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의 이름을 세간에 알린 인텔 펜티엄의 라이벌 - 애슬론(Athlon)
1993년 PC업계 최대의 화제는 누가 뭐래도 인텔 펜티엄(Pentium)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의 출시였다. 펜티엄은 기존의 CPU를 크게 능가하는 성능을 발휘했고, 2년 후에 출시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5 운영체제의 인기와 맞물려 고성능 PC의 필수 요건처럼 시장에 인식,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다만, 인텔 펜티엄의 인기로 인해 위기를 맞이한 회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AMD(Advanced Micro Devices)사였다. AMD는 1975년부터 인텔 제품과 호환되는 CPU를 계속 생산, 판매해왔다. 그리고 펜티엄 등장 몇 개월 전에도 인텔 i486 CPU와 호환되는 ‘AM486’ CPU를 출시하는 등, 판매량 면에서 인텔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앞세워 나름 틈새 시장을 개척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인텔이 새로운 CPU를 ‘펜티엄’이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로 출시하자, 이전에 사용하던 386, 486을 비롯한 이른바 ‘x86 브랜드’의 CPU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시장에 인식되었다. AMD는 1995년에 ‘Am5x86’ CPU를 출시해 펜티엄에 대항해보고자 했으나 이는 펜티엄 보다는 i486에 가까운 제품이었기 때문에 성능이나 시장 인지도 면에서 인텔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퍼맨(인텔)’에 대항하기 위한 AMD의 ‘크립톤(K)’ 광석
AMD가 x86이 아닌 독자적인 브랜드의 CPU를 내 놓은 것은 1996년, ‘K5’의 출시부터다. K5 이후부터 AMD의 CPU는 ‘K~’라는 제품명, 혹은 아키텍처(architecture: 설계방식)명을 붙이게 되었다. 여기에 쓰인 K가 무슨 뜻인지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크립톤(Krypton)’의 약자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크립톤은 원자번호 36번의 기체 원소이기도 하고, 만화 ‘수퍼맨’에 등장하는 가공의 광석 이름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절대적으로 강한 수퍼맨이라도 크립톤 광석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지는 것에 착안, K 시리즈로 절대강자인 인텔을 물리칠 것이라는 AMD의 희망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K5는 펜티엄과 같은 소켓(Socket: 메인보드 상의 CPU 장착부) 규격을 채용하는 등, 하드웨어적으로는 펜티엄과 거의 완벽히 호환되었고, 내부적으로 펜티엄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내장하는 등, 여러모로 이전의 AMD CPU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실제 성능 면에서 펜티엄에 크게 뒤졌고, 출시 시기 역시 늦은 편이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외면 받았다.
K5의 실패 이후 절치부심을 거듭한 AMD는 1996년, 인텔 펜티엄의 핵심 개발진이 속해있던 ‘넥스젠(NexGen)’사를 인수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7년에 K5의 후속 제품인 ‘K6’를 출시한다. K6 역시 인텔 펜티엄과 같은 소켓 규격을 사용하는 호환 CPU였다. K6의 종합적인 성능은 펜티엄에 약간 미치지 못했지만 가격 대비 성능 면에서 상당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K6 이후, AMD는 후속모델인 K6-2(1998년), K6-III(1999년)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보급형 CPU 시장에서 조금씩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다만, AMD의 K5, K6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인텔 펜티엄 시리즈와 메인보드 소켓 규격을 공유하는 호환 CPU라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인텔은 1997년부터는 소켓이 아닌 슬롯(Slot)형태로 메인보드에 장착하는 ‘펜티엄II’ CPU를 내놓았는데, 이는 성능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AMD와 같은 회사들이 호환 CPU를 내놓기 힘들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인텔은 펜티엄 II 출시 이후부터 완전히 독자적인 슬롯 규격의 메인보드를 사용했지만 AMD는 여전히 소켓 규격 CPU를 생산하고 있었다. 때문에 펜티엄 II용 메인보드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AMD의 K6 시리즈로 CPU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구형의 소켓 규격 메인보드 사용자가 CPU 업그레이드 할 때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투자로 최대한의 성능을 얻고자 하는 실속파 소비자층을 중심으로 K6-2와 K6-III는 상당한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K6-2의 후기 모델(K6-2+)과 K6-III 중 일부 모델은 인텔 펜티엄과 공유하던 '소켓 7' 규격을 내부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수퍼 소켓 7'라는 독자 규격 소켓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메인보드 제조 시에 구형 설비를 그대로 쓸 수 있어 메인보드 제조사들에게 환영 받았다.
