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 내 인문학의 시작은 '강의 유치'가 아닌 '환경 조성'

이문규 munch@itdonga.com

[IT동아]

몇 년 전에 시작된 인문학 열풍 속에서, 인문학은 기업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로도 인식되고 있다. 기업들은 인문학이 그 자체로 통찰력과 창의력을 제공하거나 다른 학문과 융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러한 믿음을 증명하듯 대기업 CEO들은 앞다투어 대학 인문학 과정을 수료하고, 임직원들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문학 강의를 맹목적으로 듣는다.

기업 CEO와 임직원이 인문학 소양을 높인답시고 무작정 강의를 듣는 모습은 마치 구직자들이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으려 노력하는 모습과 많이 닮은 듯하다. 2~3시간 동안 강당에 모여 초빙 강사가 강의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종교, 철학, 역사, 예술 등에 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으려 한다. 그들은 이런 지식이 미래에 돈줄이 될 만한 '어떤 것'을 끌어낼 것이라 믿는다. 과연 이러한 지식 습득 방식이 인문학 소양을 높이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기업 내 인문학 강의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기업 내 인문학 강의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토익 단기 속성반에서는 질문 의도를 해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대신 '정답을 잘 찍는 스킬'을 주로 배운다. 이를 통해 고득점을 받으면 우리는 그저 '영어 점수가 올랐다'고 하지, '영어 실력이 늘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인문학 강의를 통해 쌓은 종교, 철학, 역사에 관한 지식은 그저 머릿 속 '지식'으로 머무를 뿐, 그 자체가 창의력/통찰력 향상에 직결되기는 쉽지 않다.

그럼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이 읽고, 스스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생각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업이 해야 할 것은, 'A는 B이다'라는 주제의 강의 유치가 아닌, 임직원 스스로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인문학적 환경'이다.

웹보안 기업 '펜타시큐리티시스템'은 '캠프 이그나이트(CAMP IGNITE)'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캠프 이그나이트에서는 임직원들이 모여 어떤 리더가 될 것인지 고민하고, 좋은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한다. 직급이나 연차에 의해 만들어지는 리더가 아니라, 충분한 고민과 생각, 토론을 통해 인문학 소양을 갖춘 리더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메디컬/코스메틱 컨설팅 업체 '움트'에는 인문학의 핵심인 독서와 토론을 위한 소모임 '생각중'이 있다. 시대나 장르에 상관없이, 각자가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선정하여 돌아가며 읽고, 그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공유하고 토론한다. 고전은 물론 시집에서 만화책까지 임직원들이 읽는 책도 다양하다. 인문학 강의는 강사가 가진 생각에 동조되거나 그리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에 비해 생각중 모임에는 누군가의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열려있다. 그 생각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견해를 접하고,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비판적인 시각도 마주할 수 있다.

필자의 회사 또한 인사 평가 과정에 '인문학 글쓰기' 항목이 기본 포함된다. 가비아의 모든 임직원은 평가 시즌에 '에세이'를 제출한다. 업무 성과와는 별개로, 그동안 자신의 노력과 고민, 그 결실에 대해 되돌아보고, 그것을 글로 자유롭게 옮겨 적는다.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글쓰기는 산발적으로 뻗어가는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되새김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다. 글쓰기 주제는 '나 자신'으로 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 글로 정리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수치와 등급에서 벗어난 새로운 평가 기준을 제시하며, '나'라는 '사람에 관한 공부'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문학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밖에 기획실에는 '미니시리즈', 디자인실에는 '그그빠빠', 개발실에는 '생활코딩' 등의 사내 교육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내 교육은 어떠한 직무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나 이론, 스킬 등을 배울 수 있어 신입사원들의 참여가 특히 많다. 모든 임직원들은 이러한 사내 교육을 통해 다른 직무의 동료들이 가진 생각이나 태도, 가치관 등을 간접 경험하고 있다.

가비아 개발실 사내 교육
'생활코딩'
가비아 개발실 사내 교육 '생활코딩'

<가비아 개발실 사내 교육 '생활코딩'. 제공=가비아>

기업에서 인문학의 가치는 임직원들이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남들과 다르게 사고하는 데 있다. 이러한 능력을 인문학 소양이라고 정의한다. 위 기업들의 인문학 사고 환경은 자신이 안주한 일상 환경과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소양과 맞닿아 있다.

십여 년에 걸친 정규 교육 과정을 밟으며 우리는 정답을 빨리 찾는 방법만 배웠다.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면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속 시원히 알려줄 무언가나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정답을 좇으려 하는 태도는 생각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답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맹목적 인문학 강의는 또 다른 제약과 울타리를 만들게 된다. 그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아가는 인문학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우리네 기업이 해야 할 일이다.

글 / 조양아 (jya@gabia.com, 가비아 콘텐츠기획팀)

가비아 콘텐츠기획팀
조양아
가비아 콘텐츠기획팀 조양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가비아 콘텐츠기획팀에서 자사 서비스 및 교양/정보 콘텐츠 집필/제작/편집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자사 IT서비스/인프라 지식창고인 '가비아 라이브러리'를 운영하며 고객들에게 유용한 IT 및 일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기술 전문 기업인 자사에 '인문학적 기운'을 불어 넣는데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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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IT동아 이문규 (munch@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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