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세계] 부활한 전설의 게임, '안드로이드 넷러너'

안수영 syahn@itdonga.com

안드로이드 넷러너
안드로이드 넷러너

안드로이드 넷러너(2013) <출처: divedice.com>

'매직: 더 개더링', '유희왕' 등으로 잘 알려진 수집 카드 게임(Collectible Card Game, CCG) 게임 장르는 여러 카드를 분석해 전략적인 덱(Deck)을 만들고, 상대방의 덱과 겨루는 방식이다. 이런 장르의 게임에서는 카드의 조합과 운영, 약간의 운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플레이어들은 승리하기 위해 카드의 조합에 오랜 시간을 쏟는다. 이 장르는 공들인 시간에 따라 상대방과 실력 차이가 크게 나기 일쑤라, 초심자가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블리자드에서 발표한 '하스스톤'처럼 이 장르의 게임들이 모바일과 온라인을 통해 소개, 제작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장르의 게임들을 접하고 있다.

이 장르가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자, 많은 회사들이 이 장르의 게임을 출판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충분한 게이머들을 확보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사라진 게임 중 하나가 재판이 됐는데 출판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전세계 보드게임 순위에서 Top 10 안에 드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게임이 바로 '안드로이드 넷러너'다.

게임 방법

안드로이드 넷러너는 암울한 미래 세계를 바탕으로 한 2인용 카드 게임이다. 한 플레이어는 각종 장비와 소프트웨어로 무장한 해커인 '러너' 역할을 맡고, 다른 한 플레이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력한 '기업'을 맡는다.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른 만큼, 각 플레이어의 목표와 게임 방법도 각자 다르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구성물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구성물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구성물 <출처: divedice.com>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의 목표는 아젠다 포인트 7점을 먼저 얻는 것이다. 기업은 점수 카드인 아젠다 카드를 자신의 앞에 놓고, 일정 금액과 행동 포인트를 소모해 획득한다. 아젠다 카드는 기업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러너는 기업이 가진 아젠다 카드를 훔쳐 점수를 낼 수 있다. 러너는 '런(run)'이라는 해킹을 시도해 기업의 손, 카드 덱, 버린 카드더미, 내려놓은 카드를 살펴보고 아젠다 카드를 훔치려고 한다. 반면, 기업은 아젠다 카드를 숨기고 러너 몰래 점수를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러너의 '런'을 방해해야 한다. 결국, 이 게임은 러너가 '런'으로 공격하고 기업이 막는 형태로 이어진다.

먼저, 플레이어들은 기업 혹은 해커 둘 중 하나의 역할을 정한다. 게임에는 다양한 종류의 카드 덱이 있는데 기업은 4개의 덱 중 하나를, 러너는 3개의 덱 중 하나를 고르고 게임을 시작한다. 이렇게 고른 카드 덱을 내려놓은 후, 각자 5개의 크레딧(돈)을 가져간다. 이제 덱에서 카드를 5장씩 뽑아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덱에 넣고 새롭게 5장을 뽑는다.

각 차례마다 할 수 있는 행동들.
각 차례마다 할 수 있는 행동들.

각 차례마다 할 수 있는 행동들. 여기서 원하는 것을 골라 기업은 3개, 러너는 4개의 행동을 하면 된다. <출처: divedice.com>

게임은 기업부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차례를 번갈아 가며 승리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 플레이한다. 기업은 자신의 차례에 카드를 한 장 뽑고 3개의 행동을 하고, 러너는 4개의 행동을 하면 된다.

아젠다를 득점하려면 행동포인트와 크레딧(돈)을 소모해야
한다.
아젠다를 득점하려면 행동포인트와 크레딧(돈)을 소모해야 한다.

