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며 음악 듣는 시대를 열다 - 워크맨(Walkman)
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어디서나 원하는 음악을 편하게 듣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당시 음반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LP레코드는 매체 및 재생기의 크기가 워낙 커서 애당초 휴대용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62년에 네덜란드의 필립스(Philips)사가 손바닥만한 크기를 가진 카세트 테이프(Cassette Tape)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초기의 카세트 테이프는 음질이 떨어지고 고장이 잦아서 음악 감상용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다만, 녹음이 편하고 휴대가 편하다는 점은 인정을 받았고, 이 때문에 초기의 카세트 테이프는 언론 취재용이나 회의록 녹취용, 어학 교육용와 같은 용도로 주로 쓰였다. 그래서 카세트 테이프를 사용하는 기기들 역시 재생 기능 보다는 녹음 기능을 중시했고, 외부 스피커를 본체에 기본으로 갖춰 녹음한 내용을 곧장 확인할 수 있게끔 한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모두 갖춘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는 당연히 크기가 커질 수 밖에 없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제품의 크기를 줄이는데 한계가 있었다.
발상의 전환이 낳은 희대의 히트상품, ‘소니 워크맨’
하지만 1979년, 일본 소니(Sony)사가 ‘워크맨(Walkman)’을 출시하면서 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워크맨은 이전에 나왔던 카세트 테이프 기기와 달리 녹음 기능이 없는 재생 전용 기기였으며, 자체적으로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스피커도 내장하고 있지 않아 반드시 헤드폰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제품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으며, 모든 기능을 재생에 집중한 결과, 당시의 소형 기기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고음질의 스테레오 음향을 들을 수 있었다.
워크맨 출시 이전에 소니는 프레스맨(Pressman)이라는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판매하고 있었다. 프레스맨은 당시의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 중에서 크기가 가장 작은 제품 중 하나였는데, 소니의 젊은 기술자들은 이를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재생전용으로 개조해 음악을 즐기곤 했다. 소니의 창업자이자 사장인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와 기술 팀장인 쿠로키 야스오(黑木靖夫)는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재생 전용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기기를 개발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워크맨이 소니의 독자 개발 제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소니가 워크맨을 출시하기 7년 전인 1972년, 독일계 브라질인 발명가인 안드레아스 파벨(Andreas Pavel)이 소니의 워크맨과 유사한 컨셉의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재생기를 발명해 각국에 특허를 신청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워크맨 출시 후 파벨은 소니를 상대로 특허권 침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고, 양측은 20년 넘게 지루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결국 2003년, 소니는 파벨에게 일정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게 되었다.
최초의 워크맨인 ‘TPS-L2’ 모델은 1979년 7월에 일본에서 처음 출시되었는데. 가격은 당시의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에 비해 싼 3만 3천엔 이었다. 이렇게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펼 정도로 소니는 이 제품에 걸고 있는 기대가 컸다. 그리고 3만 3천엔이라는 가격에는 소니 창립 33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기존 제품에 비해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워크맨은 출시 초기에는 언론의 혹평을 받았으며, 출시 첫 달에 워크맨은 불과 3천대 정도의 부진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음질이 좋고 사용이 편리하다는 입소문이 점차 퍼지고 여기에 소니의 적극적인 홍보가 더해진 결과, 워크맨은 출시 2개월 만에 초기 생산 물량인 3만 대가 모두 매진되었으며, 이후부터는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Walkman이라는 엉터리 영어가 일반명사가 되기까지
일본 시장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워크맨은 1980년부터 미국 시장을 시작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제품명이었다. 워크맨(Walkman)이라는 이름은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음악을 즐긴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지만, 사실 영어 문법에는 맞지 않는 일본식 조어였다. 그래서 미국판 워크맨은 ‘Sound(음향)’과 ‘Walk about(산책하다)’를 조합한 ‘사운드 어바웃(Sound about)’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에 워크맨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파급력이 워낙 컸고, 해외 정식 출시 이전부터 일본판 워크맨이 해외에 대량으로 유출되어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워크맨이라는 이름은 이미 매우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외 출시 1년도 지나지 않아 소니는 국가에 관계 없이 제품 브랜드를 ‘워크맨’으로 통일하게 된다.
