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흥망사] 끝내 추락한 '미국의 날개', 팬암(Pan Am)

김영우 pengo@itdonga.com

[IT동아 김영우 기자] 민간인이 여객기를 타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 여행을 가는 장면이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다. 하지만 수십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공기의 성능이나 관계 법령이 부실했고, 이를 서비스하는 기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 즈음부터 이런 꿈 같은 일이 속속 현실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있던 업체가 바로 한때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던 미국 '팬 아메리칸 항공(Pan American World Airways)', 통칭 '팬암(Pan Am)'이다.

팬암항공 로고
팬암항공 로고

항공기로 대양을 횡단한다는 '꿈'

팬암의 창업자이자 CEO였던 후안 트리페(Juan Terry Trippe, 1899 ~ 1981)는 본래 금융업에 종사하던 사업가였으나, 당시 태동기였던 항공운수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1920년대에 민간인이 항공기 관련 사업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항공기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대단히 귀한 전략 물자인데다, 군사적 정찰 목적으로도 이용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팬암의 창업자 후안 트리페(Juan Terry Trippe, 1899 ~
1981)
팬암의 창업자 후안 트리페(Juan Terry Trippe, 1899 ~ 1981)
< 팬암의 창업자인 후안 트리페(Juan Terry Trippe, 1899 ~ 1981)>

때문에 트리페는 헨리 아놀드(Henry Harley "Hap" Arnold, 1886 ~ 1950, 전 미국 공군 원수) 등의 미국 공군 출신 인사들과도 교류를 지속하며 기회를 노렸고, 1927년, 드디어 그들과 함께 팬암을 설립했다. 초기의 팬암은 미국 정부에서도 많은 지원을 받았다. 당시 유럽 항공 업체들이 잇따라 항공 노선을 개척하는 추세라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팬암은 미국과 쿠바 사이를 잇는 항공우편 업무를 주로 했으나, 1930년대부터는 승객을 나르는 항공여객 업무도 본격화했다. 다른 항공사들이 국내 노선에 주력하는 동안, 팬암은 정 반대로 국제 노선에 더 신경을 썼다. 1930년대의 팬암은 북미와 남미 지역을 아우르는 노선을 주력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이나 중국 방면으로 가는 환태평양 노선의 조사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를 거쳐 필리핀까지 이어지는 태평양 횡단 노선을 개설하고 1937년에는 뉴욕에서 아이슬란드를 거쳐 노르웨이로 향하는 대서양 횡단 노선도 개설했다.

현대적 항공여객업의 기틀을 세우다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팬암은 급성장을 할 기회를 맞았다. 당시 팬암은 자사 항공기를 이용해 유럽 및 아시아의 주요 전략 거점에 군사 관련 물자를 나르고 외교관의 수송을 돕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팬암이 태평양 및 대서양 횡단 노선을 운영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미군에 공유하기도 하는 등,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미국정부와 팬암의 관계는 한층 돈독해 졌으며, 덕분에 팬암은 종전 후 다양한 국제항공로에 관련된 독점권을 확실하게 거머쥘 수 있었다. 급기야 1947년, 팬암은 뉴욕(미국) - 런던(영국) - 이스탄불(터키) - 콜카타(인도) – 방콕(태국) – 상하이(중국) – 도쿄(일본) – 웨이크섬(미국령) - 호놀룰루(미국령 하와이) – 샌프란시스코(미국) – 뉴욕(미국)으로 이어지는 세계일주 노선을 세계 최초로 개설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팬암 승무원들의 일화를 그린 2011년판 TV드라마 '팬암(Pan
Am)'
1960년대 팬암 승무원들의 일화를 그린 2011년판 TV드라마 '팬암(Pan Am)'
< 1960년대 팬암 승무원들의 일화를 그린 2011년판 TV드라마 '팬암(Pan Am)'>

팬암은 대규모의 항공노선 및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서비스 면에서도 선구자였다.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을 구분하는 제도도 팬암에서 처음 본격화했다. 승객들의 시중을 드는 팬암 승무원들의 미소가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팬암 스마일'이라는 용어가 세간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객들에게 편안한 여행을 제공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여압장치(기내의 압력이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장치)를 탑재한 여객기인 보잉 307을 도입하기도 했다.

시대의 아이콘이 된 초대형 여객기

기존의 프로펠러 여객기보다 훨씬 빠르고 쾌적하게 대규모 수송이 가능한 제트 여객기의 보급에도 팬암은 큰 역할을 했다. 팬암은 1958년, 미국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보잉 707을 뉴욕 – 파리 노선에 투입하면서 처음으로 제트 여객기를 이용한 대서양 횡단노선을 개척하게 된다. 이후에도 팬암은 보잉 707을 대량 주문해 다양한 국제노선에서 운용하며 높은 인기를 끌었다.

