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IT] 블록체인 판례 (3) 가상자산 착오송금 판례
‘판례’란 법원이 특정 소송에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내린 판단입니다. 법원은 이 판례를 유사한 종류의 사건을 재판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합니다. IT 분야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속도보다 현저히 빠른 특성을 보여 판례가 비교적 부족합니다. 법조인들이 IT 관련 송사를 까다로워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을 거치며, IT 분야에도 참고할 만한 판례들이 속속 쌓이고 있습니다. IT동아는 법무법인 주원 홍석현 변호사와 함께 주목할 만한 IT 관련 사건과 분쟁 결과를 판례로 살펴보는 [그때 그 IT] 기고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가상자산 착오송금 판례로 본 가상자산 (대법원 2021. 12. 16. 선고 2020도9798 판결 등)
“모르는 사람이 내 지갑에 이체한 비트코인, 마음대로 써버리면 처벌받을까?”
비대면 금융거래가 보편화됨에 따라 수취인이 계좌번호나 이체금액을 잘못 기재해 발생하는 착오 송금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2021년 7월 6일 착오송금 반환 지원제도를 시행한 이후 올 6월 말까지, 약 2년간 2만3718건(385억원)의 착오송금 반환지원 신청을 심사했습니다. 그중 1만603명(149억원)을 지원대상으로 확정해 절차를 진행한 결과, 7015명에게 착오송금액 86억원을 찾아줬다고 합니다.
착오송금 반환지원 제도란, 송금인이 실수로 잘못 송금한 돈을 반환받을 수 있도록 예금보험공사가 지원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수취인이 착오송금액을 자진 반환하지 않는 경우 지급명령 등 민사상 절차를 거쳐 회수해야 하는데, 예금보험공사에서 절차 진행을 대신해 줌으로써 이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 비용을 절감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착오송금인은 반환을 거부하는 수취인을 횡령죄로 형사고소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잘못 송금된 돈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고 임의로 인출해 소비하는 행위는 횡령죄(형법 제355조 제1항)에 해당한다고 일관되게 판시하고 있고(대법원 2010. 12. 9. 선고 2010도891 판결 등 참조)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수취인이 착오송금액을 자진 반환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수취인이 형사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돈을 반환하지 않는 경우 민사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착오송금 반환지원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만약 착오송금된 것이 돈이 아니라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자산이라면 어떨까요? 이 문제는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서 달리 취급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상자산을 법정화폐로 원화와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앞서 설명한 착오송금의 법리(횡령죄) 및 지원절차가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가상자산을 금전이나 재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횡령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한 경우 성립하므로(형법 제355조 제1항), 가상자산에 재물성이 없다면 가상자산에 대해서는 횡령죄가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가상자산을 임의로 처분한 경우에는 어떤 범죄에 해당할까요? 지난 기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법원은 가상자산이 재산상 이익에는 해당한다는 입장이므로(대법원 2021도9855), ‘재산상 이익’을 객체로 하는 배임죄(형법 제355조 제2항)로는 처벌이 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배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여야 합니다(형법 제355조 제2항).
다른 사람에게 본인 소유 가상자산을 보관·관리하게 한 경우, 해당 가상자산을 임의로 처분한 관리자에 대해 배임죄가 성립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지만, 착오 송금된 가상자산의 수취인이 과연 ‘타인 사무 처리자’에 해당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상자산 착오송금인과 수취인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 관계가 없기 때문에 타인 사무 처리자의 지위를 인정할 법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착오 송금된 가상자산을 임의로 처분한 수취인에 대하여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대법원 2020도9798 판결).
비트코인이 법률상 원인관계 없이 피해자(착오송금인)로부터 피고인(수취인) 명의의 전자지갑으로 이체됐더라도, 피고인이 신임관계에 기초해 피해자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상, 피고인을 피해자에 대한 관계에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검사 측은 금전이 착오 송금된 경우와 달리 취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횡령죄 성립을 긍정한 판례를 유추 적용해 가상자산 착오송금 시 배임죄로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명문의 규정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다른 판례를 유추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행법상 착오 송금된 돈을 임의 소비한 경우 횡령죄로 처벌받지만, 잘못 이체된 가상자산을 임의로 처분하는 경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일반인의 상식에는 다소 부합하지 않을 수 있으나, 죄형법정주의(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라는 대원칙상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4월 7일 이용우 의원 등은 위와 같은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체자산 횡령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체자산 횡령죄는 재산적 가치가 있는 금융자산 또는 가상자산을 보관·관리하는 금융계좌 또는 가상자산주소에 법률이나 계약상 원인 없이 이체된 금융자산, 가상자산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한 경우에 성립하는 범죄입니다. 착오 송금된 가상자산를 임의로 처분하는 경우 이에 해당합니다. 가상자산의 제도권 편입에 발맞춰 가상자산에 관한 입법 공백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글 / 홍석현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
홍석현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제4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법무법인 주원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IT동아 김동진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