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숙, 박소희, 박성우... 인기 만화가가 모바일로 뭉친 이유

강일용 zero@itdonga.com

"중견 작가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해 연재매체가 사라진 것에 책임을 느낍니다"

'리니지', '아르미안의 네딸들' 등 인기작품으로 90년대 순정만화 시장을 이끈 신일숙 작가가 한말이다. 만화잡지들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국내 만화시장에서 웹툰의 비중이 날로 커졌다. 웹툰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신인들이 작가의 꿈을 꾸는 데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웹툰은 웹 페이지에 최적화되다 보니 연출에 한계가 있고, 긴 호흡으로 연재하는 장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대다수의 웹툰이 한 화에서 기승전결을 표현하는 옴니버스 형식인 이유다.

이러한 웹툰시장에 만화잡지 시대의 중견 작가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작품과 웹툰의 연재/표현 방식이 어울리지 않은 탓이다. 결국 중견 작가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또는 학습만화 시장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중견 작가들이 모바일(스마트폰/태블릿PC) 애플리케이션으로 뭉치고 있다. 신일숙(대표작: 리니지), 박소희(대표작: 궁), 박성우(대표작: 천랑열전), 서영웅(대표작: 굿모닝티쳐), 임광묵(대표작: 교무의원), 윤재호(대표작: 메탈하트) 등 만화잡지에서 자신의 작품세상을 펼쳐온 중견 작가들이 모바일 앱으로 신작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뭉친 모바일 만화잡지 앱 '카툰컵(http://kartooncup.com/)'의 성지영 이사를 만나 중견 작가들이 국내 연재를 재개한 이유를 물어봤다.

홀씨 성지영 이사
홀씨 성지영 이사

모바일 만화잡지를 꿈꾸며

일단 작가들의 얘기를 듣기 앞서 카툰컵은 어떤 서비스인지 알아보자. 성 이사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웹툰 위주로 굳어진 현재 시장에 적응하기 위해 중견 작가들 역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작년 초 시작한 카카오페이지 등 모바일 콘텐츠 사업에 큰 관심을 보냈죠. 자신의 작품을 카카오 페이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싶으셨던 겁니다. 당시 카카오페이지는 작가 분들이 꿈꾼 만화 보기에 적합한 서비스가 아니었어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젠-마경무인학원'의 스토리를 담당한 김준형 작가님과 의기투합했습니다. 김준형 작가님이 대표를 맡으시고 제가 기술을 담당하는 회사 '홀씨'를 설립하고, 만화잡지 앱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실이 카툰컵입니다. 작년 10월 안드로이드용 앱을 출시했고, 12월 iOS용 앱을 추가로 런칭했습니다"

성 이사는 카툰컵이 '만화잡지' 앱임을 줄곧 강조했다. 웹에서 연재하는 웹툰이나 웹툰 앱과 무엇이 다른 걸까.

"읽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웹툰은 웹에서 연재한다는 특성 상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출판만화 작가님들은 이러한 형태의 작업에 익숙치 않습니다. 카툰컵은 이러한 출판만화 작가님들을 위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는 컷 구성 방식을 지원합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 방식도 지원하고, 기존 웹툰처럼 위에서 아래로 보는 방식도 지원합니다. 작가님들의 취향과 연출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컷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카툰컵
카툰컵

"그렇다고 현재 만화시장에 대세인 웹툰 독자를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아래로 보는 방식이 편한 독자를 위해 위에서 아래로 보는 방식과 장면 하나하나를 확대해서 보는 방식도 지원합니다. 덕분에 기술팀이 많이 수고하고 계세요(웃음)"

"연재도 잡지 형태로 제공합니다. 카툰컵은 '스마트폰으로 보는 주간 만화잡지'를 표방합니다. 매주 목요일 12편의 만화로 구성된 잡지를 발행하면, 이를 독자가 구매하는 형태라는 거죠. 과거 만화잡지처럼 여러 작품을 한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신일숙 작가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으세요. '연재 매체는 꾸준히 긴 작품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고요. 저희는 연재 매체인 거죠. 작가님들이 긴 작품을 연재할 수 있는"

만화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목표

카툰컵은 만화잡지 앱을 넘어 더 큰 목표를 품고 있다고 성 이사는 말했다. 작가들과 성 이사가 카툰컵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는 대체 뭘까.

