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세상 모든 웹 페이지를 품으려는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

강일용 zero@itdonga.com

[IT동아 강일용 기자]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 애플과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과 마크 저커버그. IT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과 그 기업의 창업자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름이다. 감히 혁신의 아이콘이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셋 못지 않은, 어쩌면 셋보다 더 혁신적일지도 모를 한 사람에 대해선 잘 모른다. 래리 페이지(Larry Page). 구글의 공동창업자이며, 현 최고경영자.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손꼽히는 구글을 이끄는 그의 삶과 철학을 이해하면 구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제공: 구글)>

니콜라 테슬라를 존경하는 컴퓨터 신동

래리 페이지는 1973년 미국 미시건주 이스트랜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칼 페이지는 미시건주립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였고, 마찬가지로 모친 글로리아도 컴퓨터 교수였다. 컴퓨터를 전공한 부모 슬하에서 페이지 역시 컴퓨터 신동으로 자라났다. 6살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숙제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다. 그 학교에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한 첫 번째 학생이었다. 12살 페이지는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전기를 읽고, 그처럼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발명가가 되길 꿈꾸게 된다.

페이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시건 대학교에 진학해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교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해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한 페이지는 평생을 함께할 친구 세르게이 브린을 만나게 된다. 동갑내기인 브린과 페이지는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웹 페이지에 관한 연구를 함께 진행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제공: 구글)>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다

페이지와 브린은 막 태동한 월드 와이드 웹(WWW)의 가치에 주목했고, 어떻게 하면 방대한 월드 와이드 웹 속에서 사용자에게 의미있는 웹 페이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연구했다.

사실 페이지가 처음부터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는 작업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페이지는 모든 월드 와이드 웹을 백업하고 정돈(인덱싱)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월드 와이드 웹은 연구원 혼자 백업하기에는 너무 방대했다. 페이지는 결국 자신의 아이디어보다 친구 브린의 아이디어인 웹 페이지에 가치를 매기는 방법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가치있는 논문은 많이 인용된다. 웹 페이지도 마찬가지다. 가치있는 웹 페이지는 다른 웹 페이지와 많이 연결(링크)되기 마련이다. 둘은 특정 웹 페이지가 어떤 웹 페이지와 링크되어 있고, 얼마나 링크되어 있는지 횟수를 분석함으로써 웹 페이지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럽(BackRub)'이라고 이름 붙인 이 연구 프로젝트에 브린이 합류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웹 페이지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웹 페이지를 뒤지는 검색 로봇(웹 크롤러)을 개발했고, 검색 로봇으로 수집한 링크 데이터를 분석할 페이지 랭크 알고리즘을 완성했다. 둘은 이 검색로봇과 페이지 랭크 알고리즘이 웹 검색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음을 파악했다.

구글의 탄생

개발 도중 백럽이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웹 페이지를 품겠다는 의미에서 10의 100승, 사실상 무한함을 의미하는 구골(Googol)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구골이라는 상표와 도메인은 이미 다른 곳에서 등록한 상태였다. 때문에 유사한 발음을 가진 '구글'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결정됐다. 1996년 8월, 마침내 세계 최대의 검색 엔진 '구글'이 세상에 태어났다. 둘은 구글의 초기 버전을 스탠퍼드 대학교의 URL을 이용해 구축했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초창기 구글의 모습 (제공: 위키피디아)>

구글은 큰 인기를 끌었다. 결국 둘이 남는 PC 부품과 리눅스를 조합해 얼기설기 만든 서버와 스탠퍼드 대학교의 URL이 구글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글을 판매하기로 정하고 야후, 알타비스타 등과 접촉해 매각에 대해 논했다. 매각 대금은 100만 달러 정도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업가치가 약 3,715억 달러(약 416조 원, 2015년 S&P 캐피탈 IQ 조사 기준)에 이르는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면 헛 웃음이 나올정도로 초라한 가격이다.