이후 워크맨은 녹음 기능을 갖춘 모델, 라디오 수신 기능을 갖춘 모델 등 다양한 후속 제품이 추가되며 높은 인기를 이어갔다. 초기 제품 출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까지 워크맨 시리즈는 총 5천만 대를 판매했으며, 이로부터 3년이 1992년에는 1억 대를 돌파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를 지켜본 마쓰시타(현재의 파나소닉), 산요, 아이와 등의 경쟁사에서도 소니의 워크맨과 비슷한 유사모델을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소비자들은 제조사와 관계 없이 모든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재생기를 ‘워크맨’이라고 부르곤 했다. 비록 엉터리 영어이긴 했지만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반 명사와 같은 위치까지 오른 것이다. 실제로 1986년부터 영국의 옥스포드 사전에는 워크맨(Walkman)이라는 단어가 등록되었다.
카세트 테이프 시대 이후의 워크맨
워크맨은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음악 재생기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사실은 그 외의 매체를 사용하는 소니의 휴대용 음악 재생기는 전부 워크맨 시리즈에 포함된다. 1984년, 소니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CD(Compact Disc) 재생기인 ‘D-50’을 ‘디스크맨(Discman)’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는데, 디스크맨 시리즈 중에서도 1988년부터는 8cm 소형 CD를 사용하는 일부 모델이 ‘CD워크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부터는 모든 휴대용 CD 플레이어 모델의 제품명이 CD워크맨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1992년에는 당시 차세대 디지털 매체로 떠오르던 ‘MD(MiniDisc)’를 채용한 ‘MD워크맨’의 첫 번째 모델인 ‘MZ-1’이 출시된다. MD는 녹음이 자유로우면서 CD 수준의 음향을 담을 수 있고, 매체의 크기도 작은 것이 특징으로, 우수한 음질과 높은 휴대성, 그리고 편의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MD는 매체 및 재생기의 가격이 비싼데다 소니를 비롯한 일부 일본 업체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어 카세트 테이프나 CD 수준의 보급률에는 이르지 못했다. 특히 MP3 플레이어의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MD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2011년 8월로 MD 워크맨의 생산도 종료되었다.
MP3 시대의 개막과 함께 맞이한 워크맨의 시련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휴대용 음악 재생기 시장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카세트 테이프나 CD, MD가 아닌 디지털 음악 파일을 매체로 사용하는 재생기가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 음악 파일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MP3 형식의 파일이 가장 많이 쓰였기에 디지털 음악 파일 재생기는 통칭 ‘MP3 플레이어’로 불리게 된다. 소니는 MP3 플레이어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음에도 한동안 기존의 워크맨과 CD워크맨, MD워크맨 등, 자사의 기존 사업 영역을 지키는데 여전히 많은 힘을 쏟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소니가 MP3 플레이어 시장을 완전히 등한시 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에 소니는 디지털 음악 파일의 재생이 가능한 ‘네트워크 워크맨(일명 NW워크맨)’의 첫 번째 제품인 ‘NW-MS7’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제품은 타사의 MP3 플레이어와 달리 MP3 파일의 재생이 불가능했고, 대신 소니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ATRAC3’ 파일만 재생할 수 있었다.
ATRAC3 파일은 이론적으로 같은 용량의 MP3 파일에 비해 음질이 우수하지만 일부 소니 제품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너무나 강력한 보안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 파일을 공유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워크맨 사용자들이 다운로드 받은 MP3 파일을 듣기 위해서는 전용 소프트웨어인 소닉 스테이지(SonicStage, 출시 당시의 이름은 OpenMG Jukebox)를 사용해 파일 형식을 ATRAC3로 바꿔 기기 내로 전송하는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2001년이 되어서야 소니는 일반 MP3의 재생도 가능한 워크맨을 내놓았으나, 파일 전송 시에 소닉 스테이지를 꼭 써야 하는 번거로움은 변하지 않았다. 2008년에 와서야 간단하게 드래그 앤 드롭(Drag & Drop,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파일 전송을 할 수 있는 워크맨이 출시되기 시작했으나 이미 MP3 플레이어 시장은 애플의 ‘아이팟(iPod)’이 장악한 상태였다.
걸어 다니며 음악 듣는 시대를 열다
2010년까지 총 2억 2천만 대를 판매한 카세트 테이프용 워크맨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일본 내의 제조 및 판매가 중단되었다. 중국 및 제 3세계를 대상으로 한 제조 및 판매는 적은 양이나마 계속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조’ 워크맨의 명맥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워크맨이 가지는 의의는 지금도 각별하다. 워크맨의 등장으로 인해 카세트 테이프는 LP레코드를 밀어내고 1980년대 음반 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으며, 때와 장소와 관계 없이 어디서나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처음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소니의 실책으로 인해 워크맨 시리즈가 예전만큼의 절대적인 위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워크맨은 음질과 디자인을 중시하는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성능과 기능이 향상된 신제품이 나오고 있다. 여전히 ‘워크맨’은 휴대용 음악 재생기 시장에서 무시 못할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