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 라이젠 출시 1년, 확 바뀐 PC 시장
[IT동아 김영우 기자] 2017년은 AMD에게 있어 매우 고무적인 해였다. PC용 신형 프로세서 ‘라이젠(Ryzen)’의 출시로 반등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라이젠의 첫 번째 모델인 라이젠7(코드명 서밋릿지)가 2017년 2월에 처음 발표되고 3월부터 본격 출시를 시작했으니 벌써 1년이 지났다. 라이젠 출시 전후의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과를 되돌아보자.
잠깐의 영광 뒤에 찾아온 추락
라이젠이 출시되기 전인 2016년까지 AMD의 PC 프로세서 사업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플래그십 제품이었던 FX 시리즈는 최대 8개에 달하는 코어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코어 당 성능 및 전력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탓에 실질 성능은 경쟁사인 인텔의 4 코어 프로세서인 코어 i5와 경쟁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CPU와 GPU가 융합된 통합 프로세서임을 강조, 별도의 그래픽카드 탑재 없이도 쓸만한 내장그래픽 기능을 쓸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웠던 주력 제품인 APU 시리즈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격이 저렴한 건 매력이었지만, 인텔의 보급형 프로세서 역시 저렴한 가격에 쓸만한 성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인텔 프로세서의 내장그래픽 성능 역시 발전을 거듭하면서 APU의 주요 세일즈 포인트였던 내장그래픽 성능의 우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예전의 AMD에 영광의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 AMD는 업계 최초로 1GHz의 벽을 돌파한 애슬론 프로세서를 내놓았으며, 2003년에는 64비트 프로세서인 애슬론64, 2005년에는 듀얼코어 프로세서의 대중화를 연 애슬론64 X2 등을 출시하며 화제를 되었다. 이들은 당시 인텔의 주력 제품이었던 펜티엄4 및 펜티엄D보다 성능이 우수한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PC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높은 인기를 끈 바 있다. AMD가 인텔의 철통 같던 시장 점유율을 끌어내리고 20% 대까지 올라간 것도 이 때 즈음이다.
하지만 2006년, 인텔에서 성능뿐 아니라 전력 효율까지 크게 개선한 '코어2' 시리즈를 출시하고 2008년에는 이를 한 층 더 발전시킨 '코어 i3 / i5 / i7' 시리즈 등의 출시를 이어가면서 자금력과 개발력, 생산 기반 면에서 취약한 AMD는 하염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2016년 PC 프로세서 시장에서 AMD의 점유율은 한 자리수 수준까지 내려갈 정도였다.
라이젠이 출시되기 전까지 10여 년간 나온 AMD의 프로세서들은 아키텍처(기본적인 설계방식) 면에서 효율이 낮을 뿐 아니라 생산 공정 면에서도 인텔에 크게 뒤쳐진 상태였다. 모든 반도체는 제조 공정이 미세할수록 집적도를 높일 수 있으며, 이는 성능뿐 아니라 소비전력, 발열, 크기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2016년 인텔의 프로세서는 14nm(1nm는 10억분의 1m) 수준의 미세공정으로 제조되었으나, 같은 시기의 AMD 프로세서는 이보다 훨씬 떨어지는 28nm 공정에 그쳤다. 때문에 인텔에 비해 성능이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10여 년 만의 반격, 선봉장은 라이젠
하지만 2017년 3월에 첫 출시된 라이젠(코드명 서밋릿지)은 기존 AMD 아키텍처 대비 40% 가량 IPC(Instruction Per Clock, 클럭당 성능)가 향상된 젠(Zen) 아키텍처를 적용했으며, 제조공정 역시 5년 만에 28nm를 보리고 14nm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1개인 CPU 코어를 논리적으로 둘로 나눠 마치 코어 수가 2배로 늘어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가상 멀티쓰레딩 기술(SMT)을 탑재, 라이젠7는 총 8코어(물리적 코어) 16쓰레드(논리적 코어)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큰 기대를 안고 등장한 라이젠7은 나오자마자 각종 리뷰 및 벤치마크 매체에서 7세대 인텔 코어 i7(코드명 카비레이크)보다 우수한 가격대 성능비를 인정받으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어 4월에는 최대 6코어 12쓰레드 구성의 라이젠5, 7월에는 4코어 4쓰레드 구성의 라이젠3가 출시되어 역시 동일 가격대의 7세대 인텔 코어 i5 및 i3보다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AMD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던 하이엔드 데스크톱(HEDT, 전문가용을 지향하는 최상위급 PC) 프로세서 시장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2017년 5월, AMD는 최대 16코어 32쓰레드를 갖춘 ‘라이젠 쓰레드리퍼(Ryzen Threadripper)’를 공개하고 8월에 출시해 역시 큰 화제를 불렀다. 