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CPU 클럭 높이면 사랑이 이루어져요? '87Clockers'
만화의 장르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옛날에는 액션, 스포츠, SF, 연애 등 만화의 소재가 분명했기에 이런 고민이 없었지만 요즘은 요리라던가 와인, 의학을 주제로 삼은 만화가 나오는 등, 이전의 기준으로는 장르를 정하기 힘든 만화가 다수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이런 상황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해도 '87Clockers(에이티세븐 클록커즈)'같은 만화가 나올 것이라곤 기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작품의 중심소재는 난데없이 '오버클러킹(overclocking)'이다. 오버클러킹이란 PC에 탑재된 CPU(중앙처리장치)의 클럭(동작속도)를 기준치 이상으로 높여 더 나은 성능을 추구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어설프게 오버클러킹을 하다가는 PC를 망가뜨리기 일쑤다. 때문에 이를 제대로 하려면 PC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클럭을 어느 정도까지 올려야 하는지, 전압은 어느 정도 수준이 적절한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만 들어선 이 작품의 작가가 IT업계 관계자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도 한데 그것도 아니다. 87 Clockers를 그려낸 니노미야 토모코는 이전에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연애물인 '노다메 칸타빌레'로 인기를 끈 바 있는 여성작가다. 물론 여성이 오버클러킹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보는 것은 편견일 수 있으나, 사실 PC와 같은 IT기기, 그 중에서도 오버클러킹 같은 매니악한 세계를 여성 작가가 그려낸다는 것 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명문음대 다니던 부잣집 아들이 '오버클러커'된 이유
그래도 주인공인 '카나데'가 음대생이라는 것에서 노다메 칸타빌레의 자취를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명문대에 부유한 집안을 배경으로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어있던 카나데가 PC 오버클러킹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라는 여성 때문이라는 점에서 연애물의 흔적도 느껴진다.
일본 최고의 오버클러커(오버클러킹 매니아)인 '미케'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하나에게 홀딱 반해버린 카나데는 그녀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따분하게 이어지는 일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자신도 오버클러커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적당한 '디테일'로 작품의 몰입도 높여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오버클러킹을 단순히 카나데와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소도구의 하나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PC를 조립하는 과정이라던가 오버클러킹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 그리고 좀더 오버클러킹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매니아들이 발휘하는 노하우 등이 제법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버클러킹이 잘된다고 소문난 특정 원산지의 CPU를 사기 위해 아키하바라(일본 최대의 전자상가)를 뒤진다거나, 오버클러킹을 할 때 전압을 0.02V씩 올려나가는 모습 등을 보자면 작가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상당히 열심히 자료 수집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등장하는 PC관련 브랜드가 모두 가상의 것이며, 일부 복잡한 기술 관련 내용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등의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으나 이는 만화적인 재미를 위한 작가의 선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싸늘한 시선이라는 '현실', 그래도 그들은 도전한다
오버클러커들이 왜 이 세계에 빠져드는지에 대해 작가는 미케와 하나의 입을 빌어 설명한다. 오버클러커들은 자신이 튜닝한 머신으로 전세계 사람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는 마치 F1 레이스와 같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오버클러커들은 조금이라도 빠른 PC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하며, 서로 논쟁도 벌인다.
일본 최고의 오버클러커라는 미케는 CPU 냉각에 필요한 액체질소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젖소농장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으며, 같은 오버클러커끼리도 공랭식(공기를 통해 냉각)과 수랭식(액체를 통한 냉각) 중 어느 쪽이 더 우수한 방식인지 경쟁을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오버클러킹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작가는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주인공인 카나데 조차도 처음에는 도대체 왜 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이야기 중간 중간에 일반인들이 오버클러커들에게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묘사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난관을 극복하고 주인공인 카나데가 진정한 오버클러커로 거듭나 하나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는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이 만화의 작가는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다만, 2013년 4월 현재, 87Clockers는 2권까지만 출간(국내 발매사 대원씨아이, 권당 5,000원)되었다. 일본에서도 아직 한창 연재가 진행 중이니 위 질문의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선 아직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