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CEO 열전] '인텔 인사이드'로 인텔의 시대를 연 천재 경영자, 앤디 그로브

강일용 zero@itdonga.com

[IT동아 강일용 기자] 영원한 비즈니스 모델은 없다. 시장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맞춰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것이 훌륭한 CEO의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인텔의 전 최고경영자 앤디 그로브(앤드류 그로브, Andrew Grove)는 훌륭한 CEO다. 종합 반도체 회사였던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CPU)에만 집중하는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선택과 집중을 추진했고, PC 부품을 만드는 B2B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모든 소비자에게 인텔의 존재를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경영철학을 통해 기업이 어떻게 변화를 추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아보자.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

공산당을 피해 오른 미국 망명길, 수중에는 20달러가 전부

그로브는 19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앤디 그로브는 사실 미국식 이름이다. 그의 본명은 '그로프 언드라시 이슈트반(Gróf András István)'이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은 그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로브의 아버지는 헝가리 군대에 징집된 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1944년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그로브와 그의 가족들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이어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위해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로브와 그의 가족들은 수용소행을 피하기 위해 숨어지내야만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포로 수용소에 갇혀있던 아버지가 돌아오자 그로브의 삶은 안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헝가리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그로브와 그로브의 가족을 괴롭혔다. 그로브의 삼촌은 기자라는 이유로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로브의 아버지도 이에 연관되어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설상가상으로 1956년 헝가리 전역에서 소련의 간섭과 공산당 1당 독재를 비판하는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다.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고, 헝가리 전역은 시민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 그로브는 공산당을 피해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소련과 공산당을 피해 당시 20만 명에 이르는 헝가리인들이 서방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로브도 이렇게 서방으로 탈출한 난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로브는 20살의 나이로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국경을 넘었다. 소련군의 감시를 피해 이웃 국가인 오스트리아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그로브는 국제구호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 길에 올랐다. 이때 그로브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20달러가 전부였다.

1957년 미국에 도착한 그로브는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했다. 영어가 서툴렀던 그가 미국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버스보이(Busboy, 테이블을 치우는 레스토랑 직원)였다. 이른바 접시닦이였던 셈이다. 그는 버스보이로 일하던 도중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던 미래의 아내 에바 카스탄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도 그와 같은 난민 출신이었다.

비록 사정은 어려웠지만, 그로브는 배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난민들에게 학비가 무료로 열려있었던 뉴욕시립대학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공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UC(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에서 화학공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렇게 박사학위까지 이수한 그로브는 1963년 당시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로 떠오르고 있던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R&D 부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인텔의 세 번째 직원으로 합류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오늘날 반도체의 개념을 정립한 회사다. 트랜지스터의 아버지였지만, 인격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던 윌리엄 쇼클리로부터 독립한 8명의 연구원(이른바 8인의 배신자들)이 세운 이 기업은 게르마늄(저마늄) 대신 실리콘(규소)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실리콘 반도체는 게르마늄 반도체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나고 제조원가가 저렴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때문에 실리콘은 반도체 소재의 대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후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자리 잡은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지역은 실리콘밸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로브는 실리콘에서 나트륨 불순물을 제거해 실리콘의 순도를 높이고 트랜지스터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내며 두각을 드러냈다. 1963년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합류하고 5년 동안 반도체 개발 이사로 재직하며, 반도체 소자에 관한 기초 서적을 써 내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로브가 쓴 반도체 기초 서적은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소재과학 분야의 교재로 채택되는 등 널리 활용되었다.

