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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카드 실종사건"

강일용

[IT동아 강일용 기자] PC의 주요 부품 중 하나인 최신 그래픽카드의 씨가 말랐다. 용산 등 오프라인 매장부터 온라인 쇼핑몰까지 어디에서도 최신 그래픽카드를 구매할 수 없다. 설령 구매할 수 있더라도 기존 시세보다 10만~20만 원을 더 주고 구매해야 하며, 이마저도 배송에 2~3주의 시간이 걸린다. 그야말로 '그래픽카드 실종사건'이라고 부를만하다.

AMD 라데온 RX 480<그래픽카드 품귀 현상이 3개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래픽카드가 시중에서 실종된 이유는 뭘까. 작년 말부터 불기 시작한 가상화폐 채굴 열풍 때문이다.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이라는 거대한 분산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DBMS)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자에게 특정한 조건의 해시값을 찾는 '해시캐시(hashcash)'라는 문제를 내고, 문제를 푸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발행되는 가상화폐의 일부를 지급하고 있다.

쉽게 말해 암호를 풀면 돈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호를 푸는데 가장 유용한 능력이 단정밀도 부동소수점 연산(FP32)이다. PC 부품 가운데 부동소수점 연산 효율이 가장 뛰어난 부품이 바로 그래픽카드(GPU)다. 물론 CPU로도 부동소수점 연산 작업을 처리할 수 있지만, 다수의 GPU를 활용하는 것보다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이렇게 다수의 그래픽카드를 활용해 가상화폐의 암호를 푸는 작업을 가상화폐 '채굴(Mining)'이라고 부른다.

이스마이너를 활용해 이더리움을 채굴하는 모습.<가상화폐 이더리움을 채굴하는 모습>

때문에 가상화폐를 채굴하길 원하는 기업형 채굴자와 개인 채굴자들이 그래픽카드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래픽카드를 정상적으로 대량 구매했으면 다행이다. 그래픽카드는 그래픽카드 개발사 > 그래픽카드 제조사 > 그래픽카드 유통사 > 소매상 > 사용자의 순으로 유통된다. 기업형 채굴자들은 여기서 유통사에서 소매상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개입해 그래픽카드를 모두 빼돌렸다. 애당초 소매상에 그래픽카드 자체가 유입되지 않도록 막아버린 것이다. 심지어 소매상이 공급받은 그래픽카드를 사용자에게 판매하지 않고, 기업형 채굴자로 변신해 직접 가상화폐 채굴에 뛰어든 사례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가상화폐 채굴 열풍 탓에 PC를 새로 장만하거나, 그래픽카드를 교체하려는 사용자들은 그래픽카드를 구매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 어렵게 그래픽카드를 구매하더라도 몇 달 전 시세보다 10만~30만 원의 웃돈을 주고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실정이다. 선량한 사용자가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엔비디아, AMD 등 그래픽카드 개발사도 함께 피해를 보고 있다. 그래픽카드 개발사 AMD의 관계자는 "시중에 공급한 라데온 RX 580 그래픽카드 1만 대 대부분이 사용자에게 판매되지 않고, 가상화폐 채굴공장으로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었다"며, "일반 사용자에게 제품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만큼 브랜드 가치가 손상되고, 향후 나올 후속 모델 판매량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어떤 그래픽카드가 실종되었나?

실종된 그래픽카드는 가상화폐를 채굴할 때 전력대 성능비(전력소모 1W당 처리할 수 있는 작업량)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메인스트림(중상급) 그래픽카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채굴 성능 자체는 하이엔드(최상급) 그래픽카드가 더 뛰어나지만, 전력소모가 심해 그만큼 전기료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보다 AMD의 그래픽카드를 이용해 가상화폐를 채굴하는 경우가 많다. AMD의 그래픽카드는 부동소수점 연산 능력 강화로 3D 그래픽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는 부동소수점 연산 능력과 함께 픽셀 쉐이더나 피직스 같은 그래픽 처리 능력을 활용해 3D 그래픽을 표현하고 있다. 같은 등급의 그래픽카드라도 AMD의 그래픽카드가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보다 부동소수점 연산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뜻. 다른 그래픽 처리 능력은 가상화폐를 채굴할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기업형 채굴자들은 AMD의 그래픽카드를 훨씬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AMD의 제품 유통량이 더 적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매진되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는 가격은 비쌀지언정 구매 자체는 가능하지만, AMD의 그래픽카드는 아예 구매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AMD 라데온 RX 580<AMD 라데온 RX 580, 가상화폐 채굴 열풍 때문에 시중에서 씨가 마른 대표적인 제품이다>

AMD 라데온 RX 580: AMD의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다. 현재 가상화폐 채굴용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제품이다. 가상화폐 채굴시 전력대 성능비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원래 가격은 30만 원대 초반이었지만, 현재는 50만~60만 원에 유통되고 있으며 이마저도 구매하기 힘든 실정이다.