아젠다를 득점하려면 행동포인트와 크레딧(돈)을 소모해야 한다. <출처: divedice.com>

기업은 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아젠다를 설치하는데, 아젠다는 원격 서버에 설치할 수 있다. 원격 서버는 아젠다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며, 이 원격 서버는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다. 기업은 카드를 내려놓을 때, 러너와 달리 카드 뒷면이 위로 가도록 내려놓는다. 즉, 카드 내용이 보이지 않게 내려놓는다. 기업은 아젠다뿐만 아니라 자산 카드 또한 뒤집어 내려놓을 수 있어, 러너에게 혼동을 줄 수 있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플레이 장면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플레이 장면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플레이 장면 <출처: divedice.com>

기업은 이 아젠다를 보호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보안 프로그램인 '아이스'를 설치할 수 있다. 아이스 또한 뒷면으로 내려놓지만, 다른 카드와 달리 가로로 내려놓아 러너가 아이스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다. 아이스는 원격 서버 외에도 손패, 카드 덱, 버린 카드 더미의 아젠다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장소에 설치된다.

기업은 내려놓은 카드들을 사용하기 위해 카드를 공개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이 과정을 '레즈'라 하는데, 레즈에는 비용이 든다. 즉, 돈이 없으면 애써 설치한 '아이스'가 도루묵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기업이 아젠다를 내려놓고 아이스까지 완비하면, 마음 놓고 아젠다 카드를 발전시킬 수 있다. 기업은 자기 차례에 행동 1개와 1크레딧을 들여서 카드 위에 발전 토큰을 올려놓을 수 있다. 이 토큰의 개수가 카드가 요구하는 발전 토큰 개수를 만족하면, 해당 카드를 획득해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꽃, '런'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꽃, '런'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꽃, '런'. 아이스브레이커로 아이스를 깰 것인가, 아이스에 의해 당할 것인가. <출처: divedice.com>

한편, 러너는 기업을 해킹하기 위해 프로그램, 리소스, 하드웨어 카드를 설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러너는 런을 수행할 수 있다. 런을 시작하면, 러너는 기업의 서버 중 하나를 골라 선언을 한다. 아이스가 있다면, 아이스와 대결을 하게 된다. 이 때, '아이스 브레이커'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사용해 아이스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기업 플레이어의 플레이 공간.
기업 플레이어의 플레이 공간.

기업 플레이어의 플레이 공간. 명칭이 다를 뿐이라 익숙해지면 쉽다. 카드 뽑는 더미를 연구개발부, 버리는 더미를 기록보관소, 손에 있는 카드를 본부, 이 3곳의 중앙서버 이외의 서버들을 원격서버라 부른다.

모든 아이스를 통과하거나 무력화시켰다면, 러너는 최종적으로 기업의 카드에 액세스하게 된다. 액세스는 어떤 서버를 노렸는가에 따라 달라지는데, 본부(기업 플레이어의 손패)나 연구 개발부(카드 덱)에서 런을 했다면 카드를 1장 뽑아 확인할 수 있다. 기록 보관소(버린 카드 더미)에 액세스한 경우에는, 버린 카드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원격 서버의 경우, 아이스를 제외한 설치된 모든 카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러너가 카드를 확인해 아젠다 카드를 발견하면 그 즉시 득점을 할 수 있다. 다른 카드를 발견한 경우에는 폐기 비용을 지불하고 해당 카드를 버리거나 원 위치에 돌려놓는다.

플레이어들이 차례를 마칠 때 만약 일정 개수 이상의 카드가 손에 있다면, 카드를 버리고 차례를 종료한다. 게임에서 기업은 카드를 뽑는 행동에, 러너는 카드를 버리는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업은 자신의 덱에서 카드를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카드를 뽑을 수 없을 때 패배하게 된다. 러너는 피해를 입어 손에 있는 카드보다 더 많은 카드를 버려야 하거나, 손에 들 수 있는 카드의 장수가 0장보다 적어지면 게임에서 패배한다.

