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벤처 투자자가 된 모자이크 개발자, 마크 안드레센

이상우 lswoo@itdonga.com

[IT동아 이상우 기자] 인터넷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 보자면,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개발한 NLS(온라인 시스템)는 인터넷의 탄생에 기초가 됐고, 팀 버너스 리는 인터넷과 하이퍼텍스트를 결합해 월드 와이드 웹(이하 웹)이라는 새로운 정보검색 방식을 개발해냈다. 웹은 우리가 정보를 얻고, 공유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수단이 됐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담은 문서를 웹 페이지라고 부르며, 이러한 웹 페이지를 모아놓은 집합을 웹 사이트라고 부른다. 또한, 웹 사이트를 넘나들며 정보를 얻는 과정을 웹 서핑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웹이라는 용어를 인터넷이라는 기술과 동일하게 보는 것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 중 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웹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웹 문서를 읽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웹 브라우저'다. 팀 버너스 리 역시 웹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웹 문서를 제작/편집하고 읽을 수 있는 웹 브라우저 월드와이드웹(명칭의 혼동을 줄이기 위해 향후 '넥스트'라는 이름으로 바꾼다)을 내놓았다.

웹브라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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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쓰이는 다양한 웹 브라우저.

지금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크롬, 파이어폭스, 오페라 등 다양한 웹 브라우저가 쓰이고 있지만, 웹의 확산에 힘을 실어준 것은 1993년 등장한 그래픽 인터페이스 기반의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다. 그리고 1994년 등장한 최초의 상용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Netscape)'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점유율 80%를 이룬 적도 있었다. 오늘은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를 내놓은 '마크 안드레센(Marc Lowell Andreessen)'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마크 안드레센
마크 안드레센
모자이크의 아버지 마크 안드레센 출처:플리커, 위키피디아

그래픽을 볼 수 있는 웹 브라우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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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브라우저는 기존 웹 브라우저와 달리 사진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출처: 위키백과>

마크 안드레센은 1971년 7월, 미국 아이오와주 시더 폴스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12월까지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에서 컴퓨터 과학 학사 과정을 이수한다. 그는 재학 중IBM에서 잠깐 인턴 생활을 하고, 이와 함께NCSA(국립 슈퍼컴퓨팅 연구소)에서도 일하게 된다. 이 기간에 팀 버너스 리가 공개한 월드 와이드 웹 관련 기술을 접한다.

1992년 12월, 그와 그의 동료 에릭 비나(EricBina)는 NCSA에서 근무하는 동안 팀 버너스 리가 공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웹 브라우저 개발 계획을 세운다. 그들의 목표는 사용자 친화적이면서 다양한 기종의 시스템에서 구동할 수 있는 통합 그래픽 기반의 브라우저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모자이크의 탄생이다.

모자이크 1.0 버전은 1993년 4월 22일 처음 등장한다. 원래는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에서 작동하는 브라우저로 개발됐지만, 같은 해 12월에는 애플 매킨토시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 버전도 등장한다. 당시 모자이크는 오늘날의 웹 브라우저처럼 멀티미디어 GUI를 지원했기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전기 공학자 로버트 메트칼프(밥 메트칼프)는 1995년 인포월드에 기고한 글에서 "1세대 웹은 팀 버너스 리가 개발한 URL, HTTP, HTML을 통해 몇몇 사람에게 웹이 '고퍼 프로토콜'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했고, 2세대 웹은 마크 안드레센과 에릭 비나가 개발한 모자이크를 통해 수백만 명에게 웹이 섹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모자이크가 오늘날 인터넷 환경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실제로 1990년대 일어난 인터넷 붐을 이끄는 주역이었다. 월드 와이드 웹이 새로운 정보 공유 방식을 제안했다면, 모자이크는 웹에 있는 정보를 사람들이 더 쉽고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비상업적인 목적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유닉스 버전은 소스 코드까지 공개/배포해 많은 사람이 웹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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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 대학교에 있는 모자이크 기념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marc_smith/447183492/>

공교롭게도 모자이크의 인기를 시들하게 만든 사람은 마크 안드레센이다. 50%를 넘나들던 모자이크의 점유율은 그가 새로운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를 내놓으면서 사용자가 줄었고, 1998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상용 웹 브라우저 넷스케이프의 탄생

마크 안드레센은 졸업과 함께 NCSA를 떠난다. 이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짐 클락이다. 짐 클락은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상업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마크 안드레센에게 인터넷 소프트웨어 개발사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탄생한 회사가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즈 코포레이션'이다.

