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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1등은 의미없다" 오늘날 LG 만든 구본무 회장

강일용

[IT동아 강일용 기자] 한국 경제계의 큰 별이 졌다. 지난 5월 20일,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향년 7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구 회장은 1995년 LG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2018년까지 지주회사 (주)LG의 대표이사로서 재계서열 4위인 LG그룹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1945년 2월 구자경 LG명예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에게는 5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셋째 동생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고, 넷째 동생은 구본준 현 LG 부회장이다. 막내 동생인 구본식 씨는 희성그룹의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구 회장은 1972년 미국 애슐랜드대에서 경영학 학사를, 1974년 클리블랜드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1975년 LG화학의 심사과장으로 입사해 기업인으로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84년 LG전자 도쿄주재 상무로 부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1986년에는 LG회장실 부사장, 1989년 LG부회장으로 발령받아 구 명예회장을 도와 LG그룹을 이끌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무 회장이 걸어온 길 1995년 2월 22일 LG그룹 회장 이취임식에서 고 구본무 회장이 LG 깃발을 흔드는 모습.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인은 가문의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은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50세 나이에 LG그룹 3대 회장으로 취임해 23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동아일보DB>

과감한 승부사 기질... 인화(人和)의 LG를 1등 LG로 바꾸다

구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승부사 기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화(사람 중심의 경영)의 LG를 1등 LG로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1995년 구 회장이 LG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사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LG그룹은 화학과 전자라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는 기업 집단이었다. LG화학, LG생활건강 등 화학쪽은 럭키라는 브랜드를 이용 중이었고, LG전자 등 전자쪽은 금성사라는 브랜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구 회장은 둘을 LG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통합했다. 럭키금성이 한국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브랜드라는 것도 변경의 한 이유다. 당시 럭키와 금성사라는 브랜드가 너무 확고해 그룹내에서도 사명 변경을 두고 무모하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구 회장은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로 통합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LG라는 전 세계 소비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사람과 세계를 상징하는 LG그룹 특유의 로고도 이때 완성되었다.

구 회장이 LG그룹을 운영하면서 가장 집중한 분야는 2차전지(재사용 가능한 건전지)와 디스플레이였다. 두 사업에 과감하고 꾸준한 투자를 진행해 화학과 디스플레이를 LG그룹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만들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왼쪽 사진은 1990년 LG트윈스의 창단식에서 밝게 웃고 있는 구 회장의 모습이다. 구 회장은 LG트윈스의 초대 구단주였다. 오른쪽 사진은 2001년 LG인화원에서 열린 사내행사에서 난타 연주를 하고 있는 구 회장(사진). 동아일보DB>

구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 도중 2차전지를 우연히 접하고 이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다. 20년 동안 2차전지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연구개발비를 투입했다. 2005년 2차전지 사업이 2000억 원에 가까운 적자를 내자 임원들은 구 회장에게 사업을 접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고인은 2차전지 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끈질기게 하다 보면 반드시 성공할 날이 온다. 전지 사업 연구개발에 더 많이 투자해라. 이제 시작일뿐이다"고 말하며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했다. 결국 구 회장의 예측이 옳았다. 2차전지는 스마트폰, 자율주행차 등 첨단 제품에 반드시 탑재되어야 하는 필수재가 되었다. 현재 LG화학은 전 세계 2차전지 중대형 분야에서 전 세계 1위, 자동차 배터리 분야에서 전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다. LG화학은 2017년 매출 25조 6980억 원, 영업이익 2조 9284억 원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렇게 LG화학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화학 기업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 회장의 결정과 지원이 있었다.

구 회장이 LG화학에서 분리시킨 LG생활건강은 지난 해 국내 화장품 업계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외환위기 시절인 1999년 당시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한 빅딜을 추진하며 LG그룹의 계열사 가운데 하나였던 LG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매각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현대그룹이 반도체 산업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외부평가기관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한 지침이었다. 구 회장은 "대승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버리겠다. 하지만 디스플레이 사업만큼은 결코 넘길 수 없다"고 버텼다. 당시 LG그룹은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합작해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를 운영 중이었다. 구 회장은 LG디스플레이에 LG화학처럼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자하며 전 세계 LCD 시장을 장악했다. 중국 기업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시장 선두에 올랐다. 중국 기업들이 저가 공세를 펼치자 더 고부가가치 상품인 OLED로 시선을 돌렸다. 구 회장은 2012년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은 경기침체기에도 수익성이 탄탄하다"며 OLED TV를 LG디스플레이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지정했다. 현재 LG디스플레이의 OLED는 고급 TV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QLED 패널을 제치고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구 회장은 1996년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을 설립하며 이동통신시장에 진출했다. 기업의 미래를 책임질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될 수 있는 이동통신시장을 놓고 당시 많은 기업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 회장은 유선기간망 2위 사업자인 데이콤을 인수함으로써 LG텔레콤이 유무선을 통합한 종합이동통신사로 거듭나길 바랬다. 당시 데이콤의 최대주주는 삼성그룹이었으나, 구 회장은 추가 지분 확보라는 승부수를 던져 데이콤을 품에 안았다. 2010년 구 회장은 LG텔레콤(무선통신), LG데이콤(기간통신망), LG파워콤(유선통신) 등 3사를 합병해 LG유플러스를 출범시켰다. 지금도 LG유플러스는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을 내며 LG그룹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구 회장은 LG그룹이 화학, 전자, 통신이라는 세 가지 축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찾길 원했다. 고인이 눈을 돌린 분야가 바로 자동차 전장(전자장비) 사업이다. 지난 2013년 전장 사업을 담당하는 VC사업본부를 신설하고, 얼마 전 1조 4440억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오스트리아 헤드램프 기업인 ZKW를 인수하는 등 LG그룹의 전장 사업 규모를 확대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무 회장 "브렉시트, 혼란을 기회로" 구본무 LG그룹 회장(사진)이 2016년 7월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임원 세미나에서 이같이 말했다. 동아일보DB>