전설의 게임

안드로이드 넷러너는 1996년 '넷러너'라는 이름으로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Wizards of the Coast)에서 발매됐다. 이 게임은 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사이버펑크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를 배경으로 삼았으며, 기본판과 확장판 3개를 발매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리즈를 이어가지 못하고 곧 절판됐다.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서 제작돼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게임인 ‘매직: 더 개더링’에 비해 복잡한 규칙, 접하기 힘든 테마가 문제였다. 더구나 당시 국내에서는 매직: 더 개더링조차 구경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 소비자들이 추가 확장을 구매할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점도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확장에 대한 판매가 일어나지 않으니 유저가 줄어들었다. 발매된 카드가 적으니 전략의 다양성에도 한계가 왔다. 유저들은 다른 게임으로 떠났고, 결국 절판으로 이어지게 됐다.

비운의 명작. 넷러너의 초판
비운의 명작. 넷러너의 초판

비운의 명작. 넷러너의 초판 <출처: divedice.com>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매직: 더 개더링'이 국내에서 안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매직: 더 개더링과 넷러너의 디자이너인 리처드 가필드(Richard Garfield)가 각종 인터뷰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넷러너를 꼽자, 점차 이 게임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게 이 게임을 접한 사람들은 엄지를 추켜세우며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평가했다. 이런 평가에 영향을 받아 이 게임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갔다. 그리고 2012년 이 전설의 게임이 '안드로이드 넷너러'라는 이름으로 재판됐다. 재판된 게임은 그 수요를 충족시키며 빠르게 퍼져갔다.

안드로이드 넷러너는 판타지와 SF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국의 보드게임 회사인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Fantasy Flight Games)에서 출시됐다. 이 회사는 자사의 사이버펑크 보드게임인 '안드로이드(Android)'를 배경으로 이 게임을 재구성해, 소설을 배경으로 했던 초판과 차이를 뒀다.

초판의 카드.
초판의 카드.

초판의 카드. '프렙(Prep)'은 '이벤트(Event)'로 변경됐다.

새로 재판된 게임은 기업과 해커 간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그대로 살리되, 예전과 달리 기업을 4종으로, 해커는 3종으로 늘렸다. 여기에 각각의 특수 능력을 부여해 다양한 느낌을 받게 했다. 몇몇 카드나 공간을 지칭하는 단어가 현대에 맞게, 혹은 보다 직관적인 형태로 바뀌기도 했지만 게임의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게임 규칙상 달라진 부분은 '추적'과 '악평'이다. 기업은 서버 내에 침투한 러너의 위치를 포착해 피해를 주기 위해 '추적'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초판에서는 기업이 '추적'을 사용하면 비공개 경매 방식으로 힘을 비교해 성공 여부를 결정했는데, '안드로이드 넷러너'에서는 공개 방식으로 변경됐다. 즉, 기업이 먼저 총 힘의 크기를 공개하고, 공개된 힘을 토대로 러너가 크레딧을 소모해 힘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초판에서는 기업이 '악평'을 7개 받으면 게임에서 탈락했는데, 이 규칙도 변경됐다. 이제는 러너가 런을 했을 때 임시로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을 얻게 됐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다양한 ID카드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다양한 ID카드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다양한 ID카드 <출처: divedice.com>

덱을 구성하는 방식도 초판과 재판에 차이가 있다. 초판은 덱에 넣을 수 있는 카드의 제한이 없었지만, 재판은 같은 카드를 3장 이상 덱에 넣지 못한다. 또한, 초판은 아젠다 카드의 숫자에 기초해 전체 카드의 장 수가 결정됐지만, 재판은 덱의 총 카드 장수에 따라 아젠다 카드의 숫자가 결정된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초판과 재판 게임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디자이너 리처드 가필드는 "규칙의 정교화, 단순화를 추구한 의미있는 변화"라고 설명했다.