이러한 그로브의 행적을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설립자들 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와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인텔의 창립 멤버, 왼쪽부터 앤디 그로브,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출처=인텔)
인텔의 창립 멤버, 왼쪽부터 앤디 그로브,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출처=인텔)

<(왼쪽)앤디 그로브, (가운데)로버트 노이스, (오른쪽)고든 무어>

1968년 내부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나 인티그레이티드 일렉트로닉스(Integrated Electronics), 줄여서 '인텔'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둘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시절 눈여겨보았던 직원인 그로브에게 인텔에 합류하라고 제안했고, 그로브는 이를 승낙했다. 그로브는 이렇게 인텔의 세 번째 직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두 명의 창업자와 한 명의 직원으로부터 인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인텔을 만들다

인텔을 창업한 인물은 노이스와 무어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텔을 만든 사람은 그로브다. 'CPU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 지금은 비록 폐기되었지만 지난 반 세기 동안 반도체 업계를 지배해온 '무어의 법칙(반도체의 정밀도는 18개월마다 2배 증가한다는 이론)', B2B 기업인 인텔을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한 마케팅 캠페인 '인텔 인사이드' 등 모든 것을 그로브가 만들고 지휘했다.

(없음)
(없음)

초창기 인텔에서 그로브는 COO(최고운영책임자)로서 인텔의 반도체 제작 공장을 관리, 감독하며 인텔의 3인자 역할에 충실했다. 반도체 제작 공장을 관리하며 그는 10%에 불과하던 반도체 제작 공정의 수율(공장에서 생산되는 전체 제품에서 정상품의 비율)을 50%대로 끌어올릴 놀라운 아이디어를 고안해내었다. 바로 모든 먼지의 유입을 막는 방진복이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투입된 직원들에게 사람에게서 떨어지는 모든 미세 먼지를 차단하는 방진복을 입게함으로써 인텔의 반도체 수율은 경쟁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고, 이를 통해 반도체 업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노이스가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나고, 무어가 최고경영자를 맡게되자 그로브 역시 부사장으로서 인텔의 2인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메모리 기업을 CPU 기업으로 바꾸다

CPU(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드는 지금의 모습에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원래 인텔은 메모리(RAM) 위주의 사업을 진행하던 종합 반도체 기업이었다. 노이스, 무어, 그로브 세 사람이 인텔을 만든 후 가장 먼저 진행한 사업이 IBM의 비즈니스 컴퓨터 '메인프레임'용 메모리를 공급하는 것일 정도였다. 단순히 메모리 사업을 진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1970~80년대 메모리 업계 1위 기업이었다. CPU 사업도 진행하긴 했지만 IBM, 모토로라, NEC처럼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태동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CPU 분야는 IBM과 모토로라의 것이었다.

삼성전자 DDR4 메모리
삼성전자 DDR4 메모리

하지만 1970년대 후반 NEC를 위시한 일본 기업이 메모리 시장에 진출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의 메모리 기업들은 메모리의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춰 시장점유율을 향상시키는 덤핑(Dumping) 경쟁을 시작했다. 때문에 1985년 초 30달러였던 256KB 메모리의 가격이 몇 달만에1/10 수준인 3달러까지 떨어졌다. 인텔은 이로 인해 1억 달러에 이르는 영업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인텔은 기로에 섰다. 적자를 감수하고 일본 기업들과 길고 긴 덤핑 경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장을 찾을 것인가. 덤핑 경쟁에서 승리해 경쟁사를 모두 몰아내면 메모리 시장에서 생겨나는 막대한 이익을 모두 가질 수 있겠지만, 패배하면 회사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브는 무어를 찾아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의논했다. 무어에게 "주주들이 우리를 쫓아내고 새 경영진을 세운다면,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부터 할까?"라고 물었다. 이에 무어는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하겠지"라고 답했다. 그로브는 이를 듣고 즉시 "그럼 우리도 메모리 사업을 그만둡시다"라고 말하고 바로 사업 정리에 나섰다. 메모리 생산 공장을 폐쇄하고8000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하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물론 인텔이 이렇게 기존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사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1980년대 초 시장에 등장한 IBM 호환 퍼스널 컴퓨터, 줄여서 'PC'라고 부르는 이 기기에 CPU를 공급하며 CPU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그로브는 PC가 인텔의 CPU만 이용하도록 IBM과 협상을 주도했다.

