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넷북의 아버지, 에이수스의 창업자 조니 시
[IT동아 강형석 기자] IT 시장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도전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항상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리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팔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IT 시장에서 최고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곳은 압도적인 기술과 매력적인 상품성을 모두 보유한 것이라 보면 된다.
타이완 IT 기업 에이수스도 그 중 하나다. 개인 PC 시장을 시작으로 노트북, 조립 PC 시장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톱 브랜드로 손꼽힌다. 특히 조립 PC 시장에서 에이수스를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브랜드 입지를 다져놓은 상태다. 이 외에도 에이수스는 인텔과 AMD,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반도체 및 소프트웨어 기업들과 가장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니 시 에이수스 회장 및 최고 브랜드 관리자. 출처: 에이수스>
1989년 설립되어 올해로 창립 28년을 맞이한 에이수스. 짧은 기간 내에 세계 유수의 IT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배경에는 조직을 이끄는 수장, 조니 시(Jonney Shih) 회장의 강력하고 혁신적인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어떻게 에이수스를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업으로 성장시켰을까.
차근차근 키워낸 과학자의 꿈
타이완 중부, 창화(Chang-hua)주에 속해 있는 루캉(Lu-Kang)에서 태어난 조니 시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세무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여러 교육을 받으며 과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소싯적 아인슈타인이나 토마스 에디슨을 동경했으며, 중·고교 재학 중에는 수학과 물리, 화학 등에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독특한 이력이 있는데 바로 미술과 스포츠. 흥미롭게도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 작가이자 화가로 활약했는데, 그 영향으로 이공계열 재능 외에도 미적 감각 또한 탁월했다고 한다. 기술과 스타일을 접목한 에이수스의 철학이 어쩌면 조니 시 회장의 할아버지에게서 이어진 결과가 아니었을까?
고교를 졸업한 조니 시는 국립 타이완 대학교에 입학한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였던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을 살려 선택한 전공은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이었다. 이공계 학과 중 더블-이(Double-E)라 부르며 핵심 계열로 분류되는 분야를 동시에 섭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예체능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국립 타이완 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를 취득한 그는 그 즉시 국립 차오퉁(Chiao- Tung)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아 학위를 따냈다.
과학자의 꿈, 현실로 만들다
대학원을 졸업한 조니 시는 1978년, 에이서(Acer)의 전신인 멀티텍(Multitech)에 입사하게 된다. 여기에는 그의 멘토였던 스탠 시(Stan Shih)의 영향이 컸다. 사실 그는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처리 과정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문제는 타이완 내에서 컴퓨터는 인기 없는 아이템 중 하나라는 점이다. 심지어 국립 타이완 대학교에서 이공계를 전공했지만 학교 내에서도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무관심 속에서 그는 컴퓨터 구조와 존재가 심오함을 느꼈고, 대학 동기들과 함께 컴퓨터 기술의 기초부터 여러 이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국가 기술 연구소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학업에 매진했으나 대학원 입학 중 생각을 바꿨다. 할 일은 많겠지만 다양한 업무를 배우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작은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조니 시는 에이서 창업자 스탠 시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최근에도 안부를 물으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렇게 입사한 멀티텍은 정말 작은 기업이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장 가능성을 보고 도전을 결심한다. 한편, 멀티텍의 설립자 켄 타이(Ken Tai)는 조니 시의 이력에 흥미를 느꼈다. 기술과 경영에 대한 이해도 때문이다. 켄 타이는 조니 시에게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마케팅 업무를 맡겼다.
하지만 조니 시는 공학 분야에서 실력을 쌓길 원했다. 이에 켄 타이와 함께 멀티텍을 설립한 스탠 시를 찾아 자신은 기술에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스탠 시는 그의 설명에 공감했고, 3개월 후 조니 시를 연구개발 부서에서 일하게 해줬다.
