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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고르는 프린터 시장, 1위 사업자 HP의 선택은?

김영우

[IT동아 김영우 기자] '시장 1위'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그만큼 해당 기업의 능력이 뛰어나고 브랜드에 대한 고객들의 믿음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다만, 1위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1위 사업자는 당연히 모든 경쟁사들에게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는데다 고객들 역시 항상 그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시점이 가장 위험하다. 다른 기업들은 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 그만이지만, 1위 기업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트렌드를 만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 자리에서 밀려나곤 한다. PC(개인용 컴퓨터)의 원조이면서도 자사의 호환 제품에게 밀려나버린 IBM의 PC, 평판 TV 시대의 개막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사장되어버린 소니의 트리니트론 TV, 브랜드 수만 많고 차별화된 차량을 제공하지 못해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은 GM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업용 시장 공략 강화하는 HP

최근 프린터 시장도 위와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가정용 프린터의 수요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점이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태블릿과 같은 모바일 기기가 대중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디지털 문서나 사진을 볼 수 있는 세상이 왔고, 종이 문서나 사진에 대한 수요는 당연히 줄어들었다. 실제로 올해 초 한국IDC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프린터(복합기 포함) 출하량은 재작년에 비해 7.3% 줄었으며, 특히 잉크젯 제품의 출하량이 13.0%나 감소했다.

HP의 기업용 프린터 제품군(출처=HP)<HP의 기업용 프린터 제품군(출처=HP)>

이와 관련해 세계 1위 프린터 제조사인 HP(Hewlett-Packard)의 전략은 주목할 만 하다. HP는 작년 기준, 3,900만대에 달하는 프린터 / 복합기를 출하,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서 정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10여 년 전에 비해 30%가까이 줄어든 수치다. HP 역시 전체적인 시장 축소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5 ~ 2017년 국내 프린터 시장 추이(출처=한국IDC)

<2015 ~ 2017년 국내 프린터 시장 추이(출처=한국IDC)>

이에 따라 최근 HP는 성장세가 둔화된 가정용 시장 보다는 아직 수요가 살아있는 기업용 시장에 힘을 기울이려 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IDC 조사에서 잉크젯 제품군의 출하량이 크게 줄어든 반면, 레이저 제품의 출하량은 소폭(0.4%) 증가했다. 잉크젯 제품은 주로 가정용, 레이저 프린터는 주로 기업용으로 쓰인다.

가정과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스마트워크 및 문서 전자화, 전자결제 시스템 등이 도입되어 예전보다 종이 문서의 중요도가 낮아지긴 했지만, 전반적인 종이 사용량 자체는 예상보다 크게 줄지 않았다.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업무 영역이 넓어진 탓이다. 업무 중에 생성되는 전체 데이터의 양이 크게 늘면서 이로 인해 생산되는 문서의 양 역시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 인수로 기업용 제품 역량 강화

지난 2017년에 HP가 삼성전자의 프린터 사업부를 인수한 것도 기업용 프린터 관련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다. 알려진 대로 HP는 세계 1위의 프린터 제조사지만, 잉크젯 영역의 비중이 컸다. 물론 HP 역시 레이저 프린터 제품을 다수 생산, 판매하고는 있었지만 잉크젯 부문의 명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대로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는 레이저 프린터 쪽의 비중이 컸으며 핵심 기술도 상당수 갖춘 상태였다. HP는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를 인수하며 수천 건에 달하는 A3 및 레이저 프린터 관련 특허, 그리고 1,000여명의 연구 인력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업용 프린터 시장은 레이저 및 A3 제품의 비중이 크다. 이번 인수를 통해 HP의 기업용 프린터 역량이 강화되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우리 프린터 해킹하면 1만 달러 드립니다'

제품의 기능 역시 최근의 기업환경에 최적화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보안성이다. 프린터에 네트워크 기능 및 클라우드 접속 기능이 탑재되면서 그만큼 작업 능률이 향상되었지만 그만큼 해커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기업용 프린터는 간이 서버의 기능도 수행하므로 해킹을 당할 경우, 피해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11월,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컴퓨터비상대응팀(US-CERT)는 네트워크 기능을 갖춘 프린터가 보안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HP는 자사 프린터의 보안성을 강조하고 있다. 제품을 부팅할 때마다 악성코드를 탐지하고 바이오스(펌웨어)의 상태를 확인해 이상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치료하는 기능, 그리고 장치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정상 코드 외의 다른 코드의 침입 여부를 가려내는 런타임 침입 탐지 기능 등을 탑재했다. 이에 더해 올해 10월 HP는 자사 프린터의 보안 취약점을 발견해 이를 보고하면 최대 1만 달러의 상금을 지불하는 버그 바운티(bug bounty)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구매보다는 렌탈, A3 보다는 A4?

가정용 프린터에 비해 비싸고 덩치가 큰 기업용 프린터의 단점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최근 HP는 'HP 스마트 렌탈 600'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이는 구매보다는 렌탈을, 그리고 기존 A3용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공간을 덜 차치하는 A4용 제품을 내세우고 있다.

구매보다는 렌탈, A3 보다는 A4 제품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HP의 홍보 자료(출처=한국HP)<구매보다는 렌탈, A3 보다는 A4 제품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HP의 홍보 자료(출처=한국HP)>

실제로 시장 조사기관인 인포트랜드(infotrends analysis, 2012)의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 A3 문서를 이용하는 사무실의 비율은 3~4%에 불과하다. A3 출력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 속도 및 품질, 부가 기능을 강화한 A4 기업용 프린터의 렌탈 사업이 향후 시장의 대세가 될 것이라고 HP는 판단하고 있다.

장고 끝의 회사 분리, 물러설 곳이 없다

HP가 이렇게 프린터 사업을 강화하는 데는 최근 HP 회사 내의 사정 탓도 있다. HP는 2010년대 들어와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은 기업용 컴퓨팅(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등)에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수익성이 악화된 PC 및 프린터 사업부의 매각도 고려한 바 있다. 하지만 계획을 변경, 2015년에 기업용 컴퓨팅 전문업체인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Hewlett Packard Enterprise)와 PC 및 프린터 사업 등에 주력하는 HP Inc.로 회사를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HP Inc. 입장에게 있어 프린터 부문은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사업이 되었다는 의미다.

2017년 기준, 세계 프린터 / 복합기 시장에서 HP의 시장 점유율은 39.2%로, 2위인 캐논(20.0%), 3위인 엡손(18.3%)에 비해 확연히 높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시장의 시장 규모 확대를 기대할 수 없어 마냥 현실에 안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에 HP는 경쟁사 인수 및 기업용 시장 공략 강화, 자사 분리에 의한 효율성 재고, 제품 및 마케팅 차별화 등,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안을 총 동원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보가 글로벌 프린터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지켜볼 만 하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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