AMD 라데온 RX 570: AMD의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다. 약간의 오버클락 작업을 거치면 RX 580과 대등하거나 살짝 떨어지는 채굴 성능을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역시 일반 사용자가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시중에서 씨가 말랐다.

AMD 라데온 RX 480: AMD의 구형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다. 이 제품 역시 RX 580과 대등하거나 살짝 떨어지는 채굴 성능을 보여준다. 사실 RX 580 자체가 RX 480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제품이다. 구형 모델인데다가, 기업형 채굴자들이 싹 쓸어가 시중에서 구매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엔비디아 지포스 GTX 1070: 엔비디아의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다. 지포스 계열 그래픽카드 가운데 가장 채굴 효율이 좋은 제품이다. 약간의 최적화를 거치면 RX 580보다 더 뛰어난 전력대 성능비를 보여준다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다. 구매 자체는 가능하지만, 원래 가격보다 30만 원 이상 뛴 상태다. 때문에 한 등급 위의 제품인 GTX 1080보다 더 비싸지는 촌극이 벌어졌다.

엔비디아 지포스 GTX 1060: 엔비디아의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다. 다른 그래픽카드가 씨가 말라 어쩔 수 없이 남은 것 중에서 채굴 시 전력대 성능비가 우수한 제품을 고르다 보니 눈에 띈 제품이다. 제품 구매 자체는 가능하지만, 예전 가격보다 10만 원 이상 비싸진 상태다.

엔비디아 지포스 GTX 1080Ti: 엔비디아의 하이엔드 그래픽카드다. 전력대 성능비를 무시하고, 최대한 빠르게 가상화폐를 채굴하길 원하는 사업자들이 선택하는 모델이다. 사실 전력 소모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고 한다. 제품 구매 자체는 가능하지만, 예전 가격보다 20만 원 이상 비싸진 상태다.

이미 거대한 사업이된 가상화폐 채굴공장

기업형 채굴자들이 설립한 가상화폐 채굴공장은 이미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정도로 확산된 상황이다. 미국, 일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미 자리를 잡았다.

앞에서 가상화폐 채굴공장이라고 설명했지만, 국내의 경우 이더리움(Ethereum) 채굴공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올해 초 이더리움의 시세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트코인(Z COIN) 채굴공장도 대부분 이더리움 채굴공장으로 전환한 상태다.

국내에선 가상화폐의 대표주자인 비트코인(Bitcoin)은 절대 채굴하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전 세계적으로 채굴하려는 인원이 많아 그래픽카드를 활용해 채굴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정도로 채굴량이 적기 때문이다. 해외의 비트코인 채굴공장은 그래픽카드 대신 부동소수점 연산에 특화된 ASIC(주문형 반도체)을 동원해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있다.

