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태의 디지털자산 리터러시] 디지털자산 갈라파고스 탈출을 위한 제언 2. 실명계좌 제도 개선

[IT동아]

지금 당신이 디지털자산에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 https://it.donga.com/105437/

디지털자산 규제와 진흥의 균형이 필요한 시점 https://it.donga.com/105465/

디지털자산 갈라파고스 탈출을 위한 제언 1) 법인참여 허용https://it.donga.com/105493/

디지털자산 갈라파고스 탈출을 위한 제언 2) 실명계좌제도 개선

디지털자산 갈라파고스 탈출을 위한 제언 3) 해외 투자자 허용

한국형 비트코인ETF 출시를 위한 선결 조건

디지털자산 규제 샌드박스가 필요한 이유

건전한 디지털자산 시장을 위한 민간 중심 감시시스템 구현

디지털자산 업계의 다양성 확보와 건강한 생태계 조성


최근 세계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원화 거래량이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제치고 1등으로 올라섰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 규모를 100으로 봤을 때 세계 1위인 미국은 15배가 넘는 1522, 중국은 10배 가량인 1068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6.5%에 불과하다. 세계 외환상품시장에서 원화의 거래 비중은 고작 1.9% 수준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원화 거래량이 1등을 차지하는 기이한 현상이 앞으로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국가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보면 비이성적 결과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많은 분석가들은 한국 투자자의 투기적 특성에서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이는 원인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진짜 이유 중 하나는 개인과 법인의 참여 기회 제한이다. 우리나라 디지털자산 투자 시장은 투기 성향이 짙은 개인에게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개방됐다. 반면, 전문 금융 지식과 투자 노하우를 가진 법인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당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그림자 규제가 '법인계좌 개설 금지', '실명계좌 제도', ‘해외 투자자 금지’ 조치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이들 3가지 규제를 분석, 해결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국내 규제의 시작과 실명계좌 제도 도입

2017년 크립토 투자가 세계를 넘어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한국 투자자가 세계 시장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야말로 광풍이 불었다. 그해 12월 국무조정실은 '가상통화 관련 긴급 보도자료'를 발표한다. 당시 금융기관의 가상통화 보유, 매입, 담보취득, 지분투자 금지 조치가 시행됐다.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서비스, 줄여서 ‘실명계좌’ 또한 그 당시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실명계좌 제도란 '거래소와 같은 사업자가 특정 은행과 제휴 계약을 체결하고, 해당 은행을 이용하는 고객만 거래소 이용을 허용하는 제도'다. 디지털자산 사업자와 고객이 이용하는 은행을 일치시켜 자금세탁방지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한다. 실명계좌 발급 은행은 제휴 거래소를 통한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조회하므로 이중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실명계좌 제도는 자금세탁방지 강화가 목표지만, 은행이 제휴 거래소와 이용고객을 직접 모니터링하고 철저히 관리하라는 의미이다. 근본적으로 '거래소의 자금세탁방지, 내부통제 등 관리능력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 역할을 은행이 대신하라'는 의도가 깔린 것이다. 하나의 거래소가 하나의 은행만 이용하도록 하는, 일명 1사 1은행 조치도 '거래소에 투자금이 섞여 자금세탁방지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 때문이다.

가상자산의 디지털 갈라파고스를 벗어날 대안으로 실명계좌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 출처=엔바토엘리먼츠
가상자산의 디지털 갈라파고스를 벗어날 대안으로 실명계좌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 출처=엔바토엘리먼츠

필자도 당시 시중은행에서 금융감독원 워킹그룹에 참여해 은행권 실명계좌 업무를 담당했다. 실명계좌에 대해 논의할 때 제도의 취지는 공감했지만, 이용고객으로 하여금 은행계좌 선택권을 무시하고 특정은행 이용을 강제하는 조치였다는 점에서 수요자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 장관의 국내 거래소 폐쇄 발언 등으로 투자 자체가 전면 금지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높았던 시기였던 만큼 투자자들은 실명계좌 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2021년 9월, 개정된 특정금융정보법이 시행되면서 실명계좌 제도는 법률에 근거한 강제조항이 되었다. 가상자산 사업자(VASP)가 국내에서 법정화폐를 취급하려면 반드시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 발급확인서를 발급받아 금융위에 사전 제출하도록 법에 명시했다. 하지만, 제도 도입 이후 실명계좌를 도입한 사업자는 5곳에 불과하다.

