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정보 보호 강조하던 애플도 도입한 '디지털 유산'…그 배경은?
[IT동아 권택경 기자] 애플이 지난 14일 배포한 iOS 15.2 버전에서 ‘디지털 유산’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디지털 유산 프로그램은 애플 계정 설정에서 계정 소유주가 사망 후 해당 계정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유산 관리자’를 최대 5명까지 사전에 지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유산 관리자로 지정된 이용자는 접근키를 받게 된다. 이 접근키를 계정 소유주 사망 후 사망진단서 등 증빙 서류와 함께 애플에 제출하면 메시지, 사진 등 계정 데이터에 접근하고 이를 내려받거나, 계정을 삭제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접근키가 없더라도 법원 명령서를 비롯해 적법한 상속인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면 사망자의 계정 접근 권한을 얻을 수 있다. 사전에 유산 관리자를 지정하는 과정은 이 절차를 좀 더 간소화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애플이 디지털 유산 프로그램을 도입한 이유는 사회적으로 디지털 유산 상속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유산은 유품처럼 디지털 데이터 형태로 남는 사진, 글, 동영상 등 정보를 말한다. 좀 더 직접적으로 ‘디지털 유품’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디지털 유산은 특성상 블로그나 SNS 등 특정 인터넷 서비스 계정에 귀속되는 형태가 많은데, 이전까지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틀에 묶여있어서 유족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유족들이 개별적으로 서비스 업체에 소송을 제기해 데이터를 받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숨진 미 해병대 저스틴 마크 엘스워스 병장의 부모가 야후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대표적이다. 야후가 아들의 생전 이메일 기록 제공을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해 이메일 데이터를 제공받았다. 이 소송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한때 디지털 유산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다.
관련 법제화 논의는 2013년 다시 본격화 됐다. 계기가 된 건 지난 미국 버지니아주 15세 소년 에릭 래시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이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의 부모는 죽음의 단서를 알고 싶다며 페이스북 계정에 접근했지만, 페이스북은 개인 정보 보호에 관한 주법과 연방법을 근거로 이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 사건이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디지털 유산 관련 법제화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그 결과 버지니아주 주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미성년자 사망 시 유언 집행인이 그 미성년자의 이메일 등 온라인 통신기록 60일 동안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버지니아주 외 다른 주도 디지털 유산 관련 법제화 움직임에 동참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독일에서 지난 2012년 숨진 딸의 페이스북 계정 접근을 페이스북으로부터 거절당한 부모가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재판은 독일 연방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다툼 끝에 지난 2018년 부모 측 승소로 끝났다. 1심은 상속권에, 2심은 개인 정보 보호에 무게를 실었으니 연방대법원은 다시 상속권에 무게를 실었다.
이처럼 디지털 유산 문제는 ‘상속권과 고인의 개인 정보 보호라는 두 가지 가치 중 어느 것에 무게를 둘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다만 최근의 추세는 상속권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지는 흐름이다. 개인 정보 보호를 강조해왔던 애플이 디지털 유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는 점 또한 이러한 대세를 반영한다.
관련 소송에 여러 차례 휘말린 페이스북이나 구글은 이미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구글은 지난 2013년 4월 가장 먼저 ‘휴면 계정 관리자’ 기능을 도입하면서 입원, 사망 등의 이유로 계정 소유주가 일정 기간 이상 계정에 접근하지 못할 경우 계정을 대신 관리할 사람을 지정할 수 있게 했다. 휴면계정 관리자는 데이터를 공유받거나 계정 삭제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지난 2015년 기념 계정 관리자(Legacy Contact) 기능을 도입하며 사후 관리자가 게시물을 확인하거나 추모 게시물을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사후 관리자가 직접 고인 계정에 로그인하거나 메시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국내 서비스들은 아직 디지털 유산 관련 기능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관련 논의의 방점이 디저털 유산 상속 문제보다는 ‘잊힐 권리’에 찍혀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국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은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에 따라 사망자의 게시물 삭제 요청에만 응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네이버는 디지털 유산 정책을 따로 마련해두고 유족들의 고인의 블로그 글 등 공개된 정보에 대한 백업 요청을 지원한다. 하지만 계정에 직접 접근하거나 비공개 정보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직 국내에는 디지털 유산에 관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법령이 없다. 디지털 유산 상속과 관련한 법제화 논의와 시도가 2013년 전후로 이뤄지긴 했지만 그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유산 관련한 법적인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만큼, 이와 관련된 법령을 늦지 않게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글 / IT동아 권택경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