"만화잡지가 침체되고 웹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이 만화시장의 대세로 떠오르면서 만화는 공짜라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영화, 음악도 웹에서 불법으로 공유되면서 무료라는 인식이 생겼지만, 콘텐츠 제작사들의 적절한 대처로 위기를 극복했죠. 만화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만화는 포털의 트래픽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게 됐죠"

"웹툰 연재 사이트에서 작가들에게 작품의 페이지뷰를 기준으로 원고료를 지급하지만, 몇몇 스타 만화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그것 만으로 화실을 운영하기엔 벅찹니다. 작가 개인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림을 돕는 어시스턴트들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작가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작가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죠. 얘기 진행에 필요한 캐릭터 위주로 그림을 그리고, 배경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출판만화처럼 세밀한 그림을 그리려면 화실을 유지하고. 어시스턴트들에게 월급을 지급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만화가 하나의 상품으로써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카툰컵의 목표입니다. 만화가 누구에게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꿈꿉니다. 물론 이를 실현하려면 한 가지 선행조건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기꺼이 비용을 지출해가며 감상할 수 있는 양질의 작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예전에 다양한 히트작을 선보인 중견 작가님들과 접촉했습니다. 그분들을 찾아 뵙고 카툰컵에의 취지를 설명드리고 혹시 작품을 연재할 생각 없으시냐고 일일이 설득했습니다"

작가가 최우선인 잡지

작품을 연재하려면 작가 섭외가 우선이다. 문뜩 궁금한 점이 생겼다. 작가들을 섭외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먼저 신일숙 작가님의 사례부터 얘기해볼까요. 카툰컵의 다른 이사님께서 원수연 작가님(대표작: 풀하우스)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먼저 원수연 작가님께 부탁 드렸죠. 그러자 원 작가님이 김기혜 작가님(대표작: 설)을 소개시켜 주셨어요. 김 작가님이 제게 신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한국여성만화가협회의 정기모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하니 작가님 13분과 고양이 7마리(웃음)가 옹기종기 모여 계셨어요. 다들 고양이를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신 작가님은 저희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신화를 기반으로 한 3부작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두 작품은 과거 만화잡지에서 끝냈지만 만화잡지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남은 하나를 연재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죠. 그 작품이 바로 저희를 통해 연재를 시작한 '불꽃의 메디아'입니다. 김 작가님 역시 연재를 끝내지 못한 '설'을 완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카툰컵에 연재 중인 '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바로 그 '설' 입니다"

불꽃의 메디아
불꽃의 메디아

"박성우 작가님은 김준형 작가의 소개를 받아 저희가 찾아 뵜습니다. 박 작가님 역시 1시간 반 동안 설명을 듣고 카툰컵의 취지에 동의하시고 흔쾌히 저희 연재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박 작가님은 일본에서 활동하신 경력도 있지만, 국내로 돌아오려 해도 마땅한 매체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셨어요. 박 작가님은 작가와 작품이 중심이 되는 매체가 필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카툰컵은 편집부가 없다는 뜻인가? 잠시 성 이사의 말을 끊고 물어봤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작품 관리를 위해 편집부는 존재합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그칩니다. 작가님들의 작품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지 않습니다. 저희 목표는 어디까지나 작가가 주가 되는 잡지니까요. 편집장은 학산출판사를 거쳐 현재는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치고 계신 조유정 교수님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작가님들을 섭외한 얘기를 마저 할께요. HUN 작가님(대표작: 은밀하게 위대하게)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영화 시사회를 며칠 앞둔 시점에 만나 뵜습니다. HUN 작가님도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었다며 흔쾌히 합류하셨어요. 계약서를 갖고 시사회 다음날 뵈었을 때 조심스럽게 영화의 흥행을 말씀하시며 웃으셨어요. 특히,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작가님들이 작품 구상과 연재에만 집중하다 보니 불공정한 계약을 맺고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법정으로 가면 불공정 계약서는 무효가 되겠죠. 하지만 법적 절차에 대한 부담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작가님들의 상황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반면 저희는 언제나 작가님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작가님들이 근심 걱정없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야 독자가 원하는 양질의 작품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총사
총사

