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창고에서 피어난 혁신의 사과 열매 - 애플(Apple Inc.)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이전까지는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전유물이었던 컴퓨터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만, 컴퓨터를 구매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은 강렬한데 반해, 정작 이들이 쓸만한 컴퓨터는 보기 드물었다. 몇몇 제품들이 나오긴 했지만, 가격이나 성능, 혹은 편의성 면에서 문제가 있어 많이 팔리지 않았다. 당시 최대의 컴퓨터 기업이었던 IBM 조차도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1974년, 대학을 중퇴하고 컴퓨터 게임 회사인 아타리사에 근무하던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 ~ 2011)’와 대형 컴퓨터 업체인 휴렛팩커드(HP)의 직원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Stephen Gary Wozniak: 1950 ~)’은 컴퓨터 제작 동호회인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의기투합, 자기들이 직접 컴퓨터를 만들어 돈을 벌 계획을 세웠다.
당시 컴퓨터의 주로 쓰이던 CPU(중앙처리장치)는 인텔 i8080이었다. 이 CPU는 성능이 우수했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컴퓨터의 기본 설계를 담당한 워즈니악은 인텔 i8080보다 가격대비 성능이 높은 모토로라의 MC6800 CPU를 더 선호했으며, 이들이 만든 컴퓨터에는 MC6800 계열 CPU 중에서도 저렴한 MOS 6502를 탑재하기로 했다. 또한, 전반적인 회로 설계를 간략화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이 컴퓨터의 첫 번째 시험모델은 1976년 3월에 완성되었다. 워즈니악은 이 컴퓨터의 시험모델을 자신이 일하던 HP의 간부들에게 보여주고 이를 제조해 판매할 것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잡스와 워즈니악, 두 천재의 의기투합
이러한 이유로 잡스와 워즈니악은 자신들이 직접 부품을 모아 창고에서 제품을 제조해서 판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판매망을 이리저리 수소문하던 잡스는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바이트샵’이라는 컴퓨터 매장을 운영하던 폴 테렐(Paul Terrell)에게 시험 모델을 보여주었다, 이 새로운 컴퓨터에 흥미를 느낀 테렐은 30일 안에 50대를 납품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자금이 부족했던 잡스와 워즈니악은 자신들이 소유했던 차량과 전자계산기 등을 급히 팔아서 컴퓨터를 생산할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충분한 부품을 확보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잡스는 아타리의 기술자인 론 웨인(Ronald Wayne)에게 주식 10%를 준다고 제의해 자금을 투자하고 기술 고문을 담당하게 했다.
이렇게 잡스와 워즈니악, 그리고 웨인을 포함한 3명은 컴퓨터의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고, 1976년 4월 1일, 회사도 설립했다. 회사의 이름은 ‘애플’, 그리고 컴퓨터의 이름은 ‘애플 I’이라고 붙이기로 했다. 애플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잡스가 일하던 오리건주에 사과 농장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잡스가 좋아하던 음악 그룹 ‘비틀즈’의 음반을 팔던 ‘애플 레코드’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전화번호부의 맨 앞쪽에 ‘A’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사과 열매가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 잡스와 워즈니악을 비롯한 애플의 창립자들조차도 인터뷰를 할 때마다 회사 이름의 유래를 다르게 설명했다고 하니 위의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애플 I은 1976년 6월에 바이트샵에서 처음 판매를 시작했으며, 대당 가격은 666.66달러였다. 하지만 초반 판매는 순조롭지 못했다. 이에 공동 투자가 중 한 명인 웨인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애플 설립 11일만에 애플의 주식 10%를 포기하고 800달러를 받아 회사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2개월 정도 지나자 입소문을 타고 애플 I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주문량을 채우기 위해 잡스와 워즈니악이 밤을 세워가며 애플 I을 생산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애플 I은 10개월 동안 200여대가 판매되었으며, 그 결과, 잡스와 워즈니악은 8,000달러 정도의 제법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애플 II, 컴퓨터의 대중화를 이끌다
애플 I이 인기를 끌자 잡스는 이를 대량생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는 당시 컴퓨터 업계의 자산가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크 마쿨라(Mike Markkula)를 설득해 92,000달러를 투자 받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77년 1월 3일, ‘애플 컴퓨터’라는 정식 법인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잡스는 반도체 회사인 내셔널 세미컨덕터에서 일하던 전문 경영인, 마이클 스코트(Michael Scott)를 영입해 CEO로 취임시킨다.