이에 대응해 인텔은 예상보다 빠른 동년 6월에 최대 18코어 32쓰레드를 갖춘 코어X 시리즈(코드명 스카이레이크X)를 출시해 수성에 나서기도 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절대적 성능 자체는 인텔 코어X 시리즈가 좀 더 우수하지만, 발열이나 전력 효율, 그리고 가격대 성능비 면에서는 AMD 라이젠 쓰레드리퍼가 더 낫다는 평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인텔의 독무대였던 HEDT 프로세서 시장에 제대로 된 경쟁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한편, 국내 가격 비교 사이트인 ‘다나와’는 2017년 연초까지 한자릿수에 머물던 AMD 프로세서의 소매점 판매 점유율이 9월에는 23.5%까지 올라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AMD의 판매 점유율이 이 정도까지 올라간 건 애슬론64 시리즈가 높은 인기를 누리던 2000년대 초 이후 정말 오래간만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만만치 않은 인텔, 새로운 국면
하지만 인텔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같은 해 8월, 인텔은 신형 프로세서인 8세대 코어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기존 7세대 코어 대비 대부분의 제품군에서 코어 수가 2개씩 증가하는 등, 단순히 기존 제품을 손보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성능향상을 꾀했다. 그러면서 제품 가격은 거의 올리지 않아 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사실 인텔은 2008년에 출시된 1세대 코어 시리즈부터 2016 년에 등장한 7세대 코어 시리즈까지 아키텍처나 공정의 개선에 집중했고, 코어의 수는 변화가 없었다. 이런 인텔의 흐름을 깨고 8세대부터 코어의 수를 늘린 건 라이젠의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기도 했다.
8세대 인텔 코어의 등장 이후, 시장은 새로운 경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참고로 초기형 라이젠(서밋릿지)는 순수한 CPU였기 때문에 내장 그래픽 기능이 없었고, 이는 인텔 코어 시리즈 대비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또한 데스크탑용 제품군만 나왔기 때문에 노트북 사용자들은 라이젠 탑재 제품을 이용할 수 없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에 AMD는 라이젠 CPU에 라데온 베가 GPU를 내장한 통합 프로세서인 신형 라이젠(코드명 레이븐릿지)을 출시했다(노트북용은 2017년 10월, 데스크탑용은 2018년 2월). 이 제품은 노트북용으로도 출시한 것 외에 내장 그래픽의 성능이 상당히 뛰어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데스크탑용 제품의 경우, 지포스 GT 1030과 같은 10만원 대 그래픽카드를 대체 가능한 성능의 내장그래픽을 탑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알뜰파 게이머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제대로 된 경쟁구도의 지속, 2세대 라이젠으로 이어질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1년 동안 라이젠이 PC 시장에 미친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거의 10여 년 동안 하락 일변도였던 AMD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에 고성능 PC를 장만하고자 하는 알뜰파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를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사실상 인텔이 독점하던 PC용 프로세서 시장에 제대로 된 경쟁구도를 형성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에는 2세대 라이젠에 해당하는 코드명 ‘피나클릿지’가 등장할 예정이다. 피나클릿지는 12nm 수준으로 제조 공정을 미세화하여 한층 더 성능을 높일 예정이다. 그리고 데스크탑용 모델의 경우는 1세대 라이젠에서 이용했던 AM4 메인보드 규격을 유지, 기존 라이젠 시스템 사용자 역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것도 눈에 띈다. 2017년 1세대 라이젠의 등장으로 본격화된 PC 프로세서 시장의 경쟁구도가 2018년에는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할 만 하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