사이버펑크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인공두뇌를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70년대 대중문화양식 중 하나인 펑크(Punk)를 합성한 말이다. 이 용어는 1980년 발간된 브루스 베스키의 단편에서 처음 사용됐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고전 SF와 달리, 사이버펑크는 불안과 허무, 부조리 등을 소재로 한다. 때문에 이 장르에서는 초거대기업이나 군산복합체의 높은 기술력에 의한 지배를 비판하거나, 인조인간이나 개조인간과 공존하는 소시민의 피폐한 삶의 수준과 그들의 저항에 주목한다.

많은 사이버펑크 문화 중에서도 넷러너에 영향을 준 것은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였다. 이 소설은 많은 컴퓨터가 연결된 가상의 공간인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개념을 제시했고, 이 공간 안에서 돌아다니거나 조작하는 과정 등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 개념은 다른 창작 분야에도 영감을 주어 영화 '매트릭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등 많은 곳에서 활용됐고, 보드게임 '넷러너'에도 이어졌다.

안드로이드 세계관을 만든 보드게임 안드로이드 /
인필트레이션
안드로이드 세계관을 만든 보드게임 안드로이드 / 인필트레이션

안드로이드 세계관을 만든 보드게임 안드로이드 / 인필트레이션 <출처: divedice.com>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서 제작된 보드게임 '안드로이드(Android, 2008)'는 이후 출시된 '인필트레이션(Infiltration, 2012)', '안드로이드 넷러너'로 이어지는 새로운 게임 배경을 제공했다. 안드로이드의 세계에서는 인류가 화성에 진출해 테라포밍(화성을 개조해 지구와 유사하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고, 지구와 달이 빈스톡(콩나무)이라 불리는 스페이스 엘리베이터로 이어져 있다. 거대기업 진테키가 개발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는 서비스업 분야의 노동력을 대체한다. 또 다른 거대기업 하스 바이오로이드는 로봇공학과 인공두뇌학을 결합해 바이오로이드를 제작하는데, 이는 노동 시장에서 큰 힘을 발휘해 하층민들을 실직 상태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하층민들은 이들 기업 및 복제 인간들에 대해 증오와 공포, 편견을 가지게 된다. 결국 사회는 불안해지고 끊임없이 테러가 발생하게 된다.

게임 '안드로이드'는 가상의 도시 뉴 엔젤레스와 달 식민지를 오가며 살인사건의 배후를 쫓는다. 초능력을 가진 복제 인간, 의심 많은 인공 지능 로봇, 부패한 경찰, 소외된 현상금 사냥꾼, 곤경에 처한 수사반장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스토리를 진행하고, 게임이 진행될수록 스토리에 따라 범인이 드러난다. '인필트레이션'은 진테키와 하스 바이오로이드에 이어 새롭게 떠오른 신흥 기업 사이버 솔루션즈 주식회사에 침투하는 정보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에는 진테키, 하스 바이오로이드뿐만 아니라, 거대 미디어 기업 NBN, 스페이스 엘리베이터 '빈스탁'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업에 투자를 하는 웨이랜드 컨소시엄 등의 기업이 추가됐다. 이들에 분노하는 해커, 즐거움을 추구하는 범죄자, 호기심 많은 예술가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기업에 침투한다.

살아있는 카드 게임

CCG는 NBA 스타 카드나 메이저리그 야구 카드와 같은 수집용 카드에 게임 규칙을 추가한 형태를 뜻한다. 혹은, 게임 규칙에 카드 수집을 추가한 형태를 의미한다. CCG 이전에도 대전 형식의 카드게임은 있었지만, 카드를 수집하거나 플레이어들끼리 카드를 거래하는 부분은 없었다. 따라서 CCG는 수집과 게임, 이 2가지가 종합된 형태의 카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SF 협상 게임의 진수, 코스믹 인카운더. 사진은 최근 재판된
FFG판
SF 협상 게임의 진수, 코스믹 인카운더. 사진은 최근 재판된 FFG판

