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차고에서 실리콘밸리를 설립하다, 휴렛 & 팩커드

이상우 lswoo@itdonga.com

[IT동아 이상우 기자]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도시 산타클라라(Santa Clara)와 새너제이(San Jose) 주변에 수 많은 IT기업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다. 실리콘(규소)이 주 재료인 반도체 제조사가 이 지역에 많이 모여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만, 현재는 각종 첨단 기술 기업의 본거지이자 스타트업의 메카로 여겨지고 있다.

인텔, 엔비디아, 삼성전자(미국지사), SK하이닉스(미국지사) 등 반도체 기업은 물론 애플, 어도비 등 소프트웨어 기업과 구글, 이베이 등 인터넷 서비스 기업까지 오늘날 IT 업계의 주축을 이루는 기업 대부분이 실리콘밸리에 자리잡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입주한 IT기업
실리콘밸리에 입주한 IT기업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된 실리콘밸리

이러한 실리콘밸리가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됐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스탠포드 대학교 동기인 윌리엄 휴렛(William Hewlett)과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가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Palo Alto, 샌프란시스코와 산타클라라 중간에 위치한 도시, 스탠포드 대학교 바로 옆이다)의 한 차고에서 '휴렛팩커드(HP)'를 설립하고 음향 발진기(Audio Oscillator)를 내놓으면서 실리콘밸리 1세대 벤처 기업인 HP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HP의 창업자인 윌리엄 휴렛(왼쪽)과 데이비드
팩커드
HP의 창업자인 윌리엄 휴렛(왼쪽)과 데이비드 팩커드

실리콘밸리와 미국 IT 산업은 스탠포드 대학교가 만들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글, 엔비디아 등 수 많은 IT 기업이 스탠포드 대학교 품에서 성장했다. 실리콘밸리의 맏형인 HP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태어났다.

데이비드 팩커드는 1912년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에서, 윌리엄 휴렛은 1913년 미시건 주 앤아버에서 태어났다. 이 둘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1934년 처음 만나고 친구가 되었다. 데이비드 팩커드는 졸업 후 뉴욕에 있는 GE(General Electric)에서 잠깐 일했지만,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38년 다시 스탠포드 대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교수였던 프레드릭 터먼의 권유로 벤처 기업을 설립한다.

휴렛과 팩커드의 대학생 시절
휴렛과 팩커드의 대학생 시절

당시 미국 서부에는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지역을 떠나는 사례가 많았다. 터먼 교수는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스탠포드 대학교 주변에 연구단지를 조성했다. 이어 그가 직접 지도한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에게 창업을 권유했다.

휴렛과 팩커드의 지도교수인 프레드릭 터먼
휴렛과 팩커드의 지도교수인 프레드릭 터먼

자본금은 500달러, 가진 것은 열정뿐

1938년 휴렛과 패커드는 팔로알토 에디슨 거리의 한 차고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기업 휴렛팩커드(HP)를 설립했다. 당시 데이비드 팩커드는 막 결혼한 상태였고, 부부가 함께 살 집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월세 45달러의 조건으로 제법 괜찮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집에 딸린 차고가 HP의 첫 공장이자 사무실이 되었다. 자본금은 터먼 교수에게 빌린 538달러가 전부였다. 그들이 갖춘 장비는 데이비드 팩커드가 사용하던 중고 드릴프레스(수직으로 구멍을 뚫는 공구) 뿐이었다. 둘이 가진 것은 열정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팩커드의 차고는 차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변변찮은 공간이었지만, 휴렛과 팩커드가 시제품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터먼 교수 역시 그들의 작업과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팔로알토 의료 센터에 필요한 의료기기를 납품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이 돈만으론 부족했기에 팩커드의 부인이 스탠포드 대학교 교무처에 근무하면서 기업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보탰다.

휴렛과 팩커드가 사업을 시작했던 차고
휴렛과 팩커드가 사업을 시작했던 차고

차고에서 작업 중인 휴렛과 팩커드
차고에서 작업 중인 휴렛과 팩커드

회사를 세우고 처음으로 개발한 제품은 '200A'라는 이름의 오디오 발진기(특정 음역의 주파수를 생성하는 테스트 장비)였다. 이 것이 바로 HP가 생산한 첫 번째 제품이다. 당시 이러한 기기의 가격은 500달러 내외였다. 휴렛은 회로를 단순화하는 방법을 통해 성능을 개선하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사운드 엔지니어들이 휴렛과 팩커드가 생산한 HP 200A에 관심을 보였다. 둘은 200A를 개량한 200B를 내놓았고, 월트 디즈니는 1940년 제작한 영화 환타지아의 사운드 모니터링에 이 장비를 사용했다.

HP의 첫 제품인 오디오발진기 200A와 개량형 제품인
200B
HP의 첫 제품인 오디오발진기 200A와 개량형 제품인 200B

둘은 회사 이름을 휴렛팩커드로 할지, 팩커드휴렛으로 할 지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동전 던지기로 회사의 이름을 결정하기로 했다. 동전 던지기에서 데이비드 팩커드가 이겨서 회사 이름은 팩커드휴렛이 되어야 했지만, 정작 팩커드가 휴렛팩커드라는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해 결국 회사 이름은 휴렛팩커드로 결정되었다.