당시 검색 엔진은 조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검색 로봇이 웹 페이지를 뒤져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웹 페이지의 소유주가 검색 엔진에 자신의 사이트를 등록하는 식이었다. 검색 엔진보다 관문(포탈)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한 시절이었다. 구글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구글 본사에 전시 중인 최초의 구글 서버. 펜티엄2와 리눅스를 활용해 구축됐다. (제공: IT동아)>

하지만 정작 구글 판매는 난항을 겪게 된다. 구글의 검색 성능이 너무 뛰어나 사용자가 너무 빨리 포탈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웹 페이지 광고에 목매던 포탈의 입장에선 도입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결국 페이지와 브린은 투자를 받아 구글을 하나의 회사로써 운영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구글에 최초로 투자한 사람은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창업자 앤디 벡톨샤임이었다. 두 창업자의 열의와 구글의 가능성을 알아본 벡톨샤임은 별다른 설명도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줬다.

투자를 받은 둘은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실에서 독립한 후 수잔 보이키치(현 유튜브 최고경영자)의 집 창고를 빌려 구글을 창업한다. 이후 람 슈리람(벤처 캐피탈리스트, 현 구글 이사), 데이비드 체리턴(스탠퍼드 대학교수, 둘의 은사) ,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창업자) 등의 투자를 받아 구글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삼두정치의 시작과 복귀

강력한 검색 기능과 검색어 광고를 통한 수익원 확보 덕분에 구글은 매섭게 성장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를 강타한 '닷컴버블' 속에서도 구글은 건재했고, 거품으로 가득찬 회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최고경영자로서 페이지는 이러한 구글의 성장을 지휘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글이 기업공개(IPO)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기업공개를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보기에 페이지는 한 기업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고, 경험이 부족했다. 20대 초반 창업자가 넘치는 지금 보기에는 너무나도 황당한 생각이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해도 통할법한 걱정이었다.

페이지와 브린도 이에 동의했다. 구글의 외적 성장을 내부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내적 기틀을 잡고 대외 활동을 지휘할 경험많은 최고경영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둘은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만이 구글을 이끌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잡스가 애플을 떠날리 없지 않은가. 이내 고집을 꺽고 다른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에릭 슈미트가 물망에 올랐다. 슈미트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거쳐 노벨의 최고경영자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수십 년간 IT 업계에 종사하며 경영자로서 연륜도 충분했다. 처음 슈미트는 구글을 탐탁잖게 생각했지만, 페이지와 브린을 만난 후 생각을 바꾸게 된다. 둘의 비전과 통찰력에 감탄한 슈미트는 구글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승낙했다. 2001년, 페이지는 최고경영자 자리를 슈미트에게 승계하고 자신은 창업자로서 슈미트에게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0년 동안 구글의 얼굴은 슈미트였다. 페이지는 두문불출했다. 많은 사용자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페이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10년 간 대중 앞에 나서질 않았으니, 그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페이지가 구글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슈미트를 도와 구글의 기업 공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무엇보다 앤디 루빈과 만나 그의 아이디어인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5000만 달러에 인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페이지의 선택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알 수 있다.

10년이 흐른 2011년, 연륜을 쌓은 페이지는 구글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슈미트는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최고경영자가 모든 것을 총괄하는 미국 기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결정이다.

많은 사용자가 페이지, 브린, 슈미트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한다. 구글의 답변은 간단하다. 셋이 협력해 함께 구글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페이지는 최고경영자라는 직함을 달고 구글을 현실적인 회사로서 이끌고 있고, 브린은 창업자 겸 구글X 프로젝트 담당자라는 직함을 달고 구글 글라스, 자율 주행 자동차, 프로젝트 룬, 혈당을 체크하는 소프트렌즈 등 미래 기술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슈미트는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구글의 얼굴로서 활동 중이며, 창업자 둘에게 경영에 관한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구글 자율 주행 자동차를 시연 중인 페이지, 브린, 슈미트. 흥미롭게도 셋의 관계를 암시한다. 페이지가 운전하고, 브린이 이를 돕고, 슈미트가 조언한다. (제공: 구글)>

소통이 바로 혁신의 비결

페이지는 컴퓨터 공학자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경영자로서의 능력 역시 탁월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IT 기업을 일궈낸 그의 경영철학은 본받을 점이 많다.