CEO로 취임한 스코트는 회사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사원 번호를 부여했는데, 당초 사원 번호 1번은 워즈니악, 2번이 잡스, 그리고 3번과 4번은 각각 마쿨라와 스코트의 몫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이에 반발했고, 결국 스코트는 예정에 없던 사원 번호 0번을 만들어 잡스에게 부여했다. 이는 잡스 특유의 강한 고집과 자존심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법인 설립 이후, 워즈니악은 기존의 애플 I을 개량한 새로운 컴퓨터의 개발에 착수했다. 신제품은 CPU의 성능을 높임과 동시에 컬러 모니터 출력 기능을 더했고, 그 외에도 각종 기능 확장 슬롯 및 카세트테이프 방식의 보조기억장치를 달았다. 그리고 제품의 디자인을 중시한 잡스의 제안에 따라 매끈하고 세련된 플라스틱 재질의 흰색 본체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애플 II’는 1977년 4월부터 1,298달러에 팔리기 시작했다. 애플 I보다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당시 컴퓨터 중에서는 가장 저렴한 편에 속했다. 애플 II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는데, 1978년에 7,600대 팔리던 것이 1980년에는 그 10배인 78,100대, 1982년에 이르자 30만대가 팔릴 정도였다(참고로, 애플 II의 생산은 1993년까지 계속되었고 총 판매량은 500만 대에 달했다). 덕분에 잡스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 애플이 주식 공개를 시작한 1980년 당시, 잡스의 자산은 2억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잃어버린 초심, 혹독한 대가
애플 II의 성공으로 인해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커지자 세계 최대의 컴퓨터 업체인 IBM은 1981년, ‘IBM PC(Personal Computer)’를 출시해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IBM PC 최대의 특징은 바로 완전한 공개형 아키텍처(Architecture: 시스템 전반의 구조 및 설계방식)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때문에 IBM 외의 제조사에서도 이와 완전히 호환되는 PC 본체 및 주변기기,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설계, 생산할 수 있었다.
IBM의 기세에 위기를 느낀 애플은 애플 II의 후속 모델인 ‘애플 III’를 개발, 1980년에 출시했다. 하지만 애플 III는 애플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애플 III는 작은 본체에 최대한 많은 기능을 넣으려 했기 때문에 내부의 부품 구성이 매우 오밀조밀하고 복잡했는데, 제품 개발이 지나치게 급하게 진행된 탓에 오류 수정이나 품질 테스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애플 III는 오류가 자주 발생하고 내부 발열도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 III의 개발을 총 지휘한 잡스는 소음을 발생시키는 냉각팬을 탑재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애플 III는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가격도 문제였다. 애플 III를 구매하려면 기본형 제품은 4,000달러 이상, 고급형 제품은 7,800달러 이상을 줘야 했다. 애플 II의 성공 요인 중에 하나가 저렴한 가격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애플 III의 이러한 가격 정책은 애플이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애플 III는 불과 5만 대 정도의 낮은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그 중에서도 상당수 물량은 잦은 고장으로 인해 리콜을 해야 했다. 1983년에 초기 제품의 문제점을 개선한 ‘애플 III 플러스(Plus)’를 출시하기도 했지만 이미 땅에 떨어진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하여 잡스는 제록스(Xerox)사에서 처음 개발된 GUI(Graphical User Interface) 방식의 컴퓨터 운영체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기존에 쓰던 TUI(Text User Interface) 방식의 운영체제는 각종 명령어를 직접 타이핑하여 실행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GUI 운영체제는 화면 상에 표시된 시각적인 요소를 마우스로 클릭하며 조작하므로 사용이 편하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GUI 운영체제의 가능성에 감화된 잡스는 애플이 당시 고급형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진행하던 ‘리사(Lisa) 프로젝트’에 GUI 운영체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결과, 1983년에 출시된 ‘애플 리사’는 GUI 운영체제를 탑재하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 중 GUI 운영체제를 탑재한 것은 애플 리사가 처음이었다. 