그는 연구개발 부서에서 많은 업적을 이뤘다. 중국 내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활용해 약 1만 6,000자 가량의 한자를 프로그래밍했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하드웨어와 키보드도 설계했다. 컴퓨팅 구조에 대한 기초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애플2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석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니 시는 컴퓨터 기술, 세부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한 토대도 다질 수 있었고, 신뢰도와 품질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를 얻었다. 애플2 컴퓨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는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하드웨어 설계 기술에 감탄하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길고 긴 연구개발 시기를 거쳐 멀티텍은 IBM 호환 시스템(386 PC)을 들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되는 컴퓨터 판매 전시회, 컴덱스(COMDEX, CES의 전신)에 전시하게 된다. 공개한 컴퓨터 시스템은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관계자들은 멀티텍의 PC가 PC’s Limited(델의 전신)의 제품과 견줘도 손색 없는 성능에 주목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IBM과 애플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IBM은 키보드에 애플은 응용 프로그램 소프트웨어 접근 방식에 대한 부분이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구현하려고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피해는 컸다. 멀티텍은 두 기업에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조니 시는 이를 겪으면서 독자적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즉시 스탠 시에게 이야기해 몇몇 뛰어난 엔지니어와 같이 실리콘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인생 두 번째 선택의 기로에 서다
멀티텍에서 에이서로 사명을 바꿨지만 스탠 시는 여전히 연구개발과 혁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조니 시의 열정을 높이 샀고 적극적인 지원으로 그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게 도왔다. 실리콘밸리로 떠난 조니 시와 에이서의 연구원은 이를 자양분 삼아 다양한 컴퓨터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에이서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와 호환하는 워크스테이션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조니 시의 실리콘밸리 연구개발팀도 밤을 세워가며 개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람제트(RAMJET) 1100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썬 제품과 호환하는 워크스테이션이었다.
신제품을 선보인 이후 또 다시 연구개발에 몰두하던 조니 시는 1989년, T.H 퉁(Tung)과 테드 수(Ted Hsu), 웨인 시에(Wayne Hsieh), M.T 리아오(Liao) 등 에이서 출신 엔지니어 4명이 설립한 에이수스(AsusTek)에 합류해 줄 것을 제안 받는다. 하지만 그는 4명의 엔지니어의 합류 제안을 거절한다. 대신 자본금의 60%를 지원, 그들의 열정을 지지했다.
4명의 엔지니어가 세운 에이수스는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인텔이 당시 개발한 80486(486) 프로세서 호환 메인보드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는데, 에이수스가 개발한 메인보드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큰 문제를 해결한 에이수스에 제품 개발을 맡겼고 새 프로세서 출시 이전부터 이들과 긴밀히 협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조니 시에게 '작지만 아름다운 회사'를 만들어 가자며 설득했고, 그는 1992년 에이수스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로 합류하게 된다.
에이서에서 기술 개발을 계속 이어가던 조니 시는 에이수스에 와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정기적으로 고급 전자공학 이론을 가르치고 새 메인보드 디자인의 개념적 요소들에 깊이 관여했다. 15년 가까이 에이서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그가 내세운 것은 바로 ‘연구 개발의 지속성과 투자’다. 이에 과감히 수익의 2%를 연구개발에 쓰고 10%는 인력 확보에 쓰기로 결정했다.
처음 맞이한 위기, 에이수스를 살려야 한다
잘 나가던 에이수스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2002년, 사상 최저 규모의 수익률을 발표하게 된 것. 투자 시장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매출액은 소폭 증가했지만 당시 3분기 순이익은 연속 하락해 전체 10% 감소한 효과로 나타났다. 여기에 에이수스 설립자 중 하나인 테드 수는 이 같은 결과가 내부 구조에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T.H 퉁도 "회사가 더 이상 작지만 아름답다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에이수스는 메인보드 제조가 50%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자사 라인업의 대부분을 고급화 제품들로 채웠다. 또, 주문자 생산 방식(OEM) 물량도 크게 늘어 메인보드 전체 생산량의 40%까지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이는 인텔이 푸에르토리코의 메인보드 생산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서 델이 에이수스의 OEM 고객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장 경쟁에 있었다. 당시 메인보드 제조사들은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현지 사정에 맞추고자 가격을 낮추고 출하량을 늘리는 등 노력을 기울였는데, 에이수스는 이에 대한 대처가 늦었다. 경쟁사 제품들은 에이수스 대비 50% 가량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판매량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에이수스는 생산 원가를 낮추기 어려운 구조였다. 품질에 대한 고집 때문이다. 이는 결국 OEM 제품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거래량은 늘어나지만 이윤을 내기 힘들었다. 조니 시는 이 문제가 연구개발 부문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연구개발 부서는 에이수스 설립 초기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핵심 사업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이다.
