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탱크주의' 대우전자의 허무한 몰락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바둑 용어가 있다. 대마(많은 점으로 넓게 자리잡은 말)가 잡히면 해당 경기는 패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어떻게든 이를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바둑뿐 아니라 경제관련 용어로도 종종 쓰인다. 덩치가 큰 대기업이 쓰러지면 경기침체와 대량실업이 발생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으므로 경영위기를 겪더라도 결국 공적자금 지원 등을 통해 결국 살아남게 된다는 의미다. 다만, 이러한 대마불사론을 믿고 경쟁력을 제대로 키우지 않는 대기업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우그룹 로고
대우그룹 로고

이러한 사례로는 1990년대까지 한국의 3대 가전업체 중 한 곳으로 꼽혔던 ‘대우전자’가 있다. 대우전자는 한때 재계서열 2위의 재벌집단이었던 대우그룹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로 꼽혔으며,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삼성전자 및 LG전자의 입지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체적인 기술력 부족 및 모기업의 위기, 그리고 IMF 구제금융 파동 등의 요소가 겹치며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과감한 인수합병과 문어방식 사업확장

대우그룹은 1967년,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대우실업’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태어났다. 창업자인 김우중의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에 대우는 고속 성장을 했는데, 특히 1970년대 들어 정부의 수출 및 중화학 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의류, 화학, 중공업 등 폭넓은 분야에 진출해서 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대의 대우는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려나갔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기 및 전자 산업이었다. 대우그룹의 전기/전자 사업부문은 1971년에 ‘내쇼날의류’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가 1974년에 ‘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주안전자, 인우전기 등의 중견 전기/전자 기업을 차례로 인수하며 규모를 키워갔다. 대우전자는 설립 초기에 카오디오 수출이 주력 사업이었으나 1983년, 당시 상당한 규모였던 대한전선의 가전사업부문을 인수하면서 세탁기, 냉장고, TV 등의 일반 가전제품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1982년의 대한전선 TV의 광고 (출처=동아일보)
1982년의 대한전선 TV의 광고 (출처=동아일보)

대우전자는 이러한 과감한 행보를 거치며 빠르게 종합 가전 업체로 거듭났지만, 당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금성사(현재의 LG전자)나 삼성전자에 비해 경쟁력이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우전자의 사실상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전선 가전 사업부는 세탁기, 냉장고 등의 백색가전 부문에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지만 TV, 오디오 등의 흑색가전 제품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1978년에 대한가전 TV가 폭발하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 2명이 부상을 당하고 5명이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도 대우전자의 모기업인 대우그룹은 급격한 성장을 했다. 기존의 사업 영역과 더불어 건설, 자동차, 증권, 할부금융, 교육, 운수, 조선, 방송 등 그야말로 거의 모든 분야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했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이 강조한 이른바 ‘세계경영’의 슬로건 아래 영국, 중국, 폴란드, 루마니아, 인도네시아에 공장 및 연구소를 세우는 등, 해외 시장에도 공격적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대우그룹은 1980년대 들어 현대, 삼성, 럭키금성(현재의 LG)에 이어 재계서열 4위에 등극했으며, 1998년에는 삼성그룹을 넘어 현대그룹에 이은 제계서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Simple is Best, ‘탱크주의’ 선언

다만, 가전부문의 성과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편이었다. 핵심기술의 상당수를 일본 등의 외국 업체에 의존하는 등, 타사대비 자체 기술력이 떨어지는 점이 대우전자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과 적극적인 기술 수입으로 양적으론 빠른 성장을 달성했지만, 질적인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한 셈이다.

이에 1993년, 대우전자는 자사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인 ‘탱크주의’를 선보였다. 이는 1991년 대우전자의 CEO 자리에 오른 배순훈 사장이 주도한 것으로, ‘탱크처럼 튼튼한, 그리고 고장 없이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제공한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1993년, 대우전자는 ‘탱크주의’를 선언했다 (출처=동아일보)
1993년, 대우전자는 ‘탱크주의’를 선언했다 (출처=동아일보)