SF 협상 게임의 진수, 코스믹 인카운더. 사진은 최근 재판된 FFG판 <출처: divedice.com>

이 장르의 최초 창시자인 리처드 가필드는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로부터 휴대성이 좋고 빠르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제작할 것을 요청 받았다. 그는 이 요구에 부응해 게임을 제작했다. 그는 고전 SF 협상 게임인 '코스믹 인카운터(Cosmic Encounter, 1977)'에서 영감을 얻었다. 기본 규칙을 구성하고, 카드에 의해 그 기본 규칙에 수정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이 게임은 굉장히 많은 종류의 카드로 제작돼, 플레이어들이 카드의 개별 능력과 그 능력들의 조화에 대해 한 눈에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카드의 능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졌다.

80~90년대 당시의 보드게임은 매우 복잡해서 게임을 하는데 4~5시간이 소모됐었는데, 이 게임은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조차 혼자서 연구를 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게임이 바로 '트레이딩 카드 게임(Trading Card Game, TCG)'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 '매직: 더 개더링'이다.

매직: 더 개더링
매직: 더 개더링

매직: 더 개더링 <출처: divedice.com>

'매직: 더 개더링'은 몇 장의 카드를 랜덤으로 담아 한 팩으로 판매됐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카드를 찾기 위해 새로운 팩을 구매하거나, 다른 사람과 카드 교환을 하게 됐다. 이는 2차적인 카드 교환 시장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TCG라고 불렸다. 사실 TCG나 CCG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TCG가 '매직: 더 개더링'의 제작사 위저드 오브 코스트의 상표이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기 위한 분류로 CCG 및 여타 다른 분류명이 사용되곤 한다.

안드로이드 넷러너는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의 '리빙 카드 게임(Living Card Game, 이하 LCG)' 시리즈 중 하나다.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서 LCG를 살아 움직이는 카드게임으로 표현한 사실은 흥미롭다. 보통 '매직 더 개더링', '유희왕'처럼 성공해서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는 게임을 'Live game'이라 하고, 제조사의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판매하고 있지 않은 게임을 'Dead game'이라고 하니, LCG는 보다 역동적인 느낌이다. LCG 또한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의 상표이지만, 일반적인 CCG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여타 CCG와 달리, LCG는 정확하게 알려진 카드들이 한 팩에 들어간다. 따라서 원하는 카드가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와 거래할 필요 없이 그 팩을 구매하면 된다. 즉, 모든 카드를 모으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며, 카드의 개별 가치가 여타 다른 TCG에 비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카드를 교환하는 2차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보통 TCG 회사들은 팩을 재판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는 2차 시장에서 카드의 가치가 교란돼 시장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와 달리 LCG는 재판이 자유롭다. 실제로 일정 기간 품절 후, LCG는 다시 카드 팩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사이클' 확장판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사이클' 확장판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사이클' 확장판 <출처: divedice.com>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에서는 이 LCG의 카드 팩을 보통 '사이클' 단위로 특정한 주제를 설정해 판매하고 있다. 이 사이클에는 6개의 팩이 있으며, 각 진영이 한 팩에 고루 분배되어 들어 있다. 특히 안드로이드 넷러너 코어 세트의 7개 ID카드 외에 추가적인 ID카드를 제공하고 있어, 플레이어들에게 더 많은 전략적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딜럭스' 확장판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딜럭스' 확장판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딜럭스' 확장판 <출처: divedice.com>

사이클 확장들은 2012년 이후 거의 매달 발매되고 있다. 이 외에 1년마다 발매되는 '딜럭스 확장판'이 있다. 딜럭스 확장판에는 각각 2개의 세력이 들어가며, '사이클' 확장에 비해 많은 카드를 제공한다.

디자이너 리차드 가필드

디자이너 리차드 가필드는 1963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건축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네팔,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2살에야 미국 오리건에 정착했다. 그의 가족력을 따라가면 흥미로운 사실이 많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미국 제20대 대통령인 제임스 A.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이고, 그의 종조부는 페이퍼 클립을 발명한 사람이다. '매직: 더 개더링'의 카드에 일러스트를 그려준 예술가 페이 존스(Fay Jones)는 그의 이모다.