실명계좌 제도의 효과와 부작용

실명계좌 제도가 디지털자산 시장에 안정화에 기여한 바도 분명 있다. 자금세탁방지다. 이는 국가를 넘어선 국제적 금융규율이다. 가령 국내 한 은행이 미국 검찰청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 의무 위반 제재를 받아 막대한 벌금을 내게 되더라도 한국 정부 차원에서 할 일은 별로 없다. 고작해야 해당 금융사의 배상으로 인한 국내 금융시스템 영향도를 최소화하는 조치만 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 자금세탁방지는 금융사의 존폐까지 결정할 수도 있는 강력한 초국가적 규제다. 실명계좌는 거래소와 이용고객을 동일한 은행으로 묶어 자금세탁을 원천 차단한다. 이는 은행의 신뢰 아래 자금세탁방지 업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초기 긴급 도입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장기간 적용되자 일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디지털자산 시장의 지나친 거래소 쏠림과 독과점 현상이 대표적이다. 현재 실명계좌를 도입한 디지털자산 사업자는 단 5곳이다. 이 또한 거래소에만 국한된다. 국내에서 원화 화폐로 디지털자산을 매매할 수 있는 곳이 고작 5개 거래소뿐이니 자연스레 거래량이 소수 업체에 쏠리게 된다.

금융정보분석원의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거래소의 일평균 거래량은 3.6조원, 시가총액은 43조원에 달한다. 실명계좌 도입을 못한 거래소는 거래량이 거의 0임을 감안할 때 하루 3.6조원의 거래량을 5개 거래소가 모두 처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과 비교하면 어떨까. 올해 코스피 일평균 거래량 10.7조원 규모에 국내 증권사는 66개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은 전통 금융투자 시장과 비교하여 거래량은 약 30% 수준인데 반해 사업자수는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주식시장과 디지털자산 시장을 직접 비교하긴 어렵지만 소수 거래소에만 몰리는 현상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국내 전체 거래소 중에서 실명계좌를 취득한 5개 거래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99%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실명계좌가 소수 사업자의 독점적 권한을 가속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결국 지금의 실명계좌 제도는 사업자간에 양극화를 초래하고 독과점을 조장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식의 전환과 제도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리책임 주체의 변화와 제도 개선

실명계좌 제도 도입의 궁극적 목표는 자금세탁방지 의무 준수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은행을 통한 간접규제 체계에서 벗어나 이에 대한 관리 주체를 사업자에게 되돌려놓아야 한다. 모든 사업운영의 책임과 권리는 해당 사업자에 있듯 디지털자산업도 마찬가지다. 사업자가 사업을 운영하는데 그에 대한 책임만 제3자인 은행에 지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차적 책임은 사업자가 지고 은행은 자금세탁방지 등 내부통제 관리만 지원 해야한다. 은행은 금융기관으로써 선관의무를 수행하는 이중장치 역할에 그쳐야 한다. 은행의 지나친 개입과 과도한 책임부여는 산업 성장을 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자가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은행에 전가하는 순간 장기적으로도 산업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업자의 의무와 책임을 강화하면 1사, 1은행이라는 관행도 자연스레 소멸할 수 있다. 사업자의 역할은 넓히되 위법, 불법은 엄단하여 강력한 처벌조항과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한다.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높은 관리능력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기존 신고등록제를 벗어나 전자금융업자 이상의 신규 인허가제 도입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사업자별 취급가능 업무를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른 진입장벽을 공고히 하여 준비된 사업자가 이를 수행토록 한다. 금융업도 은행, 증권, 카드, 보험 등 업종에 따른 인허가 수준을 달리하여 운영하고 있다. 전자금융업 또한 자금이체업, 대금결제업, 결제대행업 등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자본금 요건, 전문인력 보유, 내부통제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사업규모에 맞는 관리체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세계 최초 가상자산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암호자산법(Maket in Crypto-Assets, MiCA)에서도 거래, 자문, 평가, 수탁, 교환 등으로 업무분야를 세분화하고 라이선스 취득을 강제화한 바 있다.

실명계좌가 단지 소수 거래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관리체계 능력을 갖춘 사업자들은 누구든지 책임하에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권한과 책임의 공존은 기본이다. 2개 거래소가 전체 시장점유율 95% 이상을 차지하는 왜곡된 현상, 과점을 넘어 독점으로 가고 있는 불합리한 시장을 되돌리기 위해, 이제라도 인식 제고와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 실명계좌 제도의 개선 논의를 통해 시장 건전성과 투자자보호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 /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시중은행 디지털금융 전략기획자 출신으로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인피닛블록’의 공동 창업자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디지털자산 인프라 협의회 협의회장, 한국핀테크산업협회 이사, 한국핀테크지원센터 혁신금융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시대의 부, 디지털자산이 온다’, ‘블록체인 트렌드’ 등이 있다.

정리 / IT동아 차주경(racingcar@itdonga.com)

IT동아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Creative commons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의견은 IT동아(게임동아) 페이스북에서 덧글 또는 메신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