먼저 구글의 소통 시스템 'TGIF(Thank God It's Friday)'를 들 수 있다. 구글은 매주 금요일 점심에 모든 직원이 한 군데 모여 자신의 생각을 전직원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 회사 경영 방식에 대한 불만 등 무엇을 말해도 된다. 페이지를 포함한 모든 임원은 이 자리에 참석해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들의 생각을 직접 설명해준다. 한국 기업은 물론 미국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정책이다. TGIF를 통해 직원들의 불만은 줄어들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페이지의 생각은 주효했다. 이메일 용량이 너무 적다는 직원의 아이디어를 듣고, 10GB 이상의 이메일 용량을 제공하는 지메일을 출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지메일은 약 9억 명이 사용하는 구글의 대표 서비스로 거듭났다.

현재 TGIF는 이름과 달리 목요일 점심에 진행한다. 이유가 놀랍다. 금요일에 TGIF를 진행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세계 구글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요일에는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진행하는 요일을 앞당겼다.

8:2 시스템도 주목할 만하다. 구글의 모든 직원은 일주일의 4일은 자신의 본업(Job)에, 하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에 종사할 수 있다. 구글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업무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강제도 아니다. 일주일 내내 본업에 종사해도 된다. 하지만 8은 본업을, 2는 하고 싶은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 직원들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카드보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직원 두 명이 장난삼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이제 가상현실 업계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기술로 거듭났다. 구글에 근무하는 한국인 개발자의 경우 자신의 본업 외에도 국내 웹 환경을 보다 검색 친화적으로 바꾸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
<구글 마운틴뷰 본사의 전경 (제공: IT동아)>

은둔형 최고경영자지만 영향력은 최고

페이지는 전형적인 은둔형 최고경영자다. 대중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슈미트나 선다 피차이 부사장에게 위임하고 있다. 틈만 나면 최고경영자가 대중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페이스북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노출을 꺼리는 페이지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페이지 본인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신경 손상으로 인한 성대 마비 때문에 페이지는 말을 오래하는 것 자체를 버거워하는 상황이다. 목소리도 많이 쉬었다. 얼마 전 구글 I/O 2015에 참가해 개발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 페이지는 쏟아지는 질문에 대부분 웃음으로 화답했다. 건강 때문에 말 자체를 아끼는 모습이다.

그가 대중과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영향력이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IT 기업 창업가 가운데 가장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손을 떼고 기부 활동에 전념하고 있고, 잡스는 슬프게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저커버그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페이스북보다는 구글의 영향력이 더 크다. 페이지는 아직 젊다. 이제 겨우 42살이다. 그의 혁신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일지도 모른다. 페이지의 생각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지 지켜볼 일이다.

쓸데 없는 얘기를 하나만 더 하자. 페이지는 젊은 시절 연구한 월드 와이드 웹을 백업한다는 계획을 결국 실천에 옮겼다. 구글을 설립하고 전세계 19위(포브스 2015년 기준)의 부자가 된 그는 구글의 막대한 서버를 이용해 전세계 웹 페이지를 백업하고, 사라진 웹 페이지를 사용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캐시 페이지 보기 서비스). 검색과 함께 어엿한 구글의 주력 서비스다. 혹시 특정 웹 페이지가 사라져 곤란함을 겪은 사용자라면, 전세계 웹 페이지를 백업하겠다는 페이지의 발칙한(?) 생각에 감탄하며 캐시 페이지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의 'IT 인물 열전' 코너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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