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 법인 설립한 리벨리온, 일본의 '높은 벽' 넘을까
[IT동아 남시현 기자]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이 첫 해외 법인 설립지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에 나선다. 리벨리온이 일본을 첫 해외법인으로 설립한 이유는 2024년 1월 시리즈 B 투자에 참여한 일본의 밴처캐피털 다이와 벤처스(DGDV)와 관련이 있다. 앞서 리벨리온은 DGDV를 통해 현지 네트워크 확장 및 잠재고객 확보 등 일본 시장에서 매출을 올린 바 있다. 일본 사업은 동경대 출신으로 베인앤드컴퍼니, 무신사의 초기 일본 사업을 담당했던 김혜진 전략 리드가 이끌며, 일본 내 법인장 선임 및 기술전략 담당 인력 채용에 나선다.
리벨리온은 일본 이외에도 지난해 3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개소했고, 사우디 아람코로부터 받은 2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바탕으로 사우디법인 운영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을 첫 법인 설립지로 선택한 것에 큰 의미는 없지만, 일본 시장 자체가 AI 반도체 시장에서 주목할만한 장소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현재 일본의 AI 반도체 시장 상황과 해외 반도체 기업의 진출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짚어본다.
일본 AI 반도체 시장, 매년 30%씩 성장 가능성
데이터 기반 컨설팅 기업 imarc가 집계한 일본의 인공지능 칩 시장 규모는 2024년 8억 6400만 달러(약 1조 2680억 원)며, 2025년에서 33년까지 매년 29.4% 성장해 2033년에는 87억 7700만 달러(약 12조 8714억 원) 시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기업 그랜드뷰리서치는 일본 전체 AI 시장 규모가 2030년까지 1258억 9160만 달러(약 184조 원)에 이르고, 2025년부터 30년까지 연평균 41.8%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시장만 놓고 보더라도 매년 30%씩 성장하고, AI 시장 전체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AI 시장의 높은 성장세에는 일본 정부의 막대한 자금력이 뒷받침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해 말, 향후 10년 간 약 50조 엔(약 489조 원)이 넘는 관민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2030년까지 자국 인공지능 및 반도체 산업에 10조 엔(약 97조 원)의 공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중 일본산 첨단 칩 생산에만 4714억 엔(약 4조 6130억 원)이 배정됐다. 2027년까지 양산을 목적으로 하는 라피더스는 기존 9200억 엔(약 9조 원)에 추가로 8025억 엔(약 7조 8500억 원)을 추가로 받기로 했으며, 구마모토에 공장을 짓고 있는 TSMC, 히로시마에서 HBM, D램 등을 생산 예정인 마이크론도 수혜를 받는다.
AI 도입 속도 붙은 일본 기업, 한 박자 늦는 일본 AI 기업
일본이 AI 반도체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간 시장 경쟁에서 뒤처진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2024년, 일본 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JIPDEC)가 일본 기업 983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 IT 이용 및 활용 동향조사에 따르면 일본 내 기업 69.5%도 생성형 AI를 도입하거나 도입 예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역시 생산인구 감소에 따라 제조업과 IT 업계, 소규모 사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AI 도입 보조금을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일제 AI가 시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NTT가 2023년 공개한 쓰즈미(tsuzumi)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도입 이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고, NEC 코토미(cotomi)도 시장의 반향을 일으키진 못하고 있다. 스위스IMD가 발표하는 2024년 세계 디지털경쟁력 순위 67개국 중 미국이 4위, 우리나라가 6위인 것과 비교해 31위로 크게 떨어진다. 기술 부문은 상승 추세지만 지식 부문은 하락하고 있으며, 비즈니스 민첩성이나 인력 등 요소도 부족한 상황이다.
AI 연산 처리에 핵심인 AI 반도체 역시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미국발 반도체 패권으로 인해 생산 공장이 대만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고, 엔비디아 반도체의 수급 불안이 시장 성장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 그나마 첨단 칩 생산 역량과 막대한 자금력으로 극복하려는 게 현 상황이다. 추론 과정에서 GPU의 대안으로 쓸 수 있는 NPU 기업은 프리퍼드 네트웍스 한 곳 정도고, 차량용 AI 반도체로 덴소, 르네사스, 미쯔비시 일렉트릭이 있다. 라피더스는 8개 대기업이 협력해서 구축된 반도체 제조사로 일본 AI 반도체 전략의 핵심이나, 설계보다는 생산에 주력하는 파운드리 기업이라 논외다.