마침 시장에서 인텔에게 엄청난 호재를 이끌어낼 변화가 일어났다. IBM이 개인용 컴퓨터는 시장성이 없다 판단하고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에게 PC에 대한 권한을 넘긴 후 비즈니스 컴퓨터 시장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훗날 가장 실패한 비즈니스 결정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부단한 노력으로 성능이 일취월장해 PC가 개인용 컴퓨터 시장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컴퓨터 시장까지 장악했기 때문이다.)

기업의 체질을 메모리에서 CPU로 전환한 공로로 1987년 그로브는 무어의 뒤를 이어 인텔의 세 번째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인텔의 세 번째 직원이 세 번째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

인텔 정품 CPU
인텔 정품 CPU

펜티엄과 인텔 인사이드의 시대를 열다

원래 인텔은 CPU의 이름을 숫자로 정했다. 286, 386, 486 등이 대표적이다. 한때 컴퓨터의 성능을 이러한 CPU의 이름으로 나누기도 했을 정도로 유명한 작명 방식이었다. 그런데 경쟁사인 AMD에서 유사한 이름을 갖춘 'AM386'을 출시하면서 사정이 변했다. 유사한 이름에 격노한 그로브는 상표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패배의 쓴맛을 봐야 했다. 법원이 숫자는 상표로 등록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때문에 그로브는 숫자로 CPU의 이름을 정하던 방식을 버리고, CPU의 이름을 하나의 브랜드화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원래 586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어야 했던 CPU에 '펜티엄(Pentium)'이라는 상표명을 붙였다. 펜티엄은 그리스어로 5를 뜻하는 펜타(Penta)에서 따온 이름이다. 펜티엄이 등장한 이후 인텔을 비롯한 모든 CPU 기업은 복잡한 숫자로 이름을 붙이던 관례를 버리고 소비자가 기억하기 쉬운 상표로 CPU명을 정하게 되었다.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

그로브가 당시 기술 자문이었던 데니스 카터의 조언을 받고 시작한 '인텔 인사이드'는 B2B 기업의 홍보와 마케팅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보여준 우수한 사례다. 소비자들은 원래 인텔이라는 기업을 몰라야 정상이다. 특정 제품의 내부에 들어간 부품을 어떤 회사가 만들었는지 아는 소비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소비자가 최종적으로 제품을 생산해낸 기업, 즉 B2C 기업의 브랜드만을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에서 PC만은 예외다. 많은 소비자가 PC 내부에 들어간 CPU를 어떤 회사가 만들었는지 알고 있다. 인텔 인사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된 광고, 홍보, 마케팅을 통해 뇌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인텔 인사이드는 쉽게 말해 인텔이 PC나 노트북 제조사의 마케팅 비용을 대신 내주는 캠페인이다. PC와 노트북 제조사가 인텔 CPU를 탑재한 PC와 노트북을 만들면 인텔에게 비용을 지원받아 마케팅과 홍보를 진행할 수 있다. 그 대신 제조사는 광고나 전단지에 인텔의 로고를 삽입해야 한다. 광고와 전단지 뿐만 아니라 제품 박스와 제품 자체에도 인텔의 로고를 새기거나 인텔의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TV 광고의 경우 광고 끝자락에 5음절의 "띵~띠리리링"이라는 인텔 로고음과 함께 인텔의 로고를 띄워야 한다.

인텔 인사이드를 통해 PC와 노트북 제조사는 마케팅과 홍보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인텔은 B2B 기업임에도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강렬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또한 CPU는 인텔이라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심어줄 수 있었고, 제조사가 인텔의 지원을 받기 위해 경쟁사의 CPU를 채택한 제품을 만드는 것을 막는 효과를 주었다.