시작은 순조로워

카툰컵은 시작한지 4개월이 조금 넘은 서비스다. 하지만 일반 스타트업과 달리 콘텐츠 판매를 목표로 하기에 수입이 있어야 기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를 묻자 성 이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출발은 매우 순조롭습니다. 서비스 출시 2개월 만에 1만 6,000명의 독자들이 유료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유료 회원은 계속 증가할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다양한 관련 상품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서비스도 준비 중입니다. 작가님들의 작품을 번역해 현지에 공급하겠다는 거죠. 일단 목표는 동남아 시장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박소희 작가님의 도움이 컸는데요, 박 작가님의 궁이 베트남에서 1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큰 성공을 거둬 무난하게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유통을 전담하는 국내 회사와 함께 진출해 시장을 확대해나갈 계획입니다"

잡지 연재작을 더욱 늘릴 계획

경쟁자인 다른 유료 웹툰 플랫폼은 작품 하나에 돈을 지급하고 구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카툰컵은 여러 작품을 모아 놓은 잡지를 일괄 구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결제 방식을 다양하게 바꿀 계획은 없는걸까.

"그 외 결제방식은 시간을 두고 점차 추가될 예정입니다. 독자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콘텐츠 부문에서도 계획을 세워뒀습니다. 지금은 잡지에 17 작품(시작 12+ 합류 5)을 연재 중이지만, 연재 작품을 계속 추가해 독자들이 작품을 더욱 다양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연재 작품>
결벽증 -흑백- [ 글, 그림 / 네스티캣(고영훈) ]
나와 호랑이님 [ 원작 : 카넬 / 만화 : 윤재호 ]
리키와 야미 [ 글, 그림 / JK. MARU ]
마초냥과 김봉순 [ 글 : 이태경 / 그림 : 박소희 ]
미궁 [ 글 : 도해(임석남) / 그림 : 임광묵 ]
바이러스L [ 글 : 백하나 / 그림 : 마노_이혜영 ]
보이스 [ 글 : 김경용 / 그림 : 임경재 ]
불꽃의 메디아 [ 글, 그림 / 신일숙 ]
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글, 그림 / 김기혜]
엑토플라즘 [ 글, 그림 / 이시현 ]
총사 [ 글 : 김준형 / 그림 : 박성우 ]
키스 더 문 [ 글 : 디케이 / 그림 : 선인장 ]
팔레트 [ 글 : JUN / 그림 : 서영웅 ]
EFS 엑스마키나 [ 원작 : 백호 / 만화 : 조승엽 ]
디스토피아 [ 글, 그림 / 정대삼&황상준 ]
탈모미남 귀신가발 [ 글, 그림 / 이유정 ]
다크메르헨 [ 글, 그림 / 노명희 ]
<연재 예정 작품>
노예롭다(가제) [ 글 : HUN, 그림 : 최보하 ]
극악의 차치스 [ 글, 그림 / 임광묵 ]
트렌스크립션 [ 글, 그림 / 박진준 ]

"대신 연재가 쌓인 후 한 작품을 모아서 볼 수 있는 기능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단행본을 구매하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웹으로 연재할 계획은 없냐고 많은 독자가 질문했는데,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일단 모바일 앱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작품에 관한 명확한 기준도 세워뒀습니다. 첫째, 기존 웹툰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소재와 연출을 갖춘 작품을 연재하려 합니다. 작가님과 기술팀이 협력해 만화를 한층 고해상도로 제공할 계획이고요. 둘째, 소장가치 있는 작품을 선보이려 합니다. 10년 뒤에도 다시금 생각나는 작품이어야 겠죠"

"경쟁사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저희 목표는 명확합니다. 만화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시장을 만들 생각이고, 다소 침체된 장편 만화시장을 되살리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카툰컵에 참여한 작가님들 모두 우리가 나서서 만화시장을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신인 작가님들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근심걱정 없이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만화의 미래가 있으니까요"

성지영 이사는?
앱 개발 및 온라인서비스 개발 운영사업을 진행하는 노코드의 CEO다. 카툰컵 서비스 개발 및 유지 보수를 위해 카툰컵의 기술담당이사(CTO)를 겸하고 있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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