1940년에는 둘은 창고를 벗어나 제법 그럴듯한 사무실로 회사를 이전할 수 있었다(현재 이 건물은 내비게이션 판매점이 됐다).

1989년 캘리포니아 주는 HP가 탄생한 에디슨가 367번지의 허름한 차고를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로 명명하고 사적으로 등록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기업으로 말미암아 과수원만 가득하던 산타클라라 계곡이 IT 업계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팩커드가 살던 집 앞에는 '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동판이 세워져 있고, 집 뒤로 차고가
보인다
데이비드 팩커드가 살던 집 앞에는 '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동판이 세워져 있고, 집 뒤로 차고가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를 기념하는 동판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를 기념하는 동판

실리콘밸리에 협업과 혁신을 심다

휴렛은 1941년에 미 육군에 자원해 1947년까지 복무했다. 그 동안 회사는 팩커드가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HP는 무전기, 소나, 레이더 등 선박 및 항공용 군수 장비를 주로 생산했다.

1950년대 들어 HP는 빠르게 성장했다. 1957년 기업 공개(IPO)를 진행했고, 1961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이름을 올렸다. 1963년에는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 기업인 요코가와 전기와 함께 합작회사(YHP, Yokogawa-Hewlett- Packard)를 설립했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삼성전자와 합작회사(삼성휴렛팩커드)를 설립하면서 처음 발을 디뎠다.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HP(왼쪽), 아시아 진출을 위한 합작회사 YHP
설립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HP(왼쪽), 아시아 진출을 위한 합작회사 YHP 설립

HP가 발전하고 근처에 인텔 등 다른 IT 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단지가 있었던 팔로알토와 산타클라라 지역도 함께 발전했다. 도시에는 과수원 대신 고속도로와 기업의 연구소가 들어섰다. 변변찮았던 농업 중심의 도시에서 첨단 기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HP는 당시 기업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기업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1942년 모든 직원에게 건강 보험 비용을 지원했고, 사무실에도 벽이 없는 '오픈 플로어(Open Floor)' 디자인을 적용해 직원들이 쉽게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게 했다.

팩커드는 HP의 기업 문화를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1. 우리는 직원 개인을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2. 우리는 높은 수준의 성취와 기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3. 우리는 타협하지 않는 진실성(윤리)을 가지고 사업을 해야 한다
4. 우리는 팀워크(협업)를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5. 우리는 유연성을 갖추고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HP의 기업 문화와 팩커드의 경영철학은 HP 출신 직원들을 통해 실리콘밸리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지금도 실리콘밸리의 모든 IT 기업은 협업과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1993년 데이비드 팩커드가 HP 의장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면서, 휴렛과 팩커드는 모두 경영에서 은퇴했다. 70대 후반의 나이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팩커드와 휴렛은 1996년과 2001년, 83세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70여년 전 두 젊은 대학생이 작은 차고에서 세운 회사는 벤처 기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여전히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그들이 만든 기업 문화는 실리콘밸리를 통해 21세기에도 유지되고 있다.

애플과의 인연

HP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개인용 컴퓨터와 프린터를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휴렛과 팩커드는 개인용 컴퓨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 HP에 근무하던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은 둘에게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제안했다. 하지만 둘은 기업용 컴퓨터 시장에 좀 더 주력하길 원했다. 때문에 HP는 전자 계산기(9100A), 기업용 컴퓨터(2116B), 플로터(CAD 도면 출력을 위한 대형 프린터, 9862A) 등을 시장에 선보였다.

HP의 기업용 컴퓨터
HP의 기업용 컴퓨터

때문에 스티브 워즈니악은 HP를 떠나서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설립한 뒤 1976년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시장에 내놓았다. HP가 개인용 컴퓨터 'HP-85'를 시장에 출시한 것은 이보다 늦은 1980년이다. 이후 HP는 1982년 HP-86, 1983년 HP-150, 1984년 HP-110 노트북 등을 잇달아 출시했다.

이를 통해 HP는 개인용 컴퓨터, 기업용 컴퓨터(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프린터 등을 생산하는 종합 IT 기업으로 변신했다. 현재 HP는 개인용 컴퓨터와 기업용 컴퓨터 기장에서 레노버와 델과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경쟁하고 있다.

휴렛과 팩커드는 워즈니악뿐만 아니라 스티브 잡스와도 인연이 있다. 1968년 스티브 잡스는 고주파 측정기를 만들던 중, 재료가 부족하자 윌리엄 휴렛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남는 부품이 있으면 달라고 요청했다(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번호를 찾았다고 한다). 잡스의 진취성에 감동한 휴렛은 잡스에게 여름 동안 HP의 주파수 측정기 조립 라인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잡스는 당연히 이를 수락했다. 잡스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잡스는 이렇게 HP에서 일하는 동안 HP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게 된다.

HP에서 근무하던 스티브 잡스(왼쪽)와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
HP에서 근무하던 스티브 잡스(왼쪽)와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

글 / IT동아 이상우(lswoo@itdonga.com)

IT동아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Creative commons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의견은 IT동아(게임동아) 페이스북에서 덧글 또는 메신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