프리퍼드 네트웍스는 자체 개발한 딥러닝 프로세서 MN-코어를 활용해 에너지 효율적인 제품에 집중하며, 이를 탑재한 슈퍼컴퓨터 MN-3는 에너지 효율 기록인 그린500 랭킹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지난 10월에는 딥러닝 및 AI 작업 맞춤형 서비스인 ‘프리퍼드 컴퓨팅 플랫폼’을 선보였긴 하나 2026년 1월에 가동을 시작하고, LLM 대응 MN-코어 탑재 제품인 MN-코어 L1000도 2026년 출시가 목표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 이외에도 텐스토렌트, 콰드릭 등 두드려
프리퍼드 네트웍스의 신제품을 기다리는 일본 기업이 많겠지만, 제품 및 기업마다 효율이 다른 NPU 특성상 다른 외산 NPU 기업의 진입도 가능성이 있다. 리벨리온은 일본 법인 설립과 함께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 사업자, 통신사 등과 함께 진행 중인 AI 반도체 사업 협력에 속도를 내고, 일본 내 데이터센터 수요 대응에 나선다. 퓨리오사AI 역시 지난해 9월 팬스타엔터프라이즈와의 사업협력을 통해 IT 인프라 시장을 공략 중이다. 팬스타엔터프라이즈는 일본 NEC와 클러스터 설루션 공식 파트너로, 한일 간 IT 설루션 및 서비스 제공 사업을 공동 수행 중이다.
가장 앞서 나가는 기업은 캐나다의 텐스토렌트(Tenstorrent)다. 텐스토렌트는 일본 반도체 기술 센터(LSTC)와 협력해 향후 5년 간 200명의 일본 칩 설계자를 대상으로 RISC-V 설계, 텐식스 반도체 지식재산권, 소프트웨어 스택 등을 교육한다. 또한 일본 라피더스와는 2nm 공정 반도체 개발을 수행 중이고, 데이터센터 건설 및 운영 기업 언성필즈와 기술 제휴를 맺고 텐스토렌트 기반의 AI 클라우드 인프라 제공에 들어간다.
미국 콰드릭(Quadric)은 일본 덴소와 NPU 개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고, 자체 RISC-V IP를 추가했다. 덴소는 콰드릭 키메라 GPNPU의 라이선스를 통해 차량용 반도체 NPU 개발에 나선다. 콰드릭은 2021년부터 덴소의 칩 설계 자회사인 엔시텍스(Nsitexe)와 반도체 분야에서 협력해왔으며, 올해 1월에는 일본 법인인 콰드릭 KK를 설립하기도 했다. 물론 콰드릭의 협력 사례는 AI 반도체 시장보다는 차량, 자율주행 분야의 얘기다.
팔은 안으로 굽는 일본 시장, 팔 안쪽으로 가는 전략 필요해
리벨리온이 일본 법인을 설립했지만, 이제 시작이다. 앞서 프리퍼드 네트웍스의 컴퓨팅 플랫폼은 도쿄 데이터센터 NRT12에 설치되고, 일본의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 MC 디지털 리얼미가 운영한다. MN-코어2가 탑재될 예정이니 외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시장 규모가 큰 만큼 기회는 많겠으나, 시장 원리보다 자체 도입을 중시하는 일본 특성상 끼어들 틈이 협소하다.
이미 텐스토렌트, 콰드릭의 사례의 경우 단순히 법인 설립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 기업과의 전략적 협업이나 제품 교육 등 수익성 확보보다 신뢰관계 형성을 우선으로 한다. 자금력이나 사업 성과를 생각하면 일본에 투자하기가 어려운 건 맞지만, 제품을 팔겠다를 넘어서 일본과 함께하겠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일본에 공식 진출한 리벨리온이 앞으로 어떤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국내 AI 반도체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IT동아 남시현 기자 (sh@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