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고독한 천재, 트랜지스터의 아버지 '윌리엄 쇼클리'
[IT동아 김영우 기자] 참으로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의 능력이 동등하지 않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누구는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그다지 좋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도, 또 누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단순히 운이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황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타고난 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남들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천재’는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는 천재 특유의 고차원적인 사고를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능력에 대한 질투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능력은 뛰어난데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로운 천재라면 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대 컴퓨터 기술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Transistor)의 개발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Jr.)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Jr, 1910. 2. 13 ~ 1989. 8. 12) <출처: 위키피디아>
소문난 영재 학생, 쇼클리
윌리엄 쇼클리는 1910년 2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기술자였는데, 8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 능력이 뛰어났으며, 어머니의 경우, 명문 스탠퍼드대학 출신에 미국 최초의 광산측량사였다고 한다. 윌리엄 쇼클리 역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의 부모는 학교 교육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의 지식욕과 탐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정에서도 따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다만, 그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평생을 지능지수(IQ) 연구에 바쳤던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스탠퍼드대 교수였던 루이스 터먼(Lewis Terman, 1877~1956)은 1921년, IQ가 높은 학생들을 선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영재 학생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쇼클리 역시 그의 연구 대상 중 한 명이었는데, 그가 분석한 쇼클리의 IQ는 120을 좀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쇼클리는 터먼 교수의 집중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다만 이런 쇼클리가 IQ에 따라 사람을 차별대우해야 한다는 우생학의 신봉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벨 연구소 입사, 원폭 투하에도 관여
아무튼 쇼클리는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22세인 1932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3년후인 1936에는 염화나트륨 내의 전자띠의 구조(Electronic Bands in Sodium Chloride)에 관한 논문을 통해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그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클린턴 데이비슨(Clinton Joseph Davisson, 1881~1958)의 눈에 띄어 26세 나이에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벨 연구소의 일원이 된다. 벨 연구소에서 쇼클리는 고체물리학에 관한 다수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명성을 높였다.
쇼클리의 보고서는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오른쪽)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군사 기술 연구에 참가하기도 했다. 레이더, 대잠수함용 기뢰의 투하 패턴 최적화, 폭격기용 레이더 유도 폭탄 조준기의 연구 등에 관여했으며, 이를 통해 쌓인 명성을 통해 미 국방부의 전략 결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7월, 쇼클리는 ‘일본군을 함락시키기 위해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을 개시하면 5백만~1천만 수준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는 미군이 상륙 작전을 포기하는 대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진공관 대체용 차세대 소자 개발을 위해 모인 3인
트랜지스터 개발의 주역인 존 바딘(왼쪽), 윌리엄 쇼클리(가운데), 월터 브래튼(오른쪽) <출처: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 당시 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전자 증폭기의 개발이었다. 진공관은 20세기 초반에 개발, 당대 대부분 전자 기기의 핵심 부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부피가 커서 회로의 크기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고, 발열이나 전력 소모도 심각했다. 게다가 내구력도 취약했고 값도 비쌌기 때문에 전자기기의 소형화 및 대중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벨 연구소에서도 관련 연구를 위한 연구팀을 1945년에 조직했으며 쇼클리가 지휘하던 이 팀에는 존 바딘(John Bardeen, 1908~1991)과 월터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 1902~1987)이 참여했다. 진공관을 대체할 수 있는 반도체 기반의 증폭기를 개발한다는 기본 개념은 쇼클리가 고안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기술 고문과 같은 역할이었으며, 이를 실체화하기 위한 연구는 바딘과 브래튼이 주도했다.
얇은 반도체 조각에 수직으로 전기장을 걸면 운반체의 수를 제어, 증폭이 가능할 것이라는 쇼클리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바딘과 브래튼은 각각 전극을 연결한 게르마늄(저마늄) 박막과 도체막으로 구성된 장치를 만들어 증폭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재료와 장치의 배열을 바꿔가며 실험을 계속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최초의 트랜지스터 완성과 함께 시작된 갈등
이는 전자들이 반도체 표면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느 날, 우연히 도체와 반도체의 접점이 전해액에 접촉한 상태에서 전자의 제어와 증폭이 가능한 것을 발견했다. 이날의 실험 성과를 바탕으로 바딘과 브래튼은 1947년 12월,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인 ‘점접촉 트랜지스터(point contact transistor)’를 개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참고로 트랜지스터(transistor)라는 이름은 transfer(전송) + resistor(저항)의 두 단어를 합친 것이다.
1947년 발표된 세계 최초의 점접촉 트랜지스터 모형. <출처: 위키피디아>
다만, 이 때문에 쇼클리, 그리고 바딘과 브래튼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연구팀의 지휘자는 쇼클리였고 기본적인 트랜지스터의 개념 역시 그가 고안했지만, 실질적으로 점접촉 트랜지스터를 만든 것은 바딘과 브래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쇼클리는 다른 방식의 트랜지스터 개발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는 점접촉 트랜지스터가 대량생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일명 샌드위치 구조의 트랜지스터를 고안했다. 이 새로운 개념의 트랜지스터는 1949년 말에 작동 원리를 증명했으며 1951년 7월,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인 트랜지스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접합형 트랜지스터(Bipolar Junction Transistors, BJT)다.
이들이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진공관을 대체할 혁신적인 차세대 소자로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인한 노벨상 수상 역시 유력했다. 다만, 문제는 과연 누구를 진짜 트랜지스터의 아버지로 인정해야 하느냐였다. 학계나 언론에서도 논란이 분분했고 쇼클리와 바딘, 브래튼의 사이도 서먹해졌다. 하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쇼클리와 바딘, 브래튼을 모두 트랜지스터 개발자로 인정,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은 3인 공동 수상이라는 형태가 되었다.
명성 따라 모여든 인재들과의 불화
이후,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떠나 잠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객원교수로 근무하는 한편 1955년, 벡맨인스트루먼트(Beckman Instruments)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세웠다.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나중에 인텔(Intel)을 세운 고든 무어(Gordon E. Moore, 1929~)와 로버트 노이스(Robert Norton Noyce, 1927~1990)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인재를 갖춘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였지만 부침이 없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소장인 쇼클리의 까다로운 성격과 고압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특히, 사소한 사고라도 일어나면 이를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로 의심, 연구원들을 상대로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하는 등의 편집증적인 면모도 보였다.
결국 1957년,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를 비롯한 8명의 연구원은 쇼클리의 운영 방침에 반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떠나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했다. 이에 대해 쇼클리는 이들을 ‘8인의 배신자들’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우생학에 빠진 천재의 외로운 만년
대학에서 강연 중인 만년의 쇼클리. <출처: 위키피디아>
만년에 접어들수록 쇼클리는 점점 외로워졌고 1954년에는 첫 아내와 이혼을 하기도 했다(이듬해 재혼). 그리고 인종과 지능의 관계에 대해 깊은 흥미를 드러내며 우생학의 신봉자가 되었다. 심지어는 지능이 낮은 사람일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정책이 필요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쇼클리는 1989년 8월 12일, 전립선암으로 투병하다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 즈음 그의 주변에 친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두 번째 아내만이 쓸쓸하게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심지어 그의 자녀들조차 언론 보도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윌리엄 쇼클리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트랜지스터 개발을 비롯한 뛰어난 업적을 다수 남긴 위대한 과학자라는 호평, 자만심과 편견이 가득한 괴팍한 인간이었다는 악평이 공존하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발명품으로 인해 문명은 다음 단계로 진보할 수 있었으며, 우리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정보통신 기기 중에 그의 흔적이 없는 건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