하지만 회사는 곧 이름을 바꾼다. '모자이크'라는 명칭은 이미 NCSA 시절에 사용했기 때문에, 이전 관계자들이 새로운 회사에서 사용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1994년 10월, 베타버전인 모자이크 '넷스케이프 0.9가' 탄생했지만, 곧 이름을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이하 넷스케이프)로 바꾸고, 회사 이름 역시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즈 코포레이션'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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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0.9, 책을 들고 있는 녹색 ‘생명체’가 그들의 마스코트인 모질라다. <출처: 위키백과>

물론 넷스케이프는 모자이크의 소스 코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넷스케이프라는 이름 대신 '모자이크 킬러'라는 뜻의 '모질라'를 코드명으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사용하던 마스코트는 '고질라'를 형상화한 거대한 도마뱀이다. 경쟁사들을 때려 부수겠다는 의미다.

넷스케이프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인터넷 붐이 일어난 시기에 웹 표준으로 쓰일 정도였으며, 윈도, 맥OS, 유닉스 등 다양한 운영체제를 지원해 웹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1995년 8월, 넷스케이프는 성공적인 기업공개(IPO)를 마치고 상장한다. 상장 첫날 주당 주가는 75달러에 이를 정도였으며, 넷스케이프의 시장 가치는 29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새로운 적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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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스케이프 점유율의 변화. <출처: 위키백과>

넷스케이프의 성공을 보고, 그 뒤를 좇기 시작한 기업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다. 물론 넷스케이프와의 초기 싸움에서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들이 내놓은 첫 번째 웹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의 성과는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MS도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자사의 운영체제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하는 것이었다. 윈도 운영체제와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윈도95 플러스팩부터였다. 1997년 추락하기 시작한 넷스케이프의 점유율은 윈도98과 IE4가 등장하면서 빠르게 줄어들었고, 1999년 등장한 IE5.0은 처음으로 넷스케이프의 점유율을 넘어서기도 했다.

한편, 브라우저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마크 안드레센은 1999년, 넷스케이프를 42억 달러에 AOL(아메리칸 온라인)에 매각하는데 성공했다.

벤처 투자자로서의 행보

넷스케이프를 떠난 마크 안드레센은 벤 호로위츠, 팀 하워즈 등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라우드클라우드(LoudCloud)'를 설립한 것이다. 이 회사는 SaaS(Software as a Service)나 IaaS(Infrastructure as a Service) 등 기업용 소프트웨어나 기반 시설을 클라우드 형태로 제공했다. 한 매체는 이 회사에 관해 클라우드 컴퓨팅과 SaaS를 제공하는 최초의 기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붐이 시들해지면서 회사도 어려움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2년 회사 이름을 옵스웨어(Opsware)로 변경, 데이터 센터 자동 관리 솔루션 같은 IT 솔루션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들에 주목한 기업은 휴렛팩커드(HP)다. 마크 안드레센이 옵스웨어를 HP에 매각한 가격은 16억 달러다. 망해가는 회사를 4년 만에 회생시키고, 대기업에 팔아치운 셈이다. 그의 경영 능력과 시장을 보는 안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HP는 2007년 옵스웨어를 인수하자마자, 자동화 관리 솔루션 시장에서 경쟁자인 IBM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서게 된다. 당시 HP 관계자는 "HP는 옵스웨어 인수를 통해 데스크톱,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등 모든 IT 기반 시설 관리 자동화를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업체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옵스웨어를 정리한 이후, 그는 벤처 캐피탈 '안드레센 호로비츠'를 설립한다. 이들에게 투자를 받아 성공한 벤처 기업은 페이스북, 포스퀘어, 기트허브, 핀터레스트, 트위터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마크 안드레센을 자신의 멘토로 삼기도 했다. 이런 성공 사례만 보더라도 그가 벤처 기업을 보는 안목이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마크 안드레센은 개발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지난 2008년 페이스북 이사직을 맡았고, 새로운 벤처 기업에 관한 투자와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2015년 현재 만 43세의 나이로 실리콘 밸리 벤처 투자자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고 있다.

글 / IT동아 이상우(lswoo@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의 'IT 인물 열전' 코너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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