그 외에도 본체와 모니터가 일체화된 디자인, 확장 가능한 메모리 슬롯, 외장형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등, 애플 리사는 당시의 컴퓨터로서는 획기적인 기능을 다수 갖췄다. 하지만 GUI 운영체제를 원활히 구동하기에 애플 리사의 CPU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에 사용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제품 가격이 1만 달러에 달했다. 결국 애플 리사는 많이 팔리지 않았다. 애플 III와 리사의 실패로 애플은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이들 제품의 개발 책임자였던 잡스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IBM을 이길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 애플 내에서 제프 라스킨(Jef Raskin)에 의해 또 하나의 GUI 운영체제 컴퓨터의 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었다. 라스킨이 좋아하던 사과의 품종인 ‘Mcintosh’에서 이름을 가져은 ‘매킨토시(Macintosh) 프로젝트’ 였다. 이는 비디오 게임기처럼 다루기 쉽고 저렴하면서 출판물 제작과 같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며, 본체를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초, 매킨토시 프로젝트 팀은 라스킨이 단독으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개발 도중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난 잡스가 돌연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가담, 두 사람이 공동 책임자가 되어 이끄는 형태가 되었다. 잡스는 애플 리사에서 실현하지 못한 여러 가지 요소를 매킨토시에 집어넣으려 했고, 당연히 라스킨과 대립이 잦아졌다. 특히 디자인 적인 면에 크게 신경을 쓴 나머지 본체 안에 들어가는 기판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개발할 것을 지시할 정도였다. 잡스의 이러한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라스킨은 개발 도중 애플을 퇴사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개발된 매킨토시는 1984년 1월, 2,495달러에 출시되었다. 당시 컴퓨터 시장은 IBM PC 및 IBM 호환 PC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킨토시의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하지만 애플은 IBM을 소설 ‘1984’의 ‘빅브라더’에 비유하는 TV 광고를 방영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고, 전용 레이저 프린터 및 출판 편집용 소프트웨어를 출시해 출판 및 교육 분야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IBM PC의 인기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킨토시가 애플 II 이후에 방황을 계속하던 애플에게 있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것은 확실했다.
잡스, 애플에서 쫓겨나다
애플 II 이후 뚜렷한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잡스는 경영자로써 좀 더 뛰어난 인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가 영입 1순위로 생각했던 인물은 바로 팹시콜라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John Sculley)였다. 그는 한때 코카콜라에게 크게 밀리던 펩시콜라를 업계 1위까지 올려놓을 정도로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컬리를 영입하기 위해 잡스는 18개월 넘게 끈질긴 구애를 보냈고, ‘설탕물을 팔며 인생을 보내기 보단 우리와 함께 세상을 바꿀 기회를 잡자’는 잡스의 언변에 감탄한 스컬리는 결국 1983년, 애플의 CEO직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한 배를 타게 된 잡스와 스컬리는 초반에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정통파 경영인인 스컬리는 고집과 개성이 강하고 돌출 행동을 종종 일으키는 잡스를 점차 못마땅하게 보게 되었고 둘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둘의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1984년 크리스마스 시즌, 매킨토시의 수요를 과대평가한 잡스의 잘못된 예측 때문에 애플이 막대한 재고를 떠안게 된 일이다. 이로 인해 애플은 큰 손실을 보았고 전 종업원의 20%를 정리해고 할 수밖에 없었다.
스컬리는 이러한 실패의 책임을 물어 잡스의 해임을 이사회에 건의 했고, 이사회는 투표를 거쳐 잡스의 해임을 결정했다. 사실 잡스는 매킨토시의 수요예측 실패 외에도 애플 III 및 애플 리사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입지가 크게 좁아진 상태였다. 애플에서 물러난 잡스는 ‘넥스트(NeXT)’사를 세워 독자적인 워크스테이션 컴퓨터 및 워크스테이션용 운영체제를 개발하며 재기를 노리게 된다.
정통파 경영인이 이끄는 애플은 과연?