한편 구 회장은 인화의 LG라는 본연의 경영 정신도 잊지 않았다. 2005년 오랜 동업자였던 허씨 집안과 동업을 정리하면서 아무런 잡음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구 회장의 오랜 지인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구 회장은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켜 화학, 전자, 통신 등의 산업을 세계 일류의 반열에 올려 놓은 혁신적인 기업가였다"며, "구 회장의 의지를 받들어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한 단계 더 도약하는 한국 경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인을 추도했다.

물론 구 회장에게도 뼈 아픈 기억이 있다. 정부의 압력으로 LG반도체를 강제로 매각해야 했던 일이다. 현재 반도체 사업을 진행 중인 삼성과 SK가 전 세계적인 메모리 호황에 올라타 천문학적인 매출과 영업이익을 내는 것을 보면 더욱 쓰라릴 수밖에 없다. LG그룹은 2007년 60주년 사사를 출간하며 '인위적인 반도체 사업 빅딜은 한계 사업 정리와 핵심 역량 집중이라는 당초 취지와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평가는 후일 역사의 몫이다"고 당시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LG반도체 매각 대금으로 데이콤을 인수해 이동통신이라는 안정적인 캐시카우를 확보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구 회장이 이끄는 LG전자는 2010년부터 대두된 모바일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스마트폰 사업이 적자 행진을 계속하는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사람 중심의 정도 경영... 부정한 1등은 의미가 없다

구 회장이 내세운 또 하나의 경영이념은 정도(正道) 경영이다. 23년간 한결같이 지켜온 경영이념이다. 1등 LG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도 경영의 틀 안에서 진행된 노력이었다. 고인이 정도 경영을 기업 슬로건으로 내세우자 많은 임원들이 정도라는 단어에 우려를 표했다.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사도(邪道)도 많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구 회장은 정도 경영이라는 뜻을 관철했다. "1등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1등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고인의 이런 정도 경영의 대표 사례가 기업인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구 회장은 평소 신문을 보다가 의로운 행동을 한 의인들 보면 이들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라고 비서진들에게 당부했다. 합법적으로 의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LG복지재단을 통해 LG의인상을 만들었다.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하다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경찰, 소방관, 군인, 시민들에게 LG의인상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회장이 1996년 1월 한국이동통신 장안동 연구소를 방문, LG정보통신 임원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상용서비스중인 CDMA장비 현황 점검하는 모습. 동아일보DB>

구 회장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번 믿고 맡기면 단기 성과가 좋지 않아도 끝까지 믿고 일을 맡기는 경영 이념을 고수했다. 어려운 시절에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도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LG그룹의 경영 상태가 나빠지자 그룹 경영진들은 구조조정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구 회장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어려울 때 사람을 내보내면 안된다며 경영진을 다독이고 다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마냥 사람을 믿는 유약한 경영인은 결코 아니었다. 2010년대에 들어 잘못된 컨설팅과 경영진의 판단으로 LG전자가 위기에 빠지자 단호하게 전문경영인을 내치고 넷째 동생인 구본준 씨를 LG전자 대표로 앉혔다. 그리고 바로 친정체재로 돌입해 강도 높은 기업 구조 개선을 실시했다.

하지만 고인에게도 치부는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이 주요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았던 차떼기 사건이다. 구 회장과 LG그룹도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고인은 (차떼기 사건 때문에) "정도 경영을 떠들던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사랑해요 LG' TV 광고를 중단하고 송년 행사에도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참석하지 않았다. 2016년 12월 국회에서 진행된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도 참석해 정부가 강요하면 기업 입장에선 이를 거부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며 정부가 부당한 기금 요청을 할 수 없도록 국회에서 관련 법을 만들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마지막까지 회사 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지난 해 4월 건강이 악화돼 첫 번째 뇌 수술을 받은 뒤에도 사업 관련 보고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일했다. 고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모님이 휴대전화를 빼앗았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일을 챙겼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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