최대 200여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보잉 707의 운용으로 재미를 본 팬암은 더 큰 제트 여객기를 원했다. 이 때를 즈음해 보잉사에선 초대형 군용 수송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경쟁사인 록히드(현재의 록히드마틴)사에게 밀려 이 프로젝트는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팬암의 후안 트리페 CEO는 보잉사와 접촉, 해당 프로젝트를 초대형 제트 여객기 개발계획으로 전환해 자사에 납품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첫 비행에 성공한 보잉 747 점보 여객기였다.

보잉747은 팬암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점보
여객기다
보잉747은 팬암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점보 여객기다

보잉 747은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기였으며, 최대 40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태평양 노선에 투입 가능할 정도로 장거리 운송 능력이 뛰어났다. 크게 만족한 팬암은 보잉 747을 대량 주문해 다양한 노선에 투입했다. 이를 통해 보잉 747은 팬암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

1970~1980년대 사이, 팬암의 여객기 노선은 그야말로 전 지구를 커버할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였다. 그리고 팬암은 세계 최대의 항공사이자 미국의 상징 중 하나로 꼽힐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팬암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첫 번째 위기는 1973년부터 본격화된 석유파동(오일쇼크)이었다. 아랍의 산유국들이 손잡고 석유 값을 수십 배 가까이 올리면서 전세계 항공사들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팬암이었다. 특히 팬암은 연료 소모율이 극히 높은 보잉 747 여객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운용하는 항공사였는데, 석유 값이 폭등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또한, 팬암은 국제 항공노선의 최강자였지만 상대적으로 국내선의 규모가 부실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팬암은 1980년, 미국 국내선 시장에서 상당한 규모를 갖춘 중견 항공사인 내셔널 항공(National Airlines)을 인수하게 된다. 하지만 인수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한데다 양쪽 항공사의 기종 차이, 운행 공항의 차이, 그리고 인력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원활한 운영을 하지 못했으며, 이 또한 팬암의 적자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된다.

팬암의 최대 무기 중 하나였던 미국정부와의 끈끈한 관계 역시 예전만 못했다. 특히 1978년, 미국정부는 항공 시장의 규제를 대부분 철폐한 항공 자유화를 시행했는데, 이를 통해 신규 업체들이 항공 시장에 대거 진출할 수 있었다. 항공권 가격 인하 경쟁도 심해지면서 팬암은 예전처럼 시장 독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미국을 상징하는 항공사라는 이유로 팬암 항공기는 테러리스트들의 타겟이 되는 일도 잦았다. 1986년 9월 5일, 파키스칸 카라치의 진나 국제공항에서 팬암 73편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수부대가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범인들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100여명의 승객 및 승무원이 피해를 입고 이 중 21명이 사망했다.

또한 1988년 12월 21일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팬암 103편이 리비아 테러리스트들이 설치한 폭탄 때문에 공중 폭파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항공기에 타고 있던 승객 및 승무원 259명이 전원 사망했으며, 항공기 추락 현장에 있던 주민 11명도 사망, 총 270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큰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팬암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뉴욕의 팬암 빌딩. 현재는 메트라이프가 소유하고
있다
뉴욕의 팬암 빌딩. 현재는 메트라이프가 소유하고 있다
< 뉴욕의 팬암 빌딩. 현재는 메트라이프가 소유하고 있다>

위와 같은 악재와 방만한 경영이 계속되면서 팬암의 재정 상태는 극히 악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팬암은 주요 항공 노선을 경쟁사에게 팔고, 뉴욕에 있던 본사 빌딩까지 매각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결국 1991년 12월 4일의 비행을 끝으로 팬암은 파산,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몇몇 업체가 팬암의 브랜드를 인수해 부활에 나서기도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제는 사라진 '위대한 미국'의 상징

팬암은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며 항공여객 시대를 본격화한 선구자 였다. 전 세계를 휩쓴 전쟁의 와중에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사세를 불리고 정부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삼아 대담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과감한 투자와 서비스 향상을 통해 현대적인 항공사 운영의 본보기가 된 것 역시 팬암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시장 독점이 이어지면서 방만한 경영이 일반화되었다. 전성기 이후의 팬암은 덩치만 크고 외부 환경의 변화에 극히 취약한 '공룡'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몇 가지 악재 및 실수가 이어지자 그만 맥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팬암의 덩치가 너무 컸고, 수십 년 동안 회사 전체를 지배해온 무사안일주의의 뿌리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당수 미국인들은 1980년대의 '위대한 미국'을 그리워하며, 당시의 상징 중 하나였던 팬암을 추억하곤 한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존재하는 어떤 항공사도 항공 노선 규모에서 팬암 전성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무한경쟁과 효율적인 운영을 중시하는 현대 시장에서 팬암과 같은 기업이 다시 등장하지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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