잡스를 몰아내고 애플의 실권을 쥐게 된 스컬리는 정통파 경영인답게 제품의 다양화를 추진하게 된다. 우선 한 종류 밖에 없던 매킨토시의 라인업을 세분화 하여 1987년에 고화질 컬러 그래픽을 지원하는 ‘매킨토시 II’ 및 보급형 제품인 ‘매킨토시 SE’를 동시에 출시했고 1990년대 초 중반부터는 최상위 기종인 ‘매킨토시 쿼드라’, 중상급형인 ‘매킨토시 센트리스’, 보급형인 ‘매킨토시 클래식’, 저가형인 ‘매킨토시 LC’ 등으로 라인업을 넓혔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외에 다른 주력 상품이 필요하다고 느낀 스컬리는 ‘지식 내비게이터(Knowledge Navigator)’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추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93년에 나온 세계 최초의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 개인용 정보 단말기)인 ‘뉴턴(newton)’이다. 뉴턴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필기 기능을 내장했으며, 주소록 및 수첩, 계산, 스캐줄 관리 등 다양한 능력을 갖췄다. 뉴턴은 오늘날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획기적인 제품이었으나, 가격이 1,000달러에 달할 정도로 비쌌고, 이런 휴대용 단말기가 널리 쓰일 만큼 시장이 성숙되지 않아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뉴턴의 실패로 인해 스컬리의 입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1993년, 스컬리는 애플의 CEO 자리를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에게 넘기고 물러나게 된다.
파워 PC 탑재, 매킨토시 호환 기종 출시의 투 트랙 전략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시장의 상황은 점점 애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특히 1980년대 중반을 즈음하여 IBM PC 및 IBM 호환 PC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애플의 매킨토시 시리즈는 일부 출판 및 교육 분야를 제외하면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애플은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것은 매킨토시를 고성능화해 전문가 시장을 공략함과 동시에 애플이 아닌 다른 제조사에게도 매킨토시 호환 기종을 출시할 수 있도록 하여 매킨토시의 전반적인 보급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애플과 IBM, 그리고 모토로라가 협력하여 개발한 고성능 CPU인 ‘파워 PC(Power PC)’였다. 파워 PC는 당시 IBM 호환 PC에 탑재된 인텔의 펜티엄(Pentium) CPU 보다 한 수 위의 성능을 발휘했다. 파워 PC를 탑재한 ‘파워 매킨토시(통칭 파워맥)’는 1994년에 처음 출시되었고, 고성능을 요구하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그래픽 작업에 적합하다는 이미지는 이 때부터 심어졌다.
그리고 1994년, 애플은 자사 외의 업체에서도 매킨토시 호환 기종을 출시할 수 있게 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부터 파워컴퓨팅, 파이오니아, 모토로라, 유맥스 등의 업체에서 매킨토시 호환 기종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이들 호환 기종들은 애플의 매킨토시와 같이 ‘맥 OS’ 운영체제를 탑재했으며 가격은 애플 매킨토시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다. 매킨토시 호환 기종은 높은 가격대비 성능을 무기로 조금씩 시장을 넓혀나갔다.
적자투성이 애플, 누가 인수할 것인가?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오던 애플이었지만 1995년에 IBM 호환 PC용 운영체제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95’가 출시되어 인기를 끌자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다. 윈도우 95의 출시로 인해 IBM 호환 PC는 매킨토시 못지 않은 GUI 운영체제 환경을 갖추게 되었고, 자연히 매킨토시를 쓰던 소비자들이 하나 둘 IBM 호환 PC로 떠나갔다. 더욱이 매킨토시 자체의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인데도 매킨토시 호환 기종들은 점차 늘어났다. 이런 매킨토시 호환기종들은 싼 가격을 무기로 애플의 오리지널 매킨토시 판매량을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애플의 경영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1995년 4분기 실적 발표에서 애플은 8,000만 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스핀들러는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고, 후임으로 길 아멜리오(Gilbert Frank Amelio)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하여 애플이 매각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애플과 실제로 매각 협상을 벌이거나 혹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알려진 기업은 썬 아미크로시스템, AT&T, IBM, 캐논, 필립스 등 다양했다. 하지만 적자에 허덕이던 애플을 후한 조건으로 인수하려 할 회사가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모든 협상은 결렬된다.
