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최소한의 기준 필요", 무분별한 상장과 상폐 언제까지?
[IT동아 정연호 기자] 국내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가 지난 6월 18일 암호화폐 24종의 거래 지원을 중단(상장폐지)했다. 거래규모 2위 거래소 빗썸도 암호화폐 4종을 상장폐지한다고 밝혔고, 거래규모 5위인 프로비트는 원화시장에서 145종의 암호화폐를 상장폐지했다. 거래소들이 이례적인 규모로 암호화폐 정리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상장폐지된 암호화폐는 대부분 국내에서만 거래되는 이른 바 ‘김치코인(국내 개발사가 발행하는 암호화폐)’이기 때문에, 국내 거래소의 상장폐지는 사실상 시장 퇴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폐지가 발표된 암호화폐 중엔 하루아침에 90%에 가까운 폭락을 한 것도 있다.
예고된 가상화폐 상장폐지
거래소가 대대적인 암호화폐 정리작업에 나선 이유는 특정금융거래정보법(특금법)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특금법에 따라, 거래소는 오는 9월 24일까지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 발급 등의 요건을 갖춰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사업자신고를 해야 영업을 할 수 있다.
ISMS는 정보보호 관리절차, 운영체계, 실제이행 등의 항목에서 심사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정부의 정보보안 인증체계다. 보통, 거래소가 은행과 실명계좌 거래를 틀 때 ISMS 인증이 요구되기 때문에, ISMS 인증은 암호화폐 거래소가 되기 위한 기본조건처럼 여겨져 왔다. 지난 5월을 기준으로, 국내 거래소는 약 60곳에 달하지만 ISMS 인증을 획득한 거래소는 20곳에 불과하다.
신고를 앞둔 거래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실명계좌 확보다. 거래소는 이용자가 은행의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시중은행과 실명계좌 발급 제휴를 맺어야 한다. 이용자 신원과 거래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은행은 거래소와의 제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실명계좌를 내줄지 아직 고심하고 있는 상태다. 자금세탁이나 전산오류, 해킹 등 보안사고가 터질 경우 은행에도 책임이 있다는 리스크 때문이다.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 우리은행 등 주요은행은 거래소와 제휴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업비트, 빗썸 등 거래소가 부실한 암호화폐를 정리하는 이유도 은행의 실명계좌 발급 심사 때문으로 보인다. 은행은 거래소 안전성 검사를 할 때, 은행연합회의 ‘위험평가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거래소에서 취급하는 암호화폐의 종류/고위험 암호화폐 거래량 등을 정량평가한다. 실명계좌 제휴를 맺지 못하면 거래소는 폐업이 불가피하므로, 위험한 암호화폐를 미리 정리해서 몸을 사리겠다는 것.
일각에선 실명계좌 제휴에 회의적인 은행의 태도로 인해서 거래소 중 5~6곳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실명계좌를 확보한 4대 거래소(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각 제휴 은행과 재계약 심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할 때
거래소가 암호화폐 상장폐지를 기준 없이 단행한 것은 아니다. 업비트의 공지사항에 따르면, 업비트의 상장폐지 기준엔 팀 역량 및 사업/정보 공개 및 커뮤니케이션/기술 역량/글로벌 유동성 등이 있다. 여기서 낮은 점수를 기록한 암호화폐가 정리된다.
하지만, 거래소 이용자와 암호화폐 발행사는 업비트가 밝힌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만약 사업성/기술역량 항목에서 평가기준 미달이라면 사업성이 얼마나 나쁘고, 기술역량은 얼마나 떨어지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처럼 거래소가 명확한 기준 없이 거래를 중단하면, 문제없는 암호화폐 발행사와 투자자가 큰 피해를 본다는 점을 강조한다.
업비트 관계자는 “평가기준을 구체적으로 밝히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다. 유의지정 단계일 땐 거래 시장에 혼란을 빚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정보만 공개한다. 자칫하면 해당 암호화폐에 낙인을 찍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상황 판단이 끝난) 상장폐지 시점엔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상장심사를 완벽하게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상장폐지 전부터 모니터링을 꾸준하게 하고 있으며, 문제가 발견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행사와 지속해서 소통한다”고 덧붙였다. 거래소 내부의 상장위원회가 꼼꼼하게 상장심사를 해도, 상황이 변하면 위험성도 달라지기 때문에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한양대 글로벌기업가센터 이장우 겸임교수는 “암호화폐마다 특수성이 달라서 평가기준을 계량화하거나,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기가 어렵다. 어떤 암호화폐는 발행하는 회사가 존재하지 않는데, 상장 기준을 회사의 매출로 잡아버리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거래소의 자의적인 판단 자체를 문제라고 볼 순 없다.
문제는 지나치게 모호한 기준이다. 계약사항에 있는 거래종료지원 기준이 포괄적이면, 거래소가 상장폐지를 결정할 때 발행사가 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가능성이 크다. 이 교수는 “거래소 간 공통적으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특금법의 방향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특금법에 의해서 거래소에 공통 규칙이 부과되고, 이로 인해 부실한 암호화폐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한편, 특금법이 암호화폐 사업에 대한 진입 장벽을 너무 높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통, ISMS 인증은 일정 규모의 보안설비나 인프라를 갖춘 중견기업이 받는 심사인데, 암호화폐 지갑 같은 블록체인 서비스 스타트업도 ISMS 인증을 획득해야 한다는 규정은 과하다는 것이다. 더 나은 암호화폐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불필요한 규제는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글 / IT동아 정연호 (hoh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