<매출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로 에이수스는 위기를 맞았다>
노트북 사업도 휘청거렸다. 1998년부터 매년 100% 가량 출하량 증가가 이어졌지만 2002년에는 연간 출하량은 목표치 150만 대에 한참 모자란 100만 대 가량에 머물렀을 정도로 기세가 꺾였다. OEM 기업들이 미디온, 콴타 컴퓨터 등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메인보드와 마찬가지로 가격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그 이유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 악화됐다. 2002년, 컴팩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한 저가 노트북 라인업을 발표했한 것이다. 에이수스의 연구개발팀은 이들 제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급스럽지만 원가절감이 잘 이뤄져 있었다. 에이수스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그들은 이 부분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수익은 계속 떨어졌다. 매출은 2001년 77억 9,000만 타이완 달러(TWD)에서 2002년 114억 7,000만 대만 달러로 오히려 늘었지만 수익은 2001년에 기록한 20%보다 더 낮아진 16%를 기록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에이수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조직 개편과 사업 영역 확대로 이겨낸 위기
이를 본 설립자 중 하나인 웨인 시에는 “좋은 시절 우리 모두 수확에 집중한 나머지 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날씨가 바뀌었으니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고 말했다. 조니 시도 그에 동의했다. 그는 인텔과 삼성의 성장을 참고하며 '거대한 사자(Giant Lion)' 전략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수익성 확대를 위해 판매처를 확장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재편하는 것이 골자다.
우선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한 계획을 공개했다. 메인보드 사업부는 입문형부터 고급형까지 라인업을 확대해 선택의 폭을 넓히고 동시에 출하량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일부 시장에 집중되어 있어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을 막고 많은 소비자들에게 브랜드 접근성을 넓히는 의도가 담겨 있다.
노트북 사업부는 OEM 전용 라인업을 투입해 고객사 입맛을 맞추고, 공급사와의 협상력을 높여 전반적인 순이익을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타이완 지역 위주로 이뤄지던 판매처는 전 세계로 확장해 영업 규모와 수익성 확보에 주력하기로 결정한다. 노트북 시장도 재편됨에 따라 제조업자 개발생산(ODM)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전략은 2003년에 공개됐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적용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경영진들을 중심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에이수스는 가장 먼저 해외 마케팅에 집중했다. 그러나 가용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이들은 전통적 오프라인 마케팅 보다 곳곳에 퍼져있는 IT 기술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바로 인터넷이다. 에이수스는 홍보 영상을 제작해 온라인으로 배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콘텐츠들을 네티즌에게 노출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용은 전통적 방식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지만 효과는 극대화 됐다. 브랜드 이미지 구축도 함께 이뤄졌다. 단단한 품질로 감동을 준다는 의미인 ‘Rock Solid, Heart Touching’이라는 슬로건을 적용한 것도 이 시기(2003년)다.
<수익성을 중심으로 한 구조개편과 사업 영역 확대는 에이수스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줬다. 출처: 에이수스>
연구개발 부서는 본연의 역할은 유지하지만 목표가 부여됐다. 에이수스의 핵심인 품질과 성능을 유지하는 것은 변함 없지만 비용적 이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추가됐다.
투자도 빼놓을 수 없다. 조니 시는 더 거대해질 중국 시장을 위해 대규모 생산 기지 건립을 추진했다. 중국 쑤저우(Suzhou)에 완공된 공장은 에이수스 설립자 중 한 명인 웨인 시에가 맡기로 했다. 이 공장의 규모는 최고 수준으로 2003년 말에는 직원 수가 대만 본사 직원 대비 4배 가량 많았을 정도다. 이 외에도 에이수스는 2003년 3월, ECS의 노트북 생산 시설을 인수하는 것과 동시에 저가 메인보드 시장 공략을 위한 애즈락(ASRock) 브랜드를 설립한다.
내외부 임직원이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통해 에이수스는 분위기 반등에 성공한다. 노트북 판매 순이익은 미미하지만 소폭 상승했으며, 몇몇 유명 노트북 제조사들도 에이수스에 OEM 발주를 넣기 시작했다. 메인보드와 노트북 설계만 하던 것에서 지나지 않고 휴대폰이나 그래픽카드, 물리연산 전용 카드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수익성도 점차 개선됐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도전과 혁신
분위기는 점차 좋아졌다. 덩치는 어쩔 수 없지 커졌지만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면역력과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한 민첩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다시 원하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이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조니 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리가미(Origami)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종이접기라는 뜻인데 이는 작은 노트북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모바일 인터넷 컴퓨팅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의 개발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삼성전자와 파운더 테크놀로지에 이어 에이수스가 합류해 제품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이 온 것이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MIT 미디어랩에서는 후진국에 PC를 보급하기 위해 100달러 노트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조니 시는 초소형 노트북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많은 노트북 사용자가 여전히 크고 무거운 물건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점에 착안했다. 게다가 개발 당시 전 세계는 금융위기로 소비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저렴하면서도 쉽게 휴대가 가능한 노트북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내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누구나 쉽게 다루고, 쉽게 즐기고, 쉽게 업무를 할 수 있는 노트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에이수스는 기술 역량을 쏟아 넣어 작고 가볍게 만든다. 그러나 누구나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낮아야 한다. 분명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는 자사의 개발 역량이라면 가능하다고 믿었다.