인텔은 처음 이 캠페인을 시작하고 3년 동안 5억 달러의 거금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인텔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인텔 인사이드를 통해 인텔이 경쟁사보다 월등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브랜드 가치가 급상승했다. 인텔 인사이드가 시행된 이후 인텔의 브랜드 가치는 전 세계 10위권 이내로 진입했다. 이는 그 어떤 PC 제조사보다도 높은 것이다. PC 제조사(B2C 기업)보다 높은 인텔(B2B 기업)의 브랜드 가치는 2010년대에 들어 애플과 삼성전자가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인텔 인사이드
인텔 인사이드

많은 PC 제조사가 인텔 인사이드에 참여했으나 오직 애플만이 인텔의 CPU를 공급받으면서 인텔 인사이드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는 인텔 인사이드를 두고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깎아서 인텔의 가치를 올려주는 바보같은 선택이라고 폄하한 바 있다. 이러한 잡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PC와 노트북 제조사가 인텔 인사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비용을 지원받아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마케팅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기업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텔은 그로브가 CEO로 재직하는 동안 영업이익을 19억 달러(2조1289억 원)에서 260억 달러(29조1330억 원)로 14배 확대했다. 이러한 그로브의 비즈니스 성과를 높게 평가한 타임지는 1997년 올해의 인물로 앤디 그로브를 선정했다. 헝가리 출신의 가난한 난민 청년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을 이끄는 리더로 우뚝 선 것에 따른 평가다.

인텔은 본래 메모리 기업이었다. 하지만 메모리 사업에서 인텔은 큰 손실을 안게 된다. 적자를 감수하고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새로운 시장을 찾을 것인가. 기로에 선 인텔을 앤디 그로브가 구출해낸다. 앤디 그로브는 과감히 이전 사업을 철수시키고 CPU 사업을 성공시킨다. 앤디 그로브는 기업의 체질을 메모리에서 CPU로 전환한 공로로 1987년 무어의 뒤를 이어 인텔의 세 번째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인텔의 세 번째 직원이 세 번째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

무어의 법칙을 현실로 만들다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달리 무어는 무어의 법칙을 자기 입으로 주장한 적이 없다. 단지 1965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반도체 정밀도 향상에 대한 의견을 밝혔을 뿐이다. 반도체의 정밀도가 "2년에 2배 정도 향상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사실 무어의 법칙은 그로브의 작품이다. 그로브는 전 CEO가 얘기한 이 법칙에 주목했다. 18개월마다 반도체의 정밀도를 2배씩 향상시킬 수 있으면 인텔이 반도체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법칙을 현실화하기 위해 그로브가 택한 방법은 슬프게도 '초과 근무'였다. 인텔의 모든 엔지니어들이 매일 2시간 이상씩 초과 근무를 진행하고 반도체 정밀도 향상에 회사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무어의 법칙 50주년
무어의 법칙 50주년

물론 그로브는 막무가내의 CEO가 아니었다. 일을 시킨 만큼 대가를 주었다. 초과 근무에 참여해 성과를 낸 엔지니어들에게 아낌없이 스톡옵션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2000년대에 들어 인텔의 시가총액이 5000억 달러(560조 원)를 넘는 등 최고치를 경신하자 인텔 내부에는 수천 명의 백만장자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인텔의 스톡옵션 전략은 우수한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경쟁사로 이직하는데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다. 인텔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일해야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엔지니어들과 그로브의 노력으로 인텔은 무어의 법칙을 현실화하고, 경쟁 반도체 제조사보다 1~2단계 앞서는 생산 공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앞서는 생산 공정을 바탕으로 뛰어난 성능의 CPU를 생산했고, 이를 통해 1990년대 인텔은 매년 30% 이상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고, PC용 CPU 시장에서 8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하며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그로브가 만든 독특한 인텔의 조직 문화