이더리움 채굴기<이더리움 채굴기의 모습 (사진=유튜브)>

국내 가상화폐 채굴공장의 경우 한 공장에 보통 500대~1000대의 가상화폐 채굴기를 설치한 후 대규모로 가상화폐를 채굴하고 있다. 초기 투자금의 경우 과거에는 기업형 채굴자 본인이 전부 출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에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한 후 채굴된 가상화폐의 일부를 배당하는 형태의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즉, 개인 채굴자가 가상화폐 채굴기를 구매해서 기업형 채굴자에게 맡기면, 기업형 채굴자가 이를 운용해서 전기료를 제외하고 남은 가상화폐를 개인 채굴자에게 전달하는 형태의 사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상화폐 채굴공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투자 또는 동업 문의를 하면 보통 이러한 형태의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가상화폐 채굴기 1대 당 보통 300만 원 내외의 비용이 필요하다. 가상화폐 채굴기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그 실체는 채굴에 특화된 PC에 불과하다. 그래픽카드 관리를 위한 최대한 저렴한 CPU(보통 인텔 펜티엄이 동원된다), 최소한의 메모리(RAM), 최소한의 저장장치. 그래픽카드를 6대(6 Way) 또는 4대(4 Way) 연결할 수 있는 중저가 메인보드(PCI 익스프레스 16배속 슬롯 x 1, PCI 익스프레스 1배속 슬롯 x5), 4~6대의 채굴용 그래픽카드, 4~6대의 그래픽카드를 감당할 수 있는 1000~1200W 내외의 파워 등이 필요하다. 이렇게 구매한 부품을 활용해 PC를 제작한 후 이더리움 채굴에 뛰어든 것이다. 참고로 6대의 그래픽카드는 채굴기에 바로 연결할 수 없고, 화면 출력용 그래픽카드 1대만 PCI 익스프레스 16배속 슬롯에 바로 연결하고, 나머지 5대는 PCI 익스프레스 1배속 슬롯에 라이저 케이블을 활용해 연결한다.

가상화폐 채굴공장 관계자는 "가상화폐 채굴기 한 대당 300만 원 정도의 투자 비용이 필요하며, 채굴기 한 대가 월 15만 원 내외의 전기료를 소모해 (시세에 따라) 월 30만~70만 원의 이더리움을 채굴하고 있다"며, "이더리움 시세에 따라 달라지지만, 보통 6~10개월 정도면 초기 투자비용을 회수하고 그 다음부터 이익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더리움은 현재 판매자만 많고 구매자가 거의 없어서 환금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알려진 상태다.

참고: 이더리움 채굴법 1(http://it.donga.com/26605/) 채굴법 2(http://it.donga.com/26647/)

이러한 가상화폐 채굴열풍에 맞춰 PC 부품 제조사들도 가상화폐 채굴에 특화된 부품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메인보드 제조사는 여러 그래픽카드를 연결할 수 있는 6 Way 메인보드의 생산량을 늘렸고, 그래픽카드 제조사는 디스플레이 출력 단자를 제거하고 A/S 보증 기간을 1년으로 줄인(원래 그래픽카드 A/S 보증 기간은 3년이다) 가상화폐 채굴 특화 그래픽카드를 선보이고 있다.

가상화폐 채굴용 PC에는 여러대의 그래픽카드가 탑재된다 (출처=AMD)<가상화폐 채굴 특화 메인보드>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 중고신입 그래픽카드를 주의하라

이것이 그래픽카드 실종사건의 전말이다. 하지만 그래픽카드 실종사건의 후유증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현재 중고시장에는 그래픽카드 중고 제품이 대량으로 풀리고 있다. 주로 라데온 RX 580 및 570, 엔비디아 지포스 1060 및 107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기업형 채굴자가 채굴을 중단하고 부품을 중고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가상화폐를 채굴하기 위해 그래픽카드는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혹사당한다. 때문에 채굴공장에서 흘러나온 중고 그래픽카드는 개인이 판매하는 중고 그래픽카드보다 상태가 훨씬 나쁘다. 노후화도 훨씬 진행되어 있다. 그만큼 고장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설명한 채굴 특화 그래픽카드의 A/S 기간이 1년 내외인 것도 이 때문이다. 채굴에 동원된 그래픽카드는 고장이 매우 잦다. 때문에 보증 기간을 대폭 줄인 것이다.) 결국 중고 그래픽카드란 이름의 시한폭탄이 시중에 대량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자나 PC방 사업자가 이를 구매한 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사용자들은 앞에서 설명한 5가지 그래픽카드의 중고 제품을 사는 것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벌크(포장 없이 제품만 판매하는 것) 및 재포장 그래픽카드 구매도 주의해야 한다. 채굴공장에서 흘러나온 중고 제품을 새 제품으로 둔갑시켜 판매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상화폐 채굴공장에 관한 정부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현재 가상화폐 채굴공장은 어떠한 산업이며 어떤 전기료를 내야 하는지 관련 규정이 전혀 없는 상태다. 제일 저렴한 농업용 전기를 이용하는 것만이 불법이다. 하루 빨리 산업통상자원부와 미래창조과학부 등 관련 부처들이 협의해 가상화폐 채굴공장 설립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신설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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