리차드 가필드 / 리차드 가필드 본인을 그린 매직: 더 개더링
카드
리차드 가필드 / 리차드 가필드 본인을 그린 매직: 더 개더링 카드

리차드 가필드 / 리차드 가필드 본인을 그린 매직: 더 개더링 카드 <출처: boardgamegeek.com>

그는 13세에 처음으로 게임을 개발했고, '던전 앤 드래곤(Dungeons & Dragons)'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한 리차드 가필드는 벨 연구소에 들어갔고, 학위를 얻기 위해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같은 해에 게임 '로보랠리(Roborally, 1994)'를 제작하고, 출판을 위해 게임제작사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많은 게임제작사들이 그의 게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게임의 단점을 잘 볼 수 있는 제3자에게 맡기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상대적으로 열린 자세를 보여준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 호감을 갖게 된다.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의 피터 애드키슨(Peter Adkison) 대표는 보잉사의 엔지니어였는데, 그는 자신이 즐기던 게임의 확장을 출판하기 위해 1인 기업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를 차린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로보랠리(1판)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로보랠리(1판)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로보랠리(1판) <출처: boardgamegeek.com>

이후 리차드 가필드는 1990년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에 '로보랠리' 출판을 제의했지만, 거절을 당한다. 대신, 피터 애드키슨은 리차드 가필드에게 로보랠리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해 달라고 의뢰한다. 일주일 후 리차드 가필드는 야구 카드 게임과 그가 1982년에 만들었던 파이브 매직스(Five Magics)를 토대로 한 게임 아이디어를 가져왔고, 곧 이 둘을 조합한 첫번째 TCG인 '매직: 더 개더링'을 개발했다. 처음에 리차드 가필드와 피터 애드키슨은 이 게임을 '마나크러쉬(Manaclash)'라고 불렀는데, 개발 중인 게임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가필드 게임즈(Garfield Games)라는 명의의 회사를 세워 개발을 계속했다. 리차드 가필드가 매직: 더 개더링을 개발할 당시, 그는 아직 학생이었다. 따라서 그의 테스터 그룹은 거의 펜실베니아대학교 학생들이었다.

1993년 리차드 가필드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워싱턴의 위트먼 대학에서 수학 교수가 됐다. 그 해 매직: 더 개더링은 미국 최대의 토이쇼(Toyshow)중 하나인 '젠콘(Gen con)'에 소개됐다. 이렇게 공개된 매직: 더 개더링의 초판은 행사장에서 모두 품절됐다. 매직: 더 개더링의 대성공으로 리차드 가필드는 단 1년 만에 강단을 떠났고,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의 전업 게임 디자이너가 됐다. 그는 게임을 다듬는 한편, 매직 토너먼트를 기획했다. 그는 1994년 로보랠리를 드디어 정식으로 출판했고, '달무티(The Great Dalmuti, 1995)', '넷러너(Netrunner, 1996)', '배틀 테크(Battle Tech, 1996)' 등을 게임 개발을 계속했다.

1998년, 미국의 거대 완구 기업인 해즈브로(Hasbro)가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를 인수했다. 그는 2000년에 돌연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를 떠났고, 프리랜서 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는 2개의 보드게임을 제작하더니 비디오게임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2개의 비디오게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EA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디자이너이자 컨설턴트를 겸하며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했다.

