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 희로애락 5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IT동아 강형석 기자] 2019년 5월 1일(현지 기준),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스(이하 AMD – Advanced Micro Devices)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반도체, 그 중에서 PC의 핵심 장치로 꼽히는 프로세서(중앙처리장치)와 그래픽 프로세서를 모두 개발 가능한 실력을 갖춘 기업이다. 그만큼 어려움도 많지만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시장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AMD가 있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1969년부터 2019년까지 AMD가 겪은 희로애락의 역사를 간단히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인텔과 공생하던 시절이 있었다
잘 알려진 역사지만 AMD는 설립 초기, 인텔의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해 왔다. 물론, 자체 개발도 포기하지 않았다. 1970년에는 Am2501 논리 계산기를, 1986년에는 첫 100만 비트(128KB) EPROM(데이터 삭제 가능한 롬)이었던 Am27C1024 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무작위 접근 메모리(RAM – Random Access Memory) 칩 사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PC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 법한 286부터 486에 이르기까지 AMD의 모든 프로세서는 인텔과 연관이 있다. 인텔에 사용 권한(라이선스)을 얻어 개발했기 때문. 비록 성능은 인텔보다 부족했지만 가격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춰 나름대로 시장을 확보해 나갔다. AM486 프로세서를 컴팩에 제공한 것. 이때가 1994년이다.
어려움을 겪을 뻔한 일도 있었다. 1986년, 인텔이 386 관련 라이선스를 취소하고 관련 기술 공개를 거절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인텔과 약 8년가량 시간을 보내며 법정 다툼을 벌였다. 결국 1994년 캘리포니아주 최고 법원이 AMD의 손을 들어주면서 마무리되었다.
'1GHz·듀얼코어·64비트' 첫 달성 업적 이루다
AMD가 본격적인 프로세서 제조사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K5 프로세서를 공개한 1995년일 것이다. 이전에도 자체 개발과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웨이퍼(집적회로 제작을 위한 판)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으나 거의는 인텔 라이선스를 받은 호환 프로세서 생산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K5 프로세서는 AMD 손으로 직접 개발하고 펜티엄 프로세서와 경쟁한 기념비적인 제품이다.
이어 등장한 K6 프로세서(1997년)는 PC 시장의 변화를 준 제품으로 꼽힌다. 펜티엄2와 경쟁했던 K6는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편이었다. 이를 활용해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PC를 장만할 수 있었다. 당시 펜티엄2 프로세서는 성능은 뛰어났으나 가격이 높았다. AMD는 이 빈틈을 잘 파고들었고, 시장에서의 반응도 좋아 인텔과 경쟁 구도를 이어가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1990년대 후반, 프로세서는 멀티미디어 관련 명령어 싸움이 치열했다. 인텔은 멀티미디어 확장(MMX-MultiMedia eXtension) 명령어를 통해 게임과 멀티미디어 환경에 초점을 맞췄는데, AMD 역시 K6-2에서 3D나우!(Now) 기술을 통해 멀티미디어 관련 명령어를 추가했다. 정수 연산이 아닌 부동소수점 연산 강화를 통해 성능을 높이고자 했다.
1999년 전후로는 프로세서의 작동속도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당시 인텔은 펜티엄 3, AMD는 애슬론으로 경쟁을 이어갔다. 약 1년 남짓한 경쟁의 승자는 AMD였다. 애슬론 1000 프로세서가 1GHz 작동 속도에 도달한 것. 인텔도 즉시 1GHz 속도에 도달한 펜티엄 3을 내놨지만 자존심을 구긴 뒤였다.
2003년 AMD는 64비트(bit) 명령어를 도입한 애슬론64로 또 한 번 시장에 충격을 줬다. 당시 64비트 프로세서는 전문가용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일반 소비자용 프로세서에도 64비트 명령어가 적용되면서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2004년에는 한 공간에 프로세서 두 개를 담은 듀얼코어 프로세서 상용화에 성공(애슬론64 X2)하면서 시장에 돌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당시 인텔도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내놨지만 1+1 구조(칩 두 개를 집적함)여서 완전한 듀얼코어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존망의 기로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AMD는 한 방에 위기를 맞게 된다. 2006년, 인텔이 코어2 프로세서 라인업을 선보이면서다. 비난을 받았던 펜티엄 4와 펜티엄 D에서 교훈을 얻은 인텔이 새로운 설계를 도입하고 성능을 크게 끌어올리면서 자존심을 되찾고자 했다. AMD는 여기에 애슬론64 X2 프로세서의 가격을 낮추고, 코어를 4개까지 담은 페넘 프로세서(2007년) 등을 선보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AMD는 그래픽 프로세서 제조사 ATI를 54억 달러에 인수하며 자금난을 겪었다. 현재 원화 환산 가치로는 6조 3,315억 상당이지만 그때는 이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졌을 터. 인수가 이뤄질 당시, 너무 높은 비용을 지출한 것 아니냐는 여론도 있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로 여기며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 부메랑 되어 돌아왔다.
이는 후속 제품에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점점 라인업이 탄탄해지는 인텔에 견줄 제품을 선보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신기술을 도입하기 보다 기존 것을 다듬고 코어 수를 더 많이 구성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2008년, 인텔이 코어 프로세서를 내놓으면서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AMD는 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11년 불도저(Bulldozer) 설계를 도입한 FX 프로세서 라인업을 공개했다. 4~8코어 구성으로 인텔 코어 프로세서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낮은 전력 대비 성능으로 외면 받았다. 대형 프로젝트의 실패로 AMD는 더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생산 공장은 글로벌 파운드리(Global Foundries)로 분리되었고, 모바일 그래픽 사업 부문을 퀄컴(Qualcomm)에 매각하기도 했다.
부활의 신호탄 '라이젠', 그리고 50년
AMD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의미 있는 결과도 있었다. ATI와의 합병은 프로세서와 그래픽 프로세서를 결합한 가속처리장치(APU)라는 결과물로 이어졌고, 의외의 성과를 냈다. 비교적 뛰어난 그래픽 처리 실력을 인정 받은 것. 이를 활용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4와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원 등에 가속처리장치 기반 프로세서를 공급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것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콘솔 게임기 시장은 수량 확대에 한계가 있기 때문. 분위기를 타개할 한 방이 필요했다. 이 때 AMD는 과감히 최고경영자 자리에 리사 수(Lisa Su) 박사를 추대해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동시에 불도저의 실패를 극복할 새 프로세서 설계에 힘을 쏟았다.
2017년, 오랜 개발 시간 끝에 AMD는 라이젠(Ryzen) 프로세서를 내놓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이 프로세서 하나로 AMD는 이미지 개선에 성공했다. 그 동안 인텔 대비 한참 부족한 전력 대비 성능을 경쟁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다중코어 프로세서인 라이젠 스레드리퍼(Ryzen Threadripper)까지 선보였다. 이후 1년마다 각 제품을 새로 선보이면서 인텔과 꾸준히 경쟁하고 있다.
1969년부터 2019년까지 50년. 그 동안 AMD는 2인자(판매량에서)였지만 인텔의 독주를 견제하는 경쟁자이자 시장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길라잡이라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AMD는 성장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노력 중이다. 50년 뒤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 IT동아 강형석 (redb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