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선구자 - 이반 서덜랜드
[IT동아 이상우 기자]
<스마트폰과 결합해 사용하는 모바일 HMD>
오늘날 컴퓨터 출력장치 중 많은 주목을 받는 기기는 HMD(Head Mounted Display)다. HMD란 이름 그대로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비다. 책상에 놓고 사용하는 모니터(혹은 TV)와 다르게 사람의 눈 바로 앞에 화면을 띄우기 때문에 작은 장치만으로도 아이맥스 같은 초대형 디스플레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최근 등장하는HMD는 각종 센서를 통해 사용자 시선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이를 반영하는 기능까지 갖추었다. 쉽게 말해 사용자가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보이는 화면도 여기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선구자 이반 서덜랜드 (Ivan Edward Sutherland, 1938. 5. 16. ~ ) <출처: 위키백과>
이처럼 HMD는 오늘날 디스플레이 기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HMD는 무려 50여 년 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이반 서덜랜드(Ivan Edward Sutherland)가 개발한 HMD 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HMD뿐만 아니라 초기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다.
이반 서덜랜드는 1938년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 카네기 멜론 대학(당시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 학사 과정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1963년에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전자공학과 컴퓨터 과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다. 그는 버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고안한 메멕스(Memex)라는 장치에서 영감을 얻는다. 메멕스란 기억 확장장치(Memory Extender)의 약자로 오늘날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개념의 장치다.
<메멕스(Memex)는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개념의 기계로, 마이크로필름 형태의 정보를 저장해 두고, 이를 불러와 읽고 수정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이다.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인터넷과 하이퍼텍스트의 발전에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하다.>
최초의 그래픽 입력장치 스케치패드 <출처: 유타 대학교 아카이브>
그는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스케치패드: 사람과 기계의 그래픽 대화 시스템(Sketchpad: A man- machinegraphical communication system)'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스케치패드(Sketchpad)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스케치패드는 실제로 구현된 최초의 그래픽 입력 장치다. X/Y 좌표를 인식하는 화면과 '라이트 펜'이라는 일종의 디지타이저(전자펜)로 구성됐으며, 링컨 TX-2 컴퓨터에서 작동한다.
이전까지 컴퓨터를 통해 모니터에 표시할 수 있는 내용은 기껏해야 문자 몇 개 정도였다. 여기에 선이나 도형을 그리는 등의 작업은 오늘날처럼 쉽지 않았다. 이반 서덜랜드의 스케치패드는 사용자가 원하는 내용을 모니터에 즉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라이트 펜을 이용해 선을 입력하는 모습 <출처: 유튜브 동영상 Ivan Sutherland : Sketchpad Demo 캡쳐>
선을 긋는 것은 기본이고, 선을 이어 만든 도형을 하나의 객체(Object)처럼 묶어 움직이거나 객체의 크기를 조절하는 작업도 가능했다. 마치 오늘날 태블릿을 사용해 PC에 그림을 입력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이러한 컴퓨터 그래픽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자가 프로그래밍 등의 번거로운 작업 없이 라이트 펜이라는 도구 하나만으로 직접 입력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초기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큰 영향을 줬다. 미국의 기술 전문지 아메리칸 머시니스트(American Machinist)는 ‘이반 서덜랜드의 스케치패드는 3D 컴퓨터 모델링과 시각화 시뮬레이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컴퓨터 그래픽과 CAD/CAM의 기초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링컨 TX-2에서 스케치패드를 시연하는 이반 서덜랜드 <출처: Computer History Museum>
그는 스케치패드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튜링 상'을 수상했다. 또한, 스케치패드는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온라인 시스템(NLS: oN Line System)을 개발하는 데도 큰 영감을 줬다. NLS는 그래픽 기반의 사용자 환경(GUI: Graphic User Interface)을 바탕으로 하이퍼텍스트를 통한 문서 연결 기능, 네트워크를 통한 원격 회의 등을 갖춘 시스템이다. 이 NLS를 바탕으로 오늘날 인터넷의 전신인ARPANET이 탄생했으며, 하이퍼텍스트의 기초를 세웠고, 입력 장치인 마우스가 탄생했다.
GUI 기반의 온라인 회의 시스템인 NLS
이반 서덜랜드는 1965년 '궁극의 디스플레이(The Ultimate Display)'라는 기고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궁극의 디스플레이는 컴퓨터 내부에서 물질(그래픽 혹은 프로그램)을 제어할 수 있는 방과 같은 공간이 될 것이다. (중략) 이러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사용자가 문자 그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될 수 있다"
이반 서덜랜드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전기공학과 부교수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에 그의 제자인 밥 스프로울(Bob Sproull)과 함께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위한 HMD를 개발한다. 이 장치는 천장에 부착해서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다모클레스의 검(The Sword of Damocles)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초기형 HMD 장치인 '다모클레스의 검'
다모클레스의 검이라 불리는 이 장치는 아주 단순한 구조로 구성돼 있다. 양안 디스플레이와 머리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기계식 장치 등이 있으며, 추적 장치 크기와 무게 때문에 머리에 직접 쓸 수는 없었다. 이 장치로 구현한 화면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조악했고, 허공에 몇 개의 선으로 이뤄진 입체 도형을 띄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그래픽 기술의 수준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반 서덜랜드의 HMD는 모니터의 화면을 벗어나 사용자가 컴퓨터 세상에 직접 들어가 여러 프로그램을 제어할 수 있다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기술이 점점 발전해 오늘날 가상현실 게임이 탄생하고, 사용자가 가상현실 세계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센서 기술이 등장하면서 '궁극의 디스플레이'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공개한 홀로렌즈. 증강현실을 이용한 HMD로 이 장비를 썼을 때 허공에 나타나는 각종 컴퓨터 그래픽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68년에는 그의 친구인 데이비드 에반스(David C. Evans)와 함께 '에반스&서덜랜드'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실시간 하드웨어(사용자가 입력한 내용을 즉시 반영하는 하드웨어), 3D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 프린터 언어 등의 영역에서 선봉장이 된다. 또한, 이 회사에서 근무하던 존 워녹(John Edward Warnock)은 오늘날 최고의 그래픽 솔루션 개발사인 어도비 시스템즈를 설립했고, 짐 클락(James Henry Clark, 마크 안드레센과 넷스케이프를 설립하기도 했다)은 실리콘 그래픽스를 설립한다.
이반 서덜랜드와 데이비드 에반스 <출처: 유타 대학교 아카이브>
이반 서덜랜드는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했다. 텍스트만 나타나던 화면에 3D 입체 그래픽을 표시함으로써 컴퓨터와의 상호작용을 더 쉽게 만들었다. 이러한 개념은 점점 더 발전해 오늘날 윈도우나 맥OS 같은 그래픽 기반의 컴퓨팅 환경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DOS를 사용했던 사람이라면 오늘날 GUI의 편리함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그가 고안한 HMD 역시 오늘날 디스플레이 기술, 특히 게임 분야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사용자의 시선을 따라 화면이 움직이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소리의 움직임까지 포착해 조금 더 몰입감 높은 가상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내가 있는 거실을 게임 속 공간으로 만드는 방식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글 / IT동아 이상우(lswoo@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의 'IT 인물 열전' 코너에도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