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써서 만든 국내 논문, 언제까지 해외 학술지에 구독료 내야 하나
[IT동아 정연호 기자]
지식은 공동체 협업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개인이 혼자 연구를 진행했을지라도, 인류가 쌓아온 공동의 지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식은 개인이 소유하고 유통하는 ‘사적인 것’이나,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는 ‘공적인 것’이어선 안 된다. 지식이 사회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공공재로 남아 있을 때, 누구나 자유롭게 지식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지식은 공유해도 소모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성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선 공공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식에 대한 접근이 통제되고 있다. 대부분의 논문은 정부 지원을 받았음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볼 수 있다. 대학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면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한 편을 보는데 몇 달러에서 수십 달러까지 내야 한다. 대학·도서관·연구 기관 등 구독처에서도 비싼 구독료를 내야 하니 사정은 다르지 않다.
교육부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발간한 ‘2020년 대학 도서관 통계 분석 및 교육·연구 성과와의 관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393개의 4년제 대학 및 전문 대학은 전자 저널 자료 구매 비용에 약 1,235억 원을 썼다. 보고서는 “전체 자료 구입비 중 전자 자료 구입 비율이 69.4%이며, 전자 자료 구입비에서도 전자 저널 구입비가 72.2%로 가장 높다. 전자 저널 구입 비율은 매년 증가하지만, 기타 전자 자료 구입 비율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전자 저널 구독료가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류준경과 천정환의 논문 ‘학술 논문 DB 유통 문제와 신자유 체제 하의 학문의 변형’은 “해외 학술지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급격한 가격 인상을 요구해도 한국의 구독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며 상황을 분석했다. 연구 업적 평가 제도가 SCI·SSCI·A&HCI 등의 국제 학술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므로, 한국에선 해외 출판사의 전자 저널에 대한 수요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구독료를 요구하는 해외 학술지의 논문 중 상당수엔 국가 R&D(연구개발) 재정과 공공·민간 연구 기금이 투입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지난 10년간 국가 연구개발사업 지원을 받은 학술지 논문은 702,651건이며, 이 중 29%가 국내 학술지, 71%가 해외 학술지에 게재됐다. 국내법에는 연구 성과물의 소유·공개에 대한 조항이 없으므로, 제삼자가 국가의 연구 성과물을 상업적인 용도로 활용해 이득을 취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또한, 해외 학술지를 구독하는 ‘빅딜’ 방식은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쓰게 만든다. 구독처는 수많은 학술지를 패키지로 묶어 구독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학술지를 선택해 구입할 수 없다. 지금은 대학의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구조 조정과 수년간 지속된 등록금 동결로 대학 재정 기반이 약화된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용률이 낮은 학술지도 함께 구매해야 하니, 대학 도서관의 예산을 낭비하는 셈이다.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오픈 액세스’ 운동
학술지의 지나친 상업화와 독과점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오픈 액세스(Open Access)’ 운동이다. 오픈 액세스 운동은 모든 연구자들이 어떠한 장벽도 없이 필요한 학술지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연구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자는 것이다. 구독료를 없애는 대신 출판 비용을 논문 생산자인 과학자가 지불한다.
유럽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출판사와 오픈 액세스 계약을 추진해왔으며,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도 국제 학술지 엘스비어(Elsevier)와 오픈 액세스 전환 계약을 체결해 큰 지지를 얻었다. 한국에선 한국연구재단,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 6개 주요 연구지원 및 공공 학술 정보 서비스 기관이 '오픈 액세스 공동 선언'에 서명하며, 오픈 액세스와 관련해 상호 협력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일각에선 오픈 액세스가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운동’이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연구 재단에서 학술지 지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평가 시 원문을 무료로 공개하면 가점을 주는 형태로 오픈 액세스를 유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강요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선 공적 지원을 받았는지를 따져, 논문 출판일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상 공개를 장려하는 방법도 고려해봄직 하다.
한편, 오픈 액세스 운동 이후로 공정한 절차나 심사 없이, 돈만 내면 논문을 출판해주는 가짜 학술지인 ‘약탈적 학술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논문을 쉽게 출판하고 싶은 연구자와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이 만나면서, 약탈적 학술지는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약탈적 학술지를 해결하려면 논문 투고 및 심사 관리·교정·편집 등을 위한 비용이 필요하므로, 오픈 액세스를 통해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다양한 기관이 협력해 새로운 출판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오픈 액세스 생태계가 건강하게 정착하려면, 중립적인 평가 절차와 감사 기관이 빠져선 안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학계나 도서관 등의 특정 기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적인 컨소시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글 / IT동아 정연호 (hoh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