사실 당시 대우전자 제품은 삼성이나 LG전자 제품에 비해 품질이 조악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그리고 가전제품의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고장을 일으킬 가능성도 커지는데,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대우전자 입장에서 타사와 기능 경쟁을 하며 품질까지 높인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탱크주의를 선언한 이후의 대우전자 제품은 이용 빈도가 떨어지는 복잡한 기능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만큼 내부 구조를 간단히 하여 고장 가능성을 낮췄다. 그리고 좀 더 저렴하면서도 핵심 기능만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배순훈 대우전자 사장은 ‘소비자가 원하는 성능을 정확하게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차별화 마케팅의 성과로 ‘가전 3사’ 입지 다져

그리고 이러한 탱크주의를 강조하는 홍보활동도 대대적으로 했다. 당시 TV에서 방영하던 대우전자의 광고를 보면 ‘제품은 튼튼하게, 생활은 편리하게’, ‘불량률 0%에 도전한다’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기능이나 기술, 디자인을 강조하던 경쟁사와는 확연하게 차별화된 마케팅이었다. 그리고 자사 제품 구매 후 1개월 이내에 불량이 확인될 경우, 제품을 교환해 주거나 전액 환불해주는 정책도 발표했다.

대우전자의 이러한 차별화 마케팅은 업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실제로 브랜드 이미지 개선에 상당한 효과를 봤다. TV 광고에 직접 출연한 배순훈 사장이 ‘탱크박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경쟁사 대비 크게 떨어지던 판매량도 상승해 삼성전자, LG전자 등과 당당히 경쟁하는 ‘가전 3사’의 위치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냉장고와 같은 백색가전 분야에선 경쟁사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인지도를 갖추게 되었다.

기본기 부족과 모기업의 위기 앞에서 무너진 ‘탱크주의’

다만, 이러한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캠페인은 한계도 있었다. 복잡한 기술을 최소화해 고장 가능성을 낮춘다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그만큼 대우전자가 첨단기술에 약하다는 현실을 실토해 버린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대우전자는 1991년 전후부터 인공지능 기능을 갖춘 세탁기, 캠코더, 에어컨 등을 발표하고, 1996년에 당시로선 첨단 제품이었던 PDP 방식의 평판 TV를 개발하는 등, 탱크주의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체 기술력 강화에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대우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7년 말,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든 IMF 외환위기와 더불어 모 기업인 대우그룹은 경영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대우그룹은 1999년, 삼성그룹과 협상을 벌여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교환하는 빅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우그룹 해체를 보도한 1999년 8월 30일 KBS 뉴스(출처=KBS)
대우그룹 해체를 보도한 1999년 8월 30일 KBS 뉴스(출처=KBS)

결국 같은 해 8월, 대우전자를 포함한 그룹 전체가 워크아웃을 통한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분식회계 혐의로 조사를 받던 김우중 회장이 해외로 도피함에 따라 대우그룹은 그야말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이후 대우전자는 상당수 사업부문을 청산하고, 2006년에 파산 선고가 내려졌다.

계속되는 부활 시도, 하지만 너무나 아득한 영광

이후의 대우전자는 주인과 기업명이 몇 번이나 바뀌며 부침을 겪었다. 대우모터공업이 대우전자의 주력 사업부문을 인수하여 2002년, 회사이름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바꾸어 영업을 지속했으며, 2013년에는 동부그룹에 인수되어 ‘동부대우전자’로 기업명을 바꿨다. 그리고 2018년에는 대유그룹에 인수되어 다시 기업명이 ‘대우전자’로, 그리고 2019년에는 ‘위니아대우’로 바뀌었다.

대유그룹 산하 ‘위니아대우’의 로고 (출처=위니아대우)
대유그룹 산하 ‘위니아대우’의 로고 (출처=위니아대우)

다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기준 위니아대우의 총 매출액은 1조 2,740억 원 수준으로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매출액이 수십조원에 이른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예전 ‘가전 3사’의 일원으로 불리던 대우전자의 영광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대마불사’는 없다

과감한 인수합병과 해외진출, 그리고 이를 위해 막대한 부채를 감수하는 차입경영이 과거 대우그룹의 기본적인 비즈니스 전략이었고, 그룹의 일원인 대우전자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자체적인 기술 개발에 소홀했으며, 부족한 기술은 해외에서 사 오고, 나머지는 마케팅을 통해 때우는 전략을 지속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규모는 커졌을 지 언정, 진정한 경쟁력을 획득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위기가 닥치자 허무하게 무너졌다. 한때 잘 나가던 기업이 얼마나 허망하게 쓰러질 수 있는지, 그리고 ‘대마불사’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대우전자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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