잡스의 복귀와 애플의 회생
위기에 빠진 애플의 ‘구원 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1985년에 애플을 떠난 잡스였다. 윈도우 95의 출시를 즈음한 시기, 애플은 이미 성능 및 기능 적으로 한계에 달한 맥 OS를 대신할만한 새로운 운영체제가 필요했고, 그 대안으로 당시 잡스가 운영하던 넥스트 사에서 개발한 ‘넥스트스텝(NeXTSTEP)’ 운영체제가 주목 받았다. 운영체제뿐 아니라 넥스트스텝의 기술 및 잡스의 경영 능력이 필요했던 애플의 이사회는 1996년, 넥스트사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 시킬 것을 결정했다.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매킨토시의 호환 기종 출시를 중단시킴과 동시에, 매킨토시의 라인업을 정리해 간략화 했다. 그리고 초대 매킨토시의 모티브를 이어받아 디자인이 우수하고 사용이 간편한 새로운 매토시의 개발에 착수한다. 그 결과, 1998년에 ‘아이맥(iMac) G3’가 발표된다. 아이맥 G3는 초대 매킨토시와 같이 본체와 모니터를 일체화했으며, 반투명과 화려한 원색이 어우러져 전반적인 디자인이 매우 미려했다. 그리고 IBM 호환 PC에 사용하는 USB 포트를 적용하는 등, 사용 편의성도 높았다.
아이맥 G3는 큰 인기를 끌었고, 그 외에도 아이맥 G3의 디자인 컨셉을 이어받은 노트북인 ‘아이북(iBook, 현재의 맥북)’, 미려한 디자인과 고성능을 동시에 추구한 ‘파워북(PowerBook) G3’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덕분에 애플은 1998년부터 다시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2001년, 기존의 맥 OS를 대신하는 새로운 매킨토시용 운영체제인 맥 OS(Mac OS) X가 등장했다. 맥 OS X의 내부 구조는 넥스트사의 넥스트스텝 운영체제에 기반하고 있어 기존의 맥 OS와 큰 차이가 있었으며, 성능 및 기능은 물론, 디자인 면에서 많은 진화를 이룩했다. 맥 OS X의 등장으로 매킨토시는 윈도우 기반 PC와는 확연히 다른 고유의 매력을 갖추게 된다.
아이팟, MP3 플레이어의 대명사가 되다
아이맥 G3와 맥 OS X의 출시로 애플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은 혼란을 벗어나 안정기에 접어든다. 이후, 잡스는 당시 한창 성장세에 있던 MP3 플레이어(휴대용 디지털 음악 재생기) 시장에 뛰어들 계획을 세운다. 2001년에 출시된 애플의 ‘아이팟(iPod)’은 플래시메모리에 음악 파일을 저장하던 대부분의 기존 MP3 플레이어와 달리 하드디스크를 사용, 훨씬 많은 음악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고 미려한 디자인과 직관적인 조작법까지 갖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아이팟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었다. 개인이 직접 CD에서 추출하거나 불법 다운로드로 음악 파일을 얻어야 했던 기존 MP3 플레이어와 달리 아이팟은 ‘아이툰즈 스토어(iTunes Store)’라는 전용 음악 판매 서비스와 결합, 이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질이나 양 면에서 다른 MP3 플레이어를 압도했으며,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아이팟은 이후, 오리지널 아이팟의 소형 버전인 아이팟 미니(iPod mini, 현재의 아아팟 나노), 잘 쓰지 않는 기능을 제거하고 가격을 낮추고 휴대성을 극대화한 아이팟 셔플(iPod shuffle)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아이팟은 MP3 플레이어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마트폰의 군계일학, 아이폰 출시
아이팟의 성공은 이후 애플의 주력 사업을 컴퓨터에서 휴대용 IT 기기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된다. 애플은 1987년 출시된 뉴턴의 실패 이후 휴대용 정보 단말기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와 시장 상황은 크게 변화해 휴대전화는 물론, PDA, MP3 플레이어, 그리고 인터넷 단말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능을 한데 모은 스마트폰(Smart Phone)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애플이 2007년에 처음 출시한 ‘아이폰(iPhone)’은 매킨토시와 뉴턴, 그리고 아이팟에서 얻은 애플의 노하우가 모두 집결된 스마트폰 중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아이폰 출시 이전에도 RIM사의 블랙베리(BlackBerry)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모바일’ 등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폰이 다수 나와있었으나 이들은 가격이나 기능, 성능 면에서 다양한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에 무리였다. 특히 조작법이 어려운 편이라 초보자들이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으며, 각 스마트폰에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수가 적어 특정 목적의 전문가를 제외하면 활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아이폰은 아이팟 시리즈 및 맥 OS X에서 이어받은 심플한 인터페이스, 그리고 두 개 이상의 손가락 입력을 동시에 인식하는 정전식 멀티터치 스크린 등을 갖춰 초보자들도 쉽게 적응이 가능했다. 그리고 아이팟 시리즈 용으로 활용되면서 이미 방대한 콘텐츠를 확보한 아이툰즈 스토어를 그대로 아이폰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 콘텐츠 면에서도 다른 스마트폰을 압도했다.