전에 없던 강력한 성능, ‘애슬론’의 등장
K6-2와 K6-III가 제법 잘 팔린 것은 사실이지만, 인텔의 호환 CPU라는 점은 여전했으며, 일부 매니아층이나 보급형 PC 시장에서만 머물러서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AMD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AMD는 K6-III의 후속 제품부터는 인텔의 호환 제품이 아닌 독자적인 제품을 내놓을 계획을 세웠다. 이 제품은 ‘K7’ 아키텍처 기반으로 개발되고 있었으나, K6의 후속 모델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CPU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애슬론(Athlon)’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애슬론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한계를 겨루는 ‘데카슬론(decathlon: 10종 경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만큼 빠르고 강력한 CPU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99년에 처음 출시된 AMD 애슬론은 인텔 펜티엄 II의 ‘슬롯 1’ 규격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호환은 되지 않는 ‘슬롯 A’라는 새로운 규격을 내세웠다. 기존의 AMD CPU와 달리 완전한 독자 규격의 메인보드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CPU 시장은 인텔의 펜티엄 III가 거의 장악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와중에 출시된 애슬론은 같은 클럭(clock: 동작 속도)의 펜티엄 III를 능가하는 성능을 발휘했다. 게다가 애슬론은 펜티엄 III에 비해 오히려 가격은 더 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0년에 AMD는 1GHz 클럭의 애슬론을 출시, 당시엔 ‘마의 벽’처럼 여겨지던 1GHz의 한계를 인텔 펜티엄 III보다 먼저 넘기에 이른다.
애슬론의 등장은 PC업계 전반에 큰 화제를 불렀다. 성능은 물론, 가격 면에서도 인텔 CPU에 비해 유리했던 애슬론은 이전의 AMD CPU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AMD는 회사의 지명도를 크게 높이며 인텔의 경쟁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클럭 머신’ 펜티엄 4를 공략하라
반면, 애당초 ‘경쟁’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CPU 시장을 독점하던 인텔 입장에서 AMD의 선전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당시엔 ‘클럭 수치 = CPU의 성능’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당시 펜티엄 III가 애슬론과의 클럭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현실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텔은 2000년, 야심작인 ‘펜티엄 4’를 출시했다. 펜티엄 4에 적용된 ‘넷버스트(NetBurst)’ 아키텍처는 클럭을 높이기 쉬운 것이 특징이었다. 덕분에 펜티엄 4는 출시 1년 만에 2GHz, 2년 후에는 3GHz 클럭의 제품이 출시될 정도로 빠르게 클럭을 높일 수 있었다.
넷버스트 아키텍처는 클럭 수치의 급격한 향상에 비해 실제 성능 향상의 정도는 적은 것이 단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클럭 수치가 곧 성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 성능과 상관 없이 펜티엄 4는 비슷한 성능의 애슬론에 비해 30~40% 이상 높은 클럭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마케팅 측면에서 큰 이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AMD는 2001년, 초기 애슬론의 성능을 개선한 ‘애슬론 XP’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제품명 표기 방법을 내세웠다. 기존의 CPU는 ‘펜티엄 4 1.6GHz’, ‘애슬론 950MHz’와 같이 클럭 수치가 곧 제품명으로 이어지는 표기법이 일반적이었으나. 애슬론 XP는 클럭 수치와 상관 없이 임의의 모델 넘버를 브랜드 명 뒤에 붙이는 이른바 성능 지수(Performance Rate) 표기법을 시행했다.
