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술, 가치 창출 넘어 문화의 한 갈래로 떠오르다
[IT동아 남시현 기자]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Joseph Nye)는 국가 균형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하드 파워, 그리고 소프트 파워로 구분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하드 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외교력 등 물리력이 따르는 전통적인 방식의 국가 권력을 뜻하고, 소프트 파워는 문화와 이념, 정신적 공감 등으로 형성된 가치를 의미한다. 미국, 중국처럼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하드 파워를 앞세우는 국가며,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처럼 상대적으로 부족한 하드 파워를 문화적 친화력과 영향력으로 보완하는 국가가 소프트 파워를 중시하는 좋은 예시다.
소프트 파워를 추구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전 세계에 문화적 영향력을 널리 알리는 데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영국의 경우 영어 문화권을 활용해 외교나 교육, 디지털, 스포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하드 파워보다는 소프트 파워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과거부터 대한민국은 자원이나 군사력을 앞세운 패권 추구보다는, 국제무대에서의 외교 역량과 문화적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우리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평창올림픽 개최나 5G 보편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 산업의 등장, 방탄소년단, 블랙 핑크 등 아이돌 그룹을 앞세운 엔터테인먼트가 강세를 보이면서 진보된 소프트 파워 역량을 보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콘텐츠, 문화산업이 갑작스럽게 뜨기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미 2001년부터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 ‘국가 6대 핵심기술’로 문화기술(CT, Culture Technology)을 선정해 집중 육성해왔고, 문화 콘텐츠 기획과 상품화, 미디어, 생산부터 수요까지 창출하는 가치사슬 생태계까지 문화적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화 산업의 성장이 곧 소프트 파워의 확보고, 이것이 곧 국제무대에서의 대한민국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끄는 힘, 문화기술의 현 주소는?
문화기술 혹은 문화 콘텐츠 기술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원광연 이사장이 1995년 카이스트 재직 중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다. 다만 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포괄하는 분야가 넓고, 영향력도 다 다르다 보니 국가별로 정의하는 산업이나 분야가 조금씩 다르다. 우리가 문화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영국은 창조 산업이라고 부르며, 맥락도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대다수 국가가 자국 산업에 맞는 문화 산업을 기반으로 문화기술을 정의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예술, 디자인, 인문 사회학 분야의 지식이 기술 공학과 융합해 새로운 문화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일련의 분야를 통칭한다. 예시를 통해 자세히 짚어본다.
현재 국내에서 예술 기반 문화기술의 성공 사례는 콘텐츠 제작 기업 디스트릭트(d’strict)다. 디스트릭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하며, 디지털 사이니지를 비롯한 시각 매체를 독자 콘텐츠와 융합하는 데 주력한다. 지나 5월,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초대형 사이니지에 등장한 ‘퍼블릭 미디어 아트 #1_WAVE WITH ANAMORPHIC ILLUSION’이 디스트릭트의 작품이다. 쉽게 말해 자체 제작한 고유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시각적인 감상과 파생 효과를 노리는 것인데, 실제로 이 작품은 대한민국 디지털 사이니지의 기술력과 콘텐츠 기술의 현주소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스트릭트가 제안하는 또 다른 문화기술의 사례는 국내 최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인 아르떼 뮤지엄(ARTE MUSEUM)이다. 아르떼 뮤지엄은 스피커 공장으로 사용되던 높이 10미터, 1,400평 면적의 공간에서 영원한 자연을 소재로 한 폭포, 정원, 꽃, 파도, 해변 등 10개 주제의 미디어 아트 전시가 펼쳐진다. 사운드는 그래미 어워드를 2회 수상한 사운드미러코리아 황병준 대표가 연출하며, 프랑스 그라스 조향 스쿨 GIP의 아시아 공식 대표인 ‘센트바이’가 전시관 내 조향을 맡는다. 아르떼 뮤지엄은 문화 콘텐츠를 이용한 시설 재생이나 지역사회 상생이라는 가치 창출은 물론, 시각 및 체험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경제적 목표 달성까지 실현해 문화기술의 주요 사례가 될 전망이다.
공공분야에서의 문화기술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경기콘텐츠진흥원 광교경기문화창조허브는 문화기술 선순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인재양성, 제작지원, 기업육성, 저변확대 4개 목표를 통해, 공공 콘텐츠 제작과 문화기술 스타트업 지원, 문화기술 아이디어 및 상업화 개발 지원 등 문화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최근 광교경기문화창조허브가 추진한 전시회를 보면 문화기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광교경기문화창조허브는 지난 10월 8일부터 18일까지 총 11일간, 스타필드하남 센트럴, 데블스도어, 트레이더스 아트리움과 웰컴로비, 야외광장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액트:ACT]’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졌다. 스타필드 전시공간은 경기도민의 문화기술 제공을 목적으로 경기콘텐츠진흥원과의 양해각서 체결을 통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행사 제목이자 주제인 ACT란, 예술 기반 융합을 뜻하는 Art, Content, Technology를 뜻한다. [액트:ACT]는 미디어, 키네틱, 증강현실 콘텐츠를 활용한 공공 콘텐츠와 문화기술 아이디어, 상업화 제작 지원 기업의 콘텐츠와 서비스를 발표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서울과 경기도민 약 4만 명이 참여해 디지털 인터랙션으로 구성된 공공캠페인과 17개 스타트업이 준비한 문화기술 서비스, 개방된 야외 공간에서 문화기술을 체험하는 이동전시관 ‘스테이션031’을 관람했다.
공공캠페인의 경우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제를 22미터 높이의 미디어 타워를 통해 압도하는 릭스스튜디오의 ‘내일의 바다’, 센서로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해 움직이는 신성TSC의 메시지 트리, 타인과의 대면을 경험하게 돕는 매드제너레이터의 ‘스테이 커넥티드’를 포함해 증강현실 기술과 성향 테스트를 기반으로 한 ‘숨은 요정 찾기’와 증강현실로 인사를 전하는 ‘[Rollvi]의 사랑해 릴레이 프로젝트’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스타트업 역시 문화기술을 창의적으로 결합한 사례 중심으로 소개됐다. 미술품 매매나 아마추어 작가의 작품을 대여·전시하는 더컬렉, 애플 스네일, 아트온 행거나 가상·증강 현실을 활용한 서비스 더 원더와 ITDA 등 광교경기문화창조허브가 창업과 성장을 돕는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행사장을 방문해 락스스튜디오의 ‘내일의 바다’를 관람한 한 관객은 “스타필드 하남 중앙에 있는 전시공간(센트럴 아트리움)은 자주 전시나 공연이 있는 위치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시야말로 가장 인상적”이라며, “유튜브에서나 보던 놀라운 작품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접할 수 있어서 좋다”는 평을 남겼다.
문화 콘텐츠 기술 지원, 국가적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해
초기 단계의 문화기술은 기존 문화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기술은 매체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문화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단순히 전시 및 공연 문화의 확산을 넘어서, 새롭게 형성된 문화의 갈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는 시대인 만큼, 앞으로 문화기술에 대한 관심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는 점도 문화기술을 육성해야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액트:ACT]’ 역시 국내 공공 문화 콘텐츠 기술의 저변 확대에 이바지한 행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현재 국내 문화기술의 경우, 제한된 전시공간과 스케일, 그리고 관람 규모의 한계로 인해 쉽게 확장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여기에 기업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이라면 기술은 물론 공연 및 전시 관련 지원까지도 함께 뒤따라야 한다. 앞으로도 [액트:ACT]와 같은 자리를 꾸준히 마련해 문화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관련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더 큰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글 / IT동아 남시현 (s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