아이폰 시리즈는 이후 3세대 통신 기능을 갖춘 ‘아이폰 3G(2008년)’, 이보다 처리 속도 및 배터리 수명을 보강하고 고성능 카메라를 탑재한 ‘아이폰 3GS(2009년)’가 연달아 출시되면서 인기를 이어갔으며, 2010년에는 이보다 전반적인 성능 및 휴대성, 그리고 디스플레이 화질을 높인 ‘아이폰 4’가 출시되었다. 다만, 아이폰 4가 출시될 무렵에는 구글의 안드로이드(Andriod) 운영체제에 기반한 타사의 스마트폰이 대거 출시되어 아이폰 못잖은 인기를 끌었고, 아이폰 4가 제품의 특정 부분을 손으로 잡으면 통화 품질이 저하되는 이른바 ‘안테나 게이트’ 결함을 가진 것으로 드러나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 4는 변함 없이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2011년에는 아이폰 4의 개량형인 ‘아이폰 4S’가 출시되며 안드로이드 진영과의 정면 승부를 이어나갔다.
태블릿 컴퓨터 아이패드, 화면만 커진 아이폰이 아니야?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장을 휘어잡은 애플은 2010년, 아이폰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은 태블릿 컴퓨터인 ‘아이패드(iPad)’를 출시하며 새롭게 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전의 태블릿 컴퓨터는 단순히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기반 노트북에 터치 스크린을 탑재한 형태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기능이나 성능, 휴대성 면에서 기존의 노트북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때문에 아이패드 역시 단순히 ‘화면만 커진 아이폰’에 그칠 것이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아이폰 특유의 뛰어난 조작성과 미려한 디자인 및 방대한 콘텐츠까지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가벼운 무게와 긴 배터리 수명까지 실현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패드의 출시로 인해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감이 미미했던 태블릿 컴퓨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으며, 몇몇 전문가들은 태블릿 컴퓨터로 인해 기존의 PC 시장이 축소될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이후 애플은 기세를 몰아 기존 아이패드보다 전반적인 성능을 강화하고 휴대성을 높인 아이패드 2(iPad 2)를 2011년에 출시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잡스가 없는 애플의 미래는?
애플은 2011년 현재, 3분기 실적 기준으로 매출액이 285억 달러, 순이익은 73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설립 당시, 좁은 창고에서 애플 I을 조립하며 소박하게 시작했고, 한때는 매각 위기까지 몰렸던 기업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어떤 기업이건, 규모가 작은 창립 초기에는 창업자를 중심으로 한 핵심 경영진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의 능력보다는 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기업 특유의 시스템에 의존하게 된다. 아무리 경영자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진 기업의 전반적인 운영을 직접 이끄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공한 기업들의 대부분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애플은 예외다. 가내 수공업 규모였던 창업 초기는 물론,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시점까지도 창업주인 잡스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회사가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혁신을 주도했으며, 지금도 세계 IT 시장을 주름잡는 큰 손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2011년 10월 5일, 잡스는 세상을 떠났다. 잡스가 없는 애플이 그의 유산을 얼마나 충실하게 계승하여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사람들은 주목하고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