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로 인쇄한 문서, 깨끗이 지워 또 쓴다고?
저탄소 녹색성장이다 뭐다 여기저기서 에너지 절약이 한창인데, 사무용지 낭비 문제는 여전한 골칫거리다. 회의가 끝나면 수많은 인쇄물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중 일부는 이면지 보관함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마저도 재활용 빈도는 그리 높지 않은 수준. 그나마 제 할 일을 다 한 인쇄물은 양반이다. 실수로 잘못 인쇄한 문서나 인쇄 날짜만 달랑 찍힌 마지막 장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처럼 낭비되는 사무용지로 한 달에 수백만 원을 지출하는 기업이 한 둘이 아니다.
만일 이미 인쇄한 문서를 깨끗이 지워 백지로 만들 수 있다면, 사무용지 낭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용지의 외관만 온전하다면 인쇄하고 지우고 또 인쇄하고 지우는 방식으로 재활용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비용 절약은 물론이고 환경 보호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러한 프린터가 조만간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난 2012년 3월 15일(북미 현지시간), LA타임즈, BBC 등 주요 외신들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과학자들이 사무용지에서 토너를 증발시켜서 백지로 만드는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일명 ‘레이저 언프린터(Laser unprinter)’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레이저 광선을 나노 초(10억 분의 1초) 단위의 진동으로 쏘아서 종이에 점착된 토너 가루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프린터 토너는 대부분 탄소와 플라스틱 고분자화합물로 구성되는데, 이 중 고분자화합물을 증발시킬 수 있다는 것. 개발을 주도하는 레알 아얄라(Leal-Ayala) 박사와 연구진은 자외선부터 적외선에 이르는 전 범위의 레이저 광선을 각기 다른 속도로 쏘는 실험을 실시했고, 마침내 토너를 완벽히 제거하는 ‘녹색 레이저 진동(green laser pulses)’을 찾아냈다. 이들은 “이렇게 언프린터된 사무용지는 전혀 손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새 것과 다를 게 없다”라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이 기술을 기반으로 사무실용 시연 모델 개발에 들어갔다. 현재 예상 비용은 대당 약 19,000파운드(한화 약 3,400만 원)가 될 것이라는 평가다. 연구진은 “당장은 다른 재활용 방식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에서 꺼릴 수 있겠지만, 양산 단계에 접어들면 단가는 내려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수 토너 아닌 일반 토너를 제거한다는 점이 핵심
물론 이와 비슷한 프린터가 이전에도 존재했다. 2010년 일본 전자업체 산와 뉴텍은 전용 플라스틱 용지를 사용하는 프린터 ‘RP-3100’을 개발한 적이 있다. 이 프린터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용지는 최대 1,000회까지 재활용할 수 있는데, 장당 가격이 무려 3.35달러(한화 약 3,800원)에 달해 외면을 받았다. 더욱이 흑백인쇄만 가능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2012년 3월에는 도시바가 비슷한 프린터를 선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토너를 지울 수 있는 프린터는 아니고, 지울 수 있는 토너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는 마찰력을 이용한 방식으로, 흔히 지워지는 볼펜으로 알려진 ‘프릭시온 볼(Frixion Ball)’ 볼펜의 기술을 빌려온 것이다. 도시바에 따르면 이 프린터는 최대 5번까지 용지를 재활용할 수 있으며, 5번이 넘어간 용지는 별도의 용지함으로 자동 옮겨진다고 한다. 현재 푸른색 잉크만 사용할 수 있지만 곧 다른 색상의 잉크도 지원할 예정이며, 상용화 목표는 2012년 하반기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용 용지 또는 전용 토너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다른 프린터로 인쇄한 문서는 백지로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점을 보였다. 호환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사무실의 모든 프린터를 해당 프린터로 전면 교체하지 않으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에 반해 캠브리지 대학의 기술은 보통 용지와 보통 토너를 사용한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저렴한 비용에 상용화만 성공한다면, 앞선 어떤 사무용지 재활용 방법보다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점쳐진다.
빌 게이츠는 저서 ‘생각의 속도’에서 종이 없는 사무실(Paperless Office)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전자문서가 종이문서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의 예측이 일부 실현된 것은 맞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인쇄물을 찍어내고 있다. 하지만, 종이를 완벽히 재활용할 수 있는 프린터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종이 없는 사무실은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종이 적은 사무실’은 가능하지 않을까.
글 / IT동아 서동민(cromdandy@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