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의 Girl in Tech] 투자할 곳도, 투자자도 없다고?
여성 벤처 투자자들의 이야기
투자할 곳이 없다고 난리다. 작년말 기준으로 시중 5대 은행에서 잠자는 '요구불예금' 규모가 327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요구불예금이란, 예금주가 지급을 원하면 언제든지 조건 없이 지급하는 예금을 말한다. 현금과 유사한 유동성을 지녀 '통화성예금'이라고도 하는데, 요구불예금이 늘어나는 건 고객인 가계와 기업 모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금액은 작년 한 해에만 40조 원 넘게 증가했다.
벤처 스타트업계는 어떨까?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올해 정부의 모태펀드는 1,550억 원 출자에 그쳤다. 이는 2015년 3,961억 원과 비교해 절반 넘게 줄은 금액이며, 특히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증진계정 예산은 고작 300억 원에 불과하다.
가까운 나라 중국은 유명인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일이 활발해, 최근 몇 년 사이에 관심을 받았다. 2014년 리빙빙, 황샤오밍, 런취안 등 중국 유명 연예인 3명이 출자해 '스타 VC(Star VC)'라는 벤처캐피털을 설립했다. 이듬해 장쯔이 및 황보 배우가 참여해 더욱 주목받았다. 주로 뉴미디어, 모바일 기반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일례로, 한국 의류 구매 사이트 외에도 중국 금융 검색 포탈 서비스인 'Rong360'과 동영상 서비스 미아오파이에 각각 1억 5,000만 달러 이상(한화 약 2,000억 원), 5,000만 달러(한화 약 600억 원)을 투자했다. 한국 정부의 벤처 투자금 예산 보다 많은 양이다.
<리빙빙, 장쯔이 등 톱 여배우와 연예인이 출자해 구성된 중국 벤처캐피털 '스타 VC(Star VC)'>
이런 모습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를 창출한 연예인들은 주로 부동산과 식음료 혹은 음식점에 투자하기 바빴다. 그런 그들이 최근에는 벤처캐피털을 설립하고, 개인의 부를 늘리는데 집중하기보다 창업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투자로 인정 받고 있다.
미국의 여성 투자자들은 이미 흔히 말하는 '대박'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 수십억 달러의 투자회수(EXIT) 사례를 만들어낸 '제트닷컴(Jet.com)'과 달러쉐이브클럽의 투자사 '포러너벤처스(Forerunner Ventures)'는 모두 여성 투자심사역으로만 이뤄져 있다. 월마트가 온라인 유통업체 제트닷컴을 33억 달러(한화 약 3조 7,000억 원)에 인수했고, 유니레버가 온라인 면도기 판매 스타트업 달러쉐이브클럽을 10억 달러(약 1조 1,000억 원)에 인수했다. 참고로 포러너벤처스는 20년 이상 투자업계에서 일한 커스틴 그린(Kirsten Green)이 설립했고, 4명 파트너 모두 유명 소비재와 컨설팅 기업 출신이다.
<모두 여성 파트너로만 이뤄진 소비재, 이커머스 전문 벤처캐피털(VC) '포러너벤처스', 사진 출처:
forerunnerventures.com>
번체업계에서 미국이나 중국의 '여성파워'를 비교하면, 한국은 그 파워가 현저히 부족하다. 2015년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여성 CEO는 찾아보기 힘들고, 여성 투자심사역도 57명에 불과해, 전체 747명 중 7.1%만을 기록했다.
한국은 벤처업계도, 벤처투자시장에서도 여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여성벤처협회에 따르면 여성벤처사 비율은 2007년 3%에서 2016년 8%로 증가했지만, 전체 벤처시장 역시 2배 정도 성장했다. 빠르게 성장한다는 면에서 희망적이지만, 절대적인 여성 숫자는 적다. 운동경기로 빗대면 좋은 선수가 많아야 하는데, 기본 선수 자체가 적다는 것이 분석 포인트다. 이영 여성벤처협회장은 "불이익, 실패 확률이 높은 곳에 가서 힘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출전하지 않는 똑똑한 여성들이 있어 이들을 장려하고 싶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작년 이맘때쯤 일본 히로시마에서 양성평등을 주제로 세계경제포럼 산하의 글로벌 쉐이퍼가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 스타트업 투자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프레스코 캐피탈(Fresco Capital)의 앨리슨 바움(Allison Baum) 대표와 함께 여성창업가로 참여했다. 그녀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골드만삭스에서 4년 정도 경험을 쌓은 후, 아시아 지역 교육 스타트업 등에 적극적인 투자를 벌이고 있었다.
필자는 몇 안되는 한국의 여성 스타트업 대표였기에 운 좋게 초대된 것이었지만, 패널 토론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았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스타트업의 남성과 여성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독특한 특징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과장되게 혹은 소극적으로 피칭하는 방식이나, 매크로(Macro) 또는 마이크로(Micro) 경영하는 등 스타일이나 태도가 다르다더라. 또한, 여성 투자심사역으로서는 기업의 재무적 평가만이 아니라 직관적 감각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한다는 점, 잘 아는 분야에 주로 도전하기에 이해도가 높고, 리스크 관리나 허황되지 않는 현실적인 목표와 재정관리 측면은 유리한 점이라고 했다.
<세계경제포럼 산하 글로벌 쉐이퍼의 평화포럼에서 '양성평등'에 대한 세션 - 여성 창업가, 여성 투자자로 패널구성>
유독 여성들의 존재가 여전히 미미한 곳이 바로 재무나 투자 등 금융 분야이다. 국내외 통틀어 은행과 증권회사의 CEO 가운데 여성은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들다. 역사적으로 벤자민 그레이엄, 피터 린치, 워런 버핏 등 수많은 전설적인 남성 투자 대가들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에 필적하는 여성 투자 대가는 알려진 게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4차 혁명 시대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중국과 미국은 이미 여성 투자자들이 활약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에도 이미 알려진 몇몇 명성 높은 여성 투자자들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 인정받는 멋있는 여성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그런 그녀들이 더 멋진 여성 기업가들을 많이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투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Invest'에서 'vest'의 어원은 동사로, '옷을 입히다', '제복을 입히다'에서 '재산권을 부여하다', '자본을 잘 쓰도록 맡기다' 등의 뜻으로 발전했다. 이 의미에서 확장 파생된 것으로 '지위를 부여하다', '권한을 주다' 등의 뜻도 있다. 여성들의 감각과 힘으로 때로는 거침없이, 때로는 아름답게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들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핀다 손보미 마케팅 이사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후 Johnson & Johnson에서 헬스케어 프로덕트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Project AA라는 문화예술 및스타트업 마케팅 회사를 창업하고, 핀테크 기업에 회사를 매각 후, 금융상품 마케터로 변신했다. 세계경제포럼 글로벌 쉐이퍼, 대한적십자사 현 홍보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 32개국에서 여행과 봉사활동을 했으며, 2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다.
*본 칼럼은 IT동아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핀다 손보미 마케팅 이사(bomi@find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