<조니 시의 주도 하에 개발된 Eee PC는 넷북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성공을 거뒀다. 출처: 에이수스>
2007년, 조니 시는 저렴한 가격으로 PC의 기능을 경험할 수 있는 Eee PC를 공개한다. 인텔의 초저전력 셀러론-M 프로세서를 채택한 이 노트북은 크기가 작아 휴대가 용이하면서도 PC의 기능을 경험할 수 있어 주목 받았다. 가격 또한 사양에 따라 259.99 달러에서 399.99 달러 가량에 책정해 쉽게 구매 가능했다.
넷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등장한 Eee PC는 출시와 함께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모았다. 성능은 비록 떨어지지만 인터넷이나 간단한 문서 작업을 실행하기에 부족함 없는 수준이었다. 사양에 따라 화질 괜찮은 콘텐츠 감상도 가능했다. 설정만 잘 하면 오랜 시간 지속되는 배터리 성능도 인상적이었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처음 시도했던 UMPC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고, 에이수스는 브랜드 이미지를 새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에이수스는 슈퍼카 제조사 브랜드, 람보르기니와 협력해 개발한 노트북인 VX 시리즈를 통해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각인시켰다.
조니 시의 전략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보급형 노트북인 Eee PC와 프리미엄 노트북 라인업의 선전으로 에이수스는 단숨에 톱 브랜드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메인보드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몇 개의 라인업만 전개하는 것이 아닌 시장의 요구와 환경에 따라 제품을 다양하게 구성했다. 그 중에서 게이밍 시장의 성장을 눈 여겨 본 조니 시는 게이머 공화국(Republic Of Gamers) 브랜드를 승인, 특화된 라인업을 위한 전담 부서를 꾸렸다.
이를 바탕으로 에이수스는 2007년, 약 755억 3,600만 타이완 달러(TWD)를 벌어들여 지난 2006년 기록했던 560억 2,300만 타이완 달러를 크게 뛰어 넘는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대비 34.83% 증가한 수치다.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도전과 혁신
이후에도 에이수스는 큰 도약을 위한 도전과 혁신을 이어나갔다. 조니 시는 에이수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데 OEM과 ODM 사업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 두 사업을 전격 분리시켰다. 이 결정으로 인해 페가트론(Pegatron)과 유니한(Unihan)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에이수스는 PC 및 전자 제품 개발과 생산에 주력하고 페가트론은 메인보드 및 기타 부품의 OEM 생산, 유니한은 PC ODM 생산에 특화된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이수스는 PC는 물론 스마트 기기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는 기업이다. 출처: 에이수스>
분리 후 에이수스는 더 다양한 제품의 설계와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조니 시는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 회장 겸 최고 브랜드 관리자(CBO)로서 사업 역량을 키우는데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예술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의 미적 감각이 제품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되는 모습도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대나무를 재질로 만든 노트북, 뱀부(BAMBOO) 시리즈다. 이어 뱅앤올룹슨과 협업해 만든 엔터테인먼트 노트북은 독특한 형태와 고급스러운 마감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2011년 공개한 젠북(Zenbook) 시리즈는 울트라북(Ultrabook)을 새롭게 정의한 계기가 된 바 있다.
스마트 기기 시장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에이수스의 젠폰(Zenfone)과 젠패드(ZenPad)와 같은 제품도 있었고, GPS를 활용한 기기 개발에 강점을 보였던 가민(GARMIN) 사와 손을 잡고 스마트폰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구글과의 협업으로 7인치 안드로이드 태블릿, 넥서스(Nexus) 7을 선보였다. 스마트 기기 시장에 적극적인 움직임은 오픈 핸드셋 연합(OHA) 회원 가입으로 이어졌다.
<조니 시 에이수스 회장이 가정용 인공지능 로봇 젠보를 공개하고 있다. 출처:에이수스>
이제 에이수스와 조니 시 회장은 도전과 혁신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공개한 가정용 로봇인 젠보(Zenbo)가 그것. 이 제품은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학습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인식한다는 특징을 앞세워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젠보의 등장은 에이수스가 차세대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기술 선도 기업의 면모를 알리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꾸준히 도전과 혁신을 꿈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많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니 시는 스스로 그리고 에이수스의 구성원들이 꾸준히 도전과 혁신을 꿈꾸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열정이 지금은 물론 앞으로의 에이수스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글 / IT동아 강형석 (redb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