리차드 가필드는 매직 카드로 청혼을 하거나 아이의 탄생을 카드로 축복하는 등 그의 인생을 카드에 담았다. 이 카드들은 한정 수량 제작돼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리차드 가필드는 매직 카드로 청혼을 하거나 아이의 탄생을 카드로 축복하는 등 그의 인생을 카드에 담았다. 이 카드들은 한정 수량 제작돼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_리차드 가필드는 매직 카드로 청혼을 하거나 아이의 탄생을 카드로 축복하는 등 그의 인생을 카드에 담았다. 이 카드들은 한정 수량 제작돼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출처: magiccards.info> _

2011년, 그는 다시 보드게임으로 돌아와 '킹 오브 도쿄(2011)'를 개발했다. 2012년에는 '넷러너'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2013년에는 '고오스트!(Ghooost!, 2013)'를, 2014년에는 '킹 오브 뉴욕(king of New York, 2014)'을 선보이며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어판 출시에 걸린 3년

안드로이드 넷러너는 2015년 1월 정식 한국어판이 발매됐다. 2012년 영문판 발매 당시에도 이 게임의 한국어판 출시를 요청하는 게이머들이 많았다. 하지만,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즈의 국내 유통사인 코리아보드게임즈는 같은 LCG 게임인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의 한국어판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기에, 두 게임을 동시에 발매하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에는 CCG 장르를 즐기는 게이머 자체가 적어 시장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에 게임을 즐기는 소수의 플레이어마저 나뉠 위험이 있었다. '스타워즈'의 한국어판 발매가 결정된 것은 사이버펑크 테마의 게임보다는 '스타워즈' 테마가 더 대중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 한국어판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 한국어판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 한국어판 <출처: divedice.com>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은 그 출시 자체가 국내 유통사의 도전이기도 했다. 2013년 발매된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은 초보자 설명회를 여는 등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를 두었다. 초판이 어느 정도 판매되어야 확장도 판매되면서 유저와 게임 간의 선순환이 일어나는데, 초판의 판매량이 저조했고 무리하게 발매된 확장은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스타워즈 LCG 카드게임에 대한 국내 반응을 봤을 때,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성공 여부는 불투명했다. 게다가 안드로이드 넷러너 영문판의 출시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영문판을 구매해 즐기는 유저들이 많은 점도 한국어판 출시를 어렵게 했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한국어판이 출시된 것은 이 게임이 명작에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게임이기 때문이다. 흡입력 있는 테마와 정교한 게임성은 2인용 게임 중 가히 최고라 할만 했다. 출시 후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한국어판이 나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게임의 한국어판 발매 자체가 의미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의외로 '안드로이드 넷러너'의 한국어판 발매는 이미 영문판을 가진 게이머들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았다. 이미 게임을 보유한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가진 게임의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같은 게임이 새롭게 발매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기 십상인데, 안드로이드 넷러너에 대한 반응은 이례적이었다.

한국어판의 발매로 난이도가 대폭
내려갔다.
한국어판의 발매로 난이도가 대폭 내려갔다.

한국어판의 발매로 난이도가 대폭 내려갔다. <출처: divedice.com>

영문판을 먼저 접한 게이머들은 이 게임의 난이도가 여타 다른 보드게임에 비해 높다는 평가를 내렸다. 다른 게임들에 비해 카드에 텍스트의 양이 많아 모든 카드들의 기능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고, 그마저도 생소한 IT 용어라 접근성이 낮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게다가 영문을 읽는 수고로움을 겪어가며 이 게임을 접할 초심자는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어판의 발매는 게임의 난이도를 대폭 낮춰, 이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꿈꾸게 했다. 실제로 많은 유저들이 한국어판 개발 과정에서 번역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등, 이 게임에 대한 높은 관심을 피력했다.

게임이 발매되자, 이 게임에 대한 높은 관심이 이어져 각지에서 넷러너를 즐기는 모임이 점차 늘어갔다. 이 모습을 보니, 초판이 절판되고 한동안 긴 잠을 자며 유저들에게 전설로 퍼졌던 날들이 생각난다. 재판이 발매되고 한국어판이 발매되기까지, 지난 3년은 한국의 보드게임 유저들이 이 게임에 대한 갈증을 가졌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전설의 부활이 흥분되고, 기대되고, 반갑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권성현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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