예를 들어 1.8GHz 클럭의 애슬론 XP는 펜티엄 4 2.2GHz 모델과 비슷한 성능을 낸다고 하여 ‘애슬론 2200’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대표적이었다. 몇몇 모델의 경우는 표기된 성능 지수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이 AMD의 CPU가 인텔보다 낮은 클럭에서 동등한 성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64비트’와 ‘듀얼 코어’로 맞이한 AMD의 전성기
AMD의 애슬론과 애슬론 XP가 상당한 호평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인텔은 PC용 CPU 시장의 9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 강자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신제품이 필요했던 AMD는 2003년, AMD는 기존의 K7 아키텍처를 한 층 발전시킨 K8 아키텍처 기반의 CPU인 ‘애슬론 64’를 출시한다. 애슬론 64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32비트 방식으로만 데이터를 처리하던 기존의 PC용 CPU와 달리 64비트 처리 기능도 추가해 64비트 방식의 운영체제나 응용 프로그램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애슬론 64 출시 이전에도 인텔의 아이테니엄(Itanium)과 같은 서버 컴퓨터용 64비트 CPU가 있었지만 이는 기존에 사용하던 32비트 프로그램이 호환되지 않아 일반 PC에서는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애슬론 64는 기본적으로 32비트 CPU의 구조를 갖추면서도 64비트가 호환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범용성이 높았다. 당시에 64비트 운영체제나 응용프로그램의 수가 매우 적어서 64비트 성능을 이끌어낼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64비트를 지원하는 CPU가 일반 PC 시장에 등장했다는 것 만으로도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애슬론 64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기획 단계부터 하나의 CPU에 2개의 코어(Core: CPU의 핵심 회로)를 갖춘 듀얼 코어(Dual Core) 구조를 상정해 제조되었다는 점이다. 듀얼 코어 CPU를 탑재한 PC는 2개의 CPU를 갖춘 것과 유사한 성능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인텔의 듀얼 코어 CPU인 ‘펜티엄 D’가 2005년 5월 26일에 출시된 반면, AMD의 듀얼 코어 CPU인 ‘애슬론 64 X2’는 이보다 불과 5일 늦은 5월 31일에 출시되어 최초의 일반 소비자 대상 PC용 듀얼 코어 CPU라는 타이틀은 인텔에게 빼앗겼다(사실 K8 아키텍처에 기반한 최초의 듀얼 코어 CPU는 AMD가 2005년 4월에 출시된 '옵테론' 이지만 이는 PC가 아닌 서버 및 워크스테이션 전용 제품이었다).
하지만 펜티엄 D는 근본적인 아키텍처의 개선 없이 기존의 펜티엄 4의 코어 2개를 하나의 칩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같은 듀얼 코어라 해도 애슬론 64 X2에 비해 성능이 좋지 못했다. 더욱이, 높은 클럭만을 추구하는 펜티엄 4의 단점 역시 그대로 이어받아 전력 소모나 발열 면에서도 펜티엄 D는 애슬론 64 X2에 비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AMD는 애슬론 64와 애슬론 64 X2의 호평에 힘입어 CPU 시장에서 20%에 달하는 점유율을 확보하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길지 않았던 AMD의 ‘봄’
하지만 2006년, 인텔에서 신형 CPU인 ‘코어2 듀오’를 출시하자. AMD와 애슬론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코어2 듀오는 기존의 넷버스트 아키렉처 대신 새로 개발된 코어(Core) 아키텍처를 도입,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펜티엄 4와 펜티엄 D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전력 소비와 발열 문제도 거의 개선되었다. 반면, AMD는 애슬론 64 시리즈의 후속 모델인 K9 아키텍처 기반 CPU의 개발이 난항을 겪으면서 기존 제품으로 힘겹게 코어2 듀오를 상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인텔은 코어2 듀오의 출시 이후부터 자사 CPU의 주력 브랜드로 ‘코어’를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펜티엄은 코어 시리즈보다 한 단계 낮은 보급형 브랜드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AMD도 펜티엄의 경쟁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애슬론을 계속 주력 브랜드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2007년, AMD는 K10 아키텍처를 적용한 신형 CPU인 ‘페넘(Phenom)’을 출시하면서 애슬론 시리즈를 페넘 시리즈의 보급형 브랜드로 변경하게 된다. 하지만 페넘은 기대만큼의 성능을 보여주지 못해 인텔의 시장 지배력은 한층 강해진다.
소비자들에게 또 하나의 선택권을 제시하다
2011년 현재, 애슬론은 AMD의 보급형 CPU브랜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예전처럼 시장의 주목을 받는다거나 판매량이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적은 비용으로 PC를 장만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여전히 친숙한 존재다. 그런데 이는 인텔의 펜티엄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 경쟁자끼리는 서로 닮는다는 속설을 증명하고 있다.
애슬론의 등장으로 인해 AMD는 단순한 저가형 호환 CPU 생산 업체의 이미지를 벗어나 인텔의 경쟁자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물론, AMD의 기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도 인텔은 여전히 8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으므로 ‘경쟁’이라는 표현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텔의 완전 독점이나 다름 없었던 CPU 시장에서 또 다른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일깨운 것 만으로도 AMD 애슬론은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