그로브는 임원들에 대한 특권을 없애고 조직 내부에 평등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임원들은 개인 사무실 대신 일반 직원과 동일한 책상에서 일했고, 그로브 본인도 CEO로 일하면서 전용 주차 공간이 없어 빈 주차 공간을 찾아 회사 주차장을 배회해야 했다. 그가 평등을 강조한 이유는 뭘까. 지위와 권위에서 나오는 권력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 기술을 개발하려면 다양한 의견이 끊임없이 개진되어야 하는데, 상급자가 지위와 권위로 이를 가로막으면 제대로된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브는 직원들을 혹독하게 통제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지각한 직원은 지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누구나 볼 수 있게 했고, 회사 내에서는 직원들끼리 잡담도 금지되었으며, 근무 시간에 라디오나 음악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로브는 모든 관리자의 작업계획표를 일일이 체크하고, 정해진 일정대로 개발이 진행되지 않으면 어김없이 강하게 질책했다.

또한 수시로 직원들의 책상을 점검해 정리 정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직원에게 직접 경고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편집증적인 태도(paranoid)를 빗대 인텔 직원들은 그를 '미스터 클린'이라고 비꼬았다. 공장뿐만 아니라 사무실마저 먼지가 없는 클린한 공간으로 만들어 통제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준 별명이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강조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매우 보기 힘든 조직문화였다.

하지만 정작 그로브는 자신의 이러한 편집광적인 성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1996년 펴낸 자서전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성공은 만족을 낳고, 만족은 실패를 낳는다. 과거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미래에서 생존할 수 없다. 항상 긴장하는 편집광만이 냉혹한 비즈니스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병마에 시달린 CEO...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로브는 몸이 약해 어린 시절부터 병에 시달렸다. 4살 무렵 성홍열을 앓아 청력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인텔의 CEO로 재직하던 1995년에는 전립선암 판정을 받기도 했다. 비록 암은 치료했지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97년 최고경영자를 그만두고 인텔 회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인텔 회장은 이사회 회의 정도만 주재하는 명예직이다. 사실 상 은퇴한 것이나 다름 없다.) 2005년에는 인텔 회장도 그만두고 인텔의 모든 비즈니스에서 손을 뗐다.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

2000년에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파킨슨병 연구에 3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모교인 뉴욕시립대에 2600만 달러를 기부해 그로브 엔지니어링 스쿨을 설립하는 등 자선활동에 집중했다. 자신을 미국으로 인도해준 국제구호위원회에도 많은 돈을 기부하고, 그 자신도 회원으로 활동하며 난민을 지원했다.

2016년 3월 21일, 그로브는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숨을 거뒀다.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실리콘밸리 관계자들이 그를 추도했다. 그의 영원한 사업 파트너였던 빌 게이츠는 "나는 그로브와 일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비즈니스 리더였다"고 말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앤디 그로브는 전 세계 테크놀러지 업계의 거인이었고, 미국에서도 손 꼽힐 위인이었다"고 애도를 표했다.

그로브가 없는 인텔의 미래

물론 그로브가 최고의 CEO였는지에는 의문이 조금 있다. 그로브는 CEO로 재직하면서 네트워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스코를 단돈 2억 달러에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최고의 인텔 CEO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도 인텔은 CPU 중심의 비즈니스와 인텔 인사이드라는 그로브가 세워놓은 비즈니스 모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상위 제품인 인텔 코어 i9
최상위 제품인 인텔 코어 i9

오히려 20년이 흘러 그로브의 유산이 시장에서 통하지 않게 되자 위기에 처했다. CPU 중심의 비즈니스는 일본 기업들과 메모리 덤핑 경쟁에서 승리해 인텔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반도체 기업이 된 삼성전자와 인공지능 시대에 맞춰 GPU 비즈니스를 장악한 엔비디아의 등장으로 흔들리고 있다. 인텔이 공정상 우위를 차지하게 해주었던 무어의 법칙은 막대한 투자비용과 물리적인 제약 때문에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인텔은 변해야만 한다. 30년 전 시장의 흐름을 읽고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떼고 CPU에 집중한다는 결정을 내려 인텔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그로브와 같은 행보를 보여줄 제 2의 앤디 그로브가 필요하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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