한다. 분산병렬데이터 처리를 쉽게 말하면 여러 대의 PC를 이용해 큰 데이터를 분산해 처리하는 것이다. 기존 유체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도 이 기능을 지원하긴 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이를 더 개발해낸 것이 플럭스다. 올해 ‘2012 시그라프’에서 플럭스를 전세계에 공개할 예정이다. 자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있다.
최근에는 전세계 1위 프로세서 제조사인 인텔과도 분산병렬처리 프로그램에 대해 상호기술협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인텔의 CTO가 직접 전화를 줘서 놀랬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IT동아: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
최 이사: 일단 FX기어를 성장시켜서 세계 제일의 CG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되는 것이다(웃음). 그게 우선 당면과제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CG 소프트웨어는 B2B 시장에 치중되어 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정 부분의 CG 소프트웨어를 B2C 서비스에도 적용하려고 생각 중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아바타를 3D로 만들어 옷이나 안경, 시계, 신발 등을 직접 입혀보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옷을 구매할 때 자신의 아바타에게 직접 입혀보고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바타는 실제 개인의 모습과 똑같이 제공한다. 실제 FX아바타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현재 많은 업체와 협의 중에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서 막을 내린 ‘월드 IT 쇼’에서 이 소프트웨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 기능은 약 10년 전에 먼저 구상했었다. 당시에 ‘이런 것은 10년 후에나 가능하겠구나’라고 예상했었다. 이제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런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나이키, 아이다스, 루이비통 등 신발, 옷, 안경 등 패션 시장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만간 상용화된 3D CG 소프트웨어를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
FX기어 최광진 이사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냈다. 사실, 본 기자는 방문하기 전에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그동안 엔지니어 즉, 기술자와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으레 이번에도 기술적인 얘기들로 점철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최 이사의 약력을 보고 나서 이 생각은 확신에 굳었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공학박사라니. 고리타분한 얘기가 나와도 잘 듣고 이해하자’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일반인이 상상하는 ‘고리타분한 공학도’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끝내고 주변에서 간단히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혹시 모른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FX기어의 CG 소프트웨어가 사용되었다는 재미있는 뉴스가 찾아올지도.